풍도(오대십국시대)

 



<colbgcolor=#000000><colcolor=#ece5b6> '''오대의 재상'''
'''馮道 | 풍도'''
'''시호'''
영왕(瀛王) → 문의왕(文懿王)
'''주군'''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
석경당
석중귀
요태종
유지원
유승우
유빈
곽위
시영
'''출생'''
882년
'''사망'''
954년 4월
'''재임'''
'''오대의 재상'''
927년 ~ 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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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000000> ''''''
풍(馮)
''''''
도(道)
''''''
가도(可道)

1. 소개
2. 생애
3. 평가
4.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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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정치가로, 많은 왕조가 흥망하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서도 변함없이 재상의 자리를 보존한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하다. 자는 가도(可道).
무려 5개 왕조(후당, 후진, 요나라, 후한, 후주) 11명[1]황제[2]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황제는 계속 바뀌는데 재상은 그거랑 아무 상관 없이 계속 풍도였던 것.[3]

2. 생애


풍도는 당나라 말기였던 882년, 영주 경성의 한 평범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작문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유주절도사 유수광의 휘하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수광이 다른 고을을 침공하는 것을 막으려고 간언하다가 옥에 갇혀 거의 죽을 뻔 하기도 하였다. 풍도가 이후로 정계에서 몸을 사리며 시류에 영합하는 움직임으로 일관한 것도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914년, 유수광이 이존욱에게 멸망당하자 당시 이존욱이 통치하던 태원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이존욱 휘하의 환관인 감군사 장승업과 만나게 되었는데, 장승업은 그의 재능을 높이 샀는지, 풍도를 후원하여 관료로 등용하였다.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여 황제에 등극하자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몇 년 후인 927년, 이사원이 즉위한 후에는 그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다.
이사원의 뒤를 이어 이종후가 즉위하였으나, 고작 재위한 지 1년이 지난 934년, 이종가에 의해 찬탈당하였다. 풍도는 그 과정에서 이종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936년, 석경당의 쿠데타로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건국되자 또다시 석경당에게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때에 풍도는 석경당의 명을 받들어 거란 요태종 야율덕광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2개월간 머물렀다. 요태종은 이때에 풍도의 명망을 잘 알고 있어서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했지만, 풍도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며 이를 완곡한 태도로 거절하고는 후진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석경당은 풍도를 무척 신뢰하게 되어 반드시 그와 국정을 논하였다.
942년, 석경당은 중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앞두게 되자 풍도를 호출하여 자신의 어린 아들인 석중예의 후사를 부탁하였다.[4] 그러나 석경당이 죽은 후,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린 석중예 대신에 석경당의 장성한 조카인 석중귀를 황제로 옹립한다.
946년, 석중귀요나라와의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였고, 이로인해 요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해와 후진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요태종은 다시 풍도와 재회하여 그를 태부에 임명하였다. 풍도는 요나라 군사들이 중국의 백성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멈춰줄 것을 간하였고, 요태종은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947년, 유지원후한을 건국하여 거란족의 지배에 항전하자, 요태종은 북쪽으로 철군했다. 풍도 또한 이 행렬을 따라갔다. 그런데 북쪽으로 이동하던 와중에 요태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장례식을 틈타서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풍도는 여러 대신들과 함게 이에 합세하여 격려하였고, 요태종의 행렬은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풍도를 비롯한 후진의 대신들은 유지원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유지원이 죽자 그의 아들인 유승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런데 950년, 유승우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개국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명망높았던 추밀사 곽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유승우를 제거하고 후주를 건국하였다. 풍도는 곽위에게도 등용되어 후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그를 위해 일하였다.
954년, 곽위가 죽자 그 양자였던 시영이 뒤를 이어 후주의 황제가 되었다. 시영이 즉위하자마자 북한유숭거란과 결탁하여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공해왔는데, 이에 시영은 자신이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퇴하고자 하였다. 이때 풍도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군주가 직접 출전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장수를 파견할 것을 간하였으나 시영은 뜻을 꺾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시영의 뜻에 따랐으나, 풍도는 끝까지 시영의 출전에 반대하며 언쟁을 벌이기까지 했다.[5] 결국 시영은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6]
그럼에도 시영은 풍도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서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령의 나이였던 풍도는 시영이 유숭을 격파한 지 몇달 후에 73세의 나이로 숨울 거두었다. 시영은 풍도의 죽음에 크게 낙심하여 3일간 조례를 금하며 풍도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풍도는 사후에 영왕(瀛王)으로 추증되었으며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


풍도의 이행(履行: 풍도가 행한 바들을 말하는 듯 하다.)은 그윽하여 옛 사람의 풍격이 서려있고 풍도의 도량은 깊어서 큰 신하의 예를 얻었다. 하지만 풍도는 4개의 왕조를 섬겨 여섯 황제의 재상이 되었으니, 충(忠)을 행했겠는가! 무릇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인간의 불행인데, 하물며 3번 바꾼 자도 그러하겠는가! 죽은 자의 최후를 장식하는 의식에서 문정(文貞)이나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풍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오대사의 저자 설거정[7]

뻔뻔한 인간이다!

