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공

 


'''한고제의 아버지
전한 추존 황제'''
'''太上皇'''
'''태상황'''

'''시호'''
태상황(太上皇)
'''출생'''
기원전 270년(?)
'''사망'''
기원전 197년[1]
전한 장안(長安)
'''재위'''
'''전한의 태상황'''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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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劉)
''''''
알 수 없음[4]
'''황후'''
소령황후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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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가계
4.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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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태공(劉太公)은 전한의 초대 황제 고제 유방의 아버지이자, 전한의 추존 황제이다. 여타의 추존 황제들과는 다르게 이례적으로 생전에 태상황으로 추대되었다. 유태공이란 이름은 사실 본명은 아닌 듯하며 따로 여러 가지 이름들이 전해진다.

2. 생애


본래 평생을 고향인 패현 풍읍에서 평민으로 살았으나, 아들인 유방이 군세를 일으켜 군벌이 된 이후로는 다른 식솔들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이곳 저곳을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팽성대전 당시 미처 유방이 챙기지 못해서 며느리인 여후 등과 함께 항우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광무 대치 때에 항우가 태공을 높은 단 위에 올려놓고는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태공을 삶아서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런데 이때에 유방이 항우에게 던진 말이 가관이다.

니랑 나랑 초회왕 앞에서 의형제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곧 니 아버지도 되는 셈인데, 니가 자기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면야 말리지 않을 테니 좋을 대로 해라! 그래도 형제끼리 의리란 게 있으니까, '''니 아버지를 끓인 국물이 다 되면 너만 먹지 말고 나한테도 꼭 한 사발 보내다오!'''

이는 엄연히 정사인 《사기》 항우 본기에 전하는 기록이다. 인터넷 문화의 변질로 패드립이 심심찮게 나오는 현대 기준으로도 상식을 초월한 욕설인 만큼 2300년 전 그 당시는 정말로 듣는 이가 눈알이 튀어나오고 사지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충격받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항우는 귀족 출신이라 욕설에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런 역사에 길이 남을 '''패드립'''에 항우는 상종도 못할 천한 것이라며 날뛰었으나, 인질극 따위는 유방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항백이 항우를 만류하여 유태공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항우가 홧김에 유태공을 죽인다고 한들 이미 유방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취한셈이라 아무 영향도 없으며 되려 남의 아버지와 마누라 목숨으로 인질극 협박이나 하는 항우의 위신을 갉아먹는 역효과만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가 유방 편을 들며 자살했다는 이유로 시체를 팽형해버린 전적이 있었다.
이후 전세가 점차 유방 측에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자, 기원전 203년에 유방은 육고(陸賈)[2]와 후공(侯公) 등을 항우에게 보내서는[3] 천하를 양분할 것을 약속하면서 항우에게 사로잡혀있던 부모와 처자식 등을 비롯한 식솔들을 돌려받았다. 유태공도 이때에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태공은 저런 패드립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아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판본에 따르면 광무 대치 당시 이런 아들의 패드립을 듣고 '''껄껄 웃었다'''고 했다. 부자 간에 통하는 게 있긴 했나 보다.
이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이때에 이미 유방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서로를 평민의 예로 대했다. 기원전 201년, 집안에서 유태공을 모시던 한 신하가 아무리 유방이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이니 예법에 맞게 영접해야 한다고 간하였다. 유태공 또한 그 말을 받아들였고, 이후로 유방이 찾아올 때마다 문 앞에 빗자루를 들고 서있다가 천자를 대하는 예를 갖추어 뒷걸음질을 하며 아들을 맞이하였다. 유방은 처음에 이를 보고 당황하였으나 자초지종을 알고는 태공에게 간언을 한 신하에게는 500근의 금을 상으로 내렸다. 그리고 "자식이 뛰어나면 아버지가 높아지는 게 도리지. 내가 천하를 평정한 건 전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라며 유태공을 태상황으로 추대했다.
그 외에도 유태공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더 전한다. 유태공은 오래전부터 건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유방보다는, 농사를 지으며 성실히 가장 노릇을 했던 둘째 아들 유중을 더 사랑하였다. 훗날 황제가 된 유방은 자신의 형인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했는데, 유중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봉국을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합양후로 격하당했다. 뒤에 유방이 미양궁에 집안 사람들을 불러서 아버지의 장수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옛날에 저보고는 생업도 꾸리지 못하고 둘째 형처럼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디가 더 의지가 되십니까?"'''라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유방은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집안에서 나잇값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따위로 취급받았는데, 그 때문에 출세한 후에는 오히려 자신이 심술궂은 말들을 던지며 식구들에게 은근히 뒤끝을 부렸다. 그 유명한 갱힐후 사건만 보더라도 감이 잡힐 것이다.
갱힐후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유방은 과거 젊었을 때 분쟁이나 동네 건달들과의 패싸움 등 사고를 쳐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패거리들을 끌고 큰 형 유백의 집에 들어앉아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 당연히 형수는 이를 몹시 싫어하며 혐오했는데 유방이 꼴보기 싫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접할 국(음식)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국이 담겨 있는 솥의 밑바닥을 대놓고 들으라고 크게 긁어대었다. 물론 이러한 노골적인 면박에 크게 거북해진 동료들이 집을 나갔고, 이후 유방이 솥을 확인해보자 국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것을 좋아하며 일단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크게 베풀기를 좋아하던 유방의 입장에선 크게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황제가 된 유방은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제후에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했지만 큰형과 형수 사이에 태어난 신(信)이라는 아들에게 봉토를 하사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방의 부친인 유태공이 자신의 손자에게도 봉토를 하사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유방은 '조카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형수가 소인(小人)이어서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 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이후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여 유신을 제후의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칭호는 '갱힐후'(羹詰候) 즉 '국 그릇을 긁는 제후'였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봉읍(封邑)을 주었으므로, 유신은 영지를 받았건만 체면을 구겼다.
그러나 유방이 심술궂게 굴긴 했어도 그렇다고 해서 유방이 아버지를 홀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서경잡기』에 따르면, 유태공은 본래 민간에 살던 사람이라 장안의 깊은 궁으로 옮겨온 후에는 늘 우울해하기만 하고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유태공은 평생동안 백정, 장사꾼, 술장수, 떡장수 등을 비롯한 거리의 평민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닭싸움이나 축국 등의 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적막하기 그지없는 궁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방이 이를 알고는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하여 장안 근방에 고향인 풍읍을 본따서 신풍이라는 마을을 만들고는 고향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에 유태공도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태공은 황제가 된 아들 유방으로부터 나름대로 잘 대접을 받고 살다가 기원전 197년에 사망하였다. 아들 유방보다 겨우 2년 빠른 죽음이었다. 능호는 만년릉(萬年陵)이다.
참고로 중국의 황제 中 39명이 유태공의 후손이다. 전한, 후한, 촉한의 시조는 한고조의 후손이고, 유송은 막내아들인 유교의 후손이 세웠다.