신오대사의 저자 구양수

그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편안히 한 것은 부처나 보살의 행동과 같다.

송나라 왕안석

그가 여러 왕조를 받들며 핵심지위를 장악하고 이를 자랑한 것[8]

은 절조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간신의 표상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옛 사람의 풍격을 갖춘 거대한 산과 같은 인물.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

백성들이 고통을 벗어난 것은 그가 부양에 힘쓴 탓이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

풍도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 편이다.[9] 지조나 염치도 없이 오로지 일신의 안녕만을 위해 주인을 수없이 갈아치운 간신배로 여겨지기도 하고, 혹은 처세의 달인이자 임금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뛰어난 재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풍도의 평가를 다채롭게 하고 있다.
풍도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함부로 정적을 만들지 않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왕조가 바뀌면 잽싸게 갈아타주며, 강자 앞에서는 '''넙죽 엎드려서 간도 쓸개도 빼다 바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신으로 요나라에 갔을 때 요 태종에게 '''"저는 재주도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러나 그가 5대 10국 황제들로부터 중용되었던 것을 단순히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다. 당시의 황제들이라고 풍도가 주인을 수차례 바꾸었음을 모를 리가 만무했겠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풍도를 재상으로 중용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풍도가 지닌 정치가이자 관료로서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또한 풍도는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는 후환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일을 서슴지않았다. 요 태종 야율덕광의 밑에 있을 때에는 그의 부하들이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일을 그만 두도록 간하여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였고, 후주 세종 시영을 보좌할 때에는 황제의 심기를 팍팍 거스르는 말을 날리면서까지 친정을 반대하였다.
이처럼 풍도는 난세를 맞아 몸보신하는 재능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국가의 일을 잘 처리하여 민생을 보살피는 데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가 충성과 지조를 중시하던 당대의 가치관이나 윤리관에 들어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5개의 왕조를 거치면서 왕조마다 충성을 다짐했을 터이니 이런 부분에서 겸연쩍어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덕망이나 명성이 높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해야 할 수준의 군주가 과연 옳은 길을 가르쳐 준 들 반성하고 자기의 행동을 고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세상사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니 그런 사람도 잘 다뤄서 '목숨걸고 개과천선을 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라고 비판한다면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지...
기본적으로 풍도는 국가나 군주의 가치를 당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했던 선비들에 비해서는 크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군주가 바뀌던 왕조가 바뀌던 풍도는 그저 적당하게 이용해 먹을 만한 군주나 왕조면 이용해 먹었고 그게 안 될 때 버릴 수 있으면 버리는 사람이기는 했다. 다만 풍도가 그렇게 지조없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 목숨의 보신' 만큼이나, 그리고 어찌보면 그 이상으로 '백성의 안녕' 이라는 걸 추구한 관료라는 게 당시 관료로서는 굉장히 특색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장 목숨 걸 만한 일에는 목숨을 걸기도 했다. 석경당의 후대 황제의 배반으로 빡친 요나라 황제의 학살을 막으면서 '지금 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건 부처님도 아니고 오직 폐하 한 분 뿐이십니다'라며 요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일이 과연 만만하게 웃으면서 할 만한 일이었을까? 저 행동이야말로 진짜 목숨을 걸고 제대로 간언을 한 것이었다. 분명히 가후처럼 스스로의 보신만을 위해서 재주를 부린 사람은 절대로 아니였다는 증거다.
후세 선비들은 이 일을 들어서 염치도 지조도 자존심도 없이 오랑캐 황제에게 굽힌 행위라고 비난했지만, 저 행위가 비난받을 행위도 아니었고 분명 목숨을 걸고 학살을 막고 많은 인명을 구한 행위였다는 것,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잘못되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것은 현시대 사람들의 가치관뿐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풍도의 능력만큼이나 그의 인품이나 덕망을 당대 사람들이 칭찬하지는 않았을 테니....[10]
풍도가 군주들 비위를 맞추고 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엎드려 기다가, 혹은 지조없이 모시는 군주를 바꾸다가 하면서 했던 일이라는게 저렇게 백성들의 삶에는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당장 요나라 황제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했던 저 아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런 처세의 목적 자체가 자기의 보존이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이었던 사례도 분명히 있었다. 비판자들도 인정하듯 당장 금전적으로도 청렴했고 자신의 것을 털어서 구호하는 데도 아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풍도란 사람이 '사직과 군주를 구분하여 충성하며 백성을 생각한 사람'이란 이탁오의 평가가 크게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당대에 인정이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저 평가가 유독 이탁오라는 튀는 지식인의 평가만도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1] 실제로 오대십국시대는 그 기간도 짧았거니와 다른 난세들과 비교해 보면 대규모 학살이나 유랑이 적은 시대였다. 거기에 풍도란 사람의 저런 캐릭터가 기여한 바가 제법 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보신에 능했던 많은 이들과는 달리, 풍도는 개인적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실천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평소에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재상을 지낼 적에는 황제가 하사하는 재물조차도 받기 꺼려했다.[12] 벼슬을 지내면서도 검소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하였으며, 기근이 들면 재산을 풀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였고,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신오대사》의 저자였던 구양수는 풍도열전을 저술하면서 풍도의 행적에 대해 염치도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으나[13], 그러면서도 그의 청렴결백한 면모에 대해서도 분명히 기록하였다.

4. 그 외에


제국의 아침에서는 풍도가 오랫동안 재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쌍기가 다한 거고 풍도는 쌍기가 해놓은 걸 이용하여 출세하고 쌍기의 이름이 알려지는 걸 숨겼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거 없는 사실이니 믿을 만한 건 아니다.
풍도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설시(舌詩)'.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시로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할 때 자주 인용된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여는 문이고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니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간직한다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어디서나 거뜬히 몸을 편히 하리라
조선연산군은 풍도의 이 시를 내관들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물론 자기한테 바른말 하면 조져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자기 입장에서 충신인 간신들의 말은 듣고 진정한 충신의 간언은 씹겠다는 의미.
[1] 후한의 임시황제 유빈까지 포함한다면 12명이다.[2]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이종가, 석경당, 석중귀, 요태종, 유지원, 유승우, 유빈(임시황제), 곽위, 시영.[3] 요나라에서는 사신으로 갔을 때 재상급으로 대우해주었을 정도로 이름이 있었고 그러한 명성은 교체된 왕조에서 이용가치가 매우 크다.[4] 당시 석경당은 석중예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 자리에서 석중예로 하여금 풍도에게 절을 하게 하고는 그의 품에 안기게 하기까지 하는 등 눈물나는 제스쳐를 취한다.[5] 이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꽤 유명하다. 시영이 "당 태종도 몸소 천하를 평정했는데 나라고 내 몸 하나를 아끼랴?"라 하자 풍도는 "폐하께서 스스로 당 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라 맞불을 놓았다. 이에 시영이 "유숭 따위를 멸하는 것 쯤은 큰 산이 달걀을 뭉개듯 간단하다."고 말하자, 풍도는 "폐하께서 스스로 큰 산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라 답하였다.[6] 다만 풍도의 충고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라서, 조광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뻔 했다.[7] 설거정은 912년생으로 이종가가 통치하던 후당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고 출사한 사람이니 풍도를 가까운 곳에서 관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대체로 풍도의 평이 좋기는 했지만 확실히 유학자들에게서 지조가 없는 좋지 않은 인간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던 모양이다.[8] 풍도가 말년에 스스로 장락노(長樂老)라는 를 만들어 칭한 것을 말한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이 장락노라는 명칭은 뽐내려는 뜻에서 지은 게 아니라 가문의 원적인 장락군(長樂郡)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토록 의혹을 사기 쉬운 별명을 본인 스스로 붙인 건 풍도 자신도 어느 정도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되길 바란 걸지도....[9] 다만 상술한 설거정의 평가가 있기는 해도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지는 않아서 일반적으로 무척 좋았던 듯 하다.[10] 심지어 뻔뻔한 인간이라고 신오대사에서 대대적으로 디스한 구양수조차도 풍도의 말발로 요나라 황제로부터 백성들 목숨을 구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11] 심지어 저 평가가 나온 책이 이탁오의 저서인 장서인데 그 장서에서는 무려 맹자의 '백성을 귀함으로 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을 가벼움으로 한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란 말을 인용하여 저렇게 평가한 것이다. 유학의 주류적인 사상으로도 충분히 풍도의 행위를 옹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탁오의 자체는 유학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는 했어도 이탁오 자체가 '심지어 니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맹자도 저랬는데 니들이 왜 저래?' 란 식의 화법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12] 석경당이 재물을 내렸을 때 '신은 부모가 전란 중에 일찍 돌아가시어 제 생일도 잊고 사는 처지입니다.' 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13] 다만 신오대사가 화이론적인 시각이 굉장히 강한 사서임은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