3. 가계


  • 태상황(太上皇) 유태공(劉太公)
  • 배우자: 태상황후(太上皇后) 유온(劉媼)
    • 아들: 무애왕(武哀王) 유백(劉伯)
    • 아들: 대경왕(代頃王) 유중(劉仲)
    • 아들: 전한 1대 한고제 유방
  • 배우자: 태상황후(太上皇后) 이씨(李氏)
    • 아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4. 매체에서의 등장


초한전기에서는 유방이 노관의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장면에서 등장. 나이를 먹고서도 마땅한 일 하나 없이 건달짓이나 하는 아들이 한심했는지 가족의 법도대로 매를 치지만 나이가 있는 데다 어이가 없어선지 몇대 치다 만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사고를 치는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기도. 유방이 진나라의 법 때문에 노역을 가며 배웅을 할 때도 울먹였고, 유방도 내심 마음에 걸린지 한번 더 큰절을 올린다. 아들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도주하자 유태공과 여치도 옥에 갇히지만, 유방이 평소 인망을 쌓은 덕분에 조참, 하후영, 주가 등 여러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면서 아들의 인맥에 내심 감탄하기도. 유방의 거병 후 옹치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족들과 억류되었다가 풀려났고, 이후 한왕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며느리 간의 다툼을 비롯한 이런저런 트러블에 말려들기도 했다.
유방이 한왕이 되고, 좀 팔자가 피나 싶었지만 팽성대전에서 초군의 포로로 붙잡힌 뒤 또 고초를 겪는다. 손목을 그어 자살을 하려 했지만 며느리들이 늦지 않게 발견한 덕분에 살아남는다. 시간이 한참 흘러 광무대치 땐 답답했던 항우가 유태공을 끌고 나와서 팽형을 해버리겠다고 유방을 협박하지만 유방이 위에도 서술된 것처럼 패기있게 뻗대고선 돌아가버리자 항우가 풀어주면서 겨우 한 숨을 돌린다. 하지만 유방도 아버지가 걱정된 나머지 막사로 돌아가자마자 통곡을 했고, 소하와 항백의 협상을 통해 아버지와 가족들을 풀어주도록 해서 겨우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여치 못지 않게 온갖 고생을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출연은 없어서 통일 후 유방과 유태공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쉽다. 대신 마지막 화에서 황제가 된 유방이 패현의 자신의 옛 집으로 잠시 들렸을 때 아버지와 가족들의 옛 모습을 회상한다.

[1] 아들인 유방이 50대에 죽은 것으로 보이니 그 아버지인 유태공은 사망 당시 70~80대였을 것이며, 대략 기원전 270년대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2] 역이기와 같이 역생육가열전에 실린 육가를 가리킨다.[3] 육가가 처음에 갔을 때 응하지 않자 두 번째로 후공이 파견되어 약조가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