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목

 

''' 유현목 감독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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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
[image]
'''감독상'''
''' 제1회
(1963년) '''

''' 제2회
(1964년) '''

''' 제3회
(1965년) '''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유현목
(잉여인간#s-3.1)'''

김수용
(저 하늘에도 슬픔이)
''' 제5회
(1967년) '''

''' 제6회
(1969년) '''

''' 제7회
(1970년) '''
김수용
(사격장의 아이들)

'''유현목
(카인의 후예#s-2.1)'''

최하원
(독짓는 늙은이)

'''역대'''
[image]
'''감독상'''
''' 제1회
(1962년) '''

''' 제2회
(1963년) '''

''' 제3회
(1964년) '''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제4회
(1965년) '''

''' 제5회
(1964년) '''

''' 제6회
(1967년) '''
신상옥
(벙어리 삼룡이)

'''유현목
(순교자)'''

김수용
(토지)

''' 제7회
(1968년) '''

''' 제10회
(1971년) '''

''' 제11회
(1972년) '''
신상옥
(대원군)

'''유현목
(분례기)'''

신상옥
(평양폭격대)



1. 소개
2. 인생
3. 성향
4. 가족사
5. 여담


1. 소개


兪賢穆[1](1925.7.2~2009.6.28)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제작자이다. 한국영화 초창기에 리얼리즘을 이끌었던 거장으로 통한다.

2. 인생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덕성보통학교와 휘문 중학교를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9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지만 위로는 어릴 때 죽고 5남매만 남게 되었으며, 어린시절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와 화가, 바이올리니스트, 무용가, 건축가 등의 다양한 장래희망을 꿈꾸었던 그는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2]을 읽고 희곡 작가가 되기로 결심, 서울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에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고 김기림[3]의 지도하에 대학 최초로 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한 해풍이란 45분짜리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극장을 드나들어 영화를 외우면서 영화를 공부했다.
동국대 재학 중인 1947년에 이규환의 조감독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56년 발표한 영화 교차로라는 작품으로 정식 영화감독 데뷔하였다. 이 시기엔 테크닉에 대한 탐구에 열중했으며, 평단에서도 ‘정열적인 테크니션’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후 1957년에 발표한 잃어버린 청춘으로 영평상ㆍ부산일보상ㆍ국제영화잡지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된다.
이후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화한 대표작인 오발탄(1961)을 통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촬영기간만 13개월이 되고, 배우들도 거의 무보수로 출연하는등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되었으며, 군사 정권의 위협에 상영 중단을 겪게 되는등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 이후 현재까지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불러온 의미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오발탄은 사회고발적인 비판의식이 포함된 영화로 해방촌에 살고 있는 월남 피난민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었으며, 4.19 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잉여인간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후진 양성과 영화계 발전을 위해 교수직을 하고 여러 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제작자로도 활동하여 로보트 태권V를 제작하기도.

3. 성향


1966년에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를 발표를 한 경험이 있는 만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으며, 작품에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려 노력을 한 인물이다. 60년대 이후에는 사회문제와 종교를 결합시킨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는 순교자와 사람의 아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주제들을 표현주의 등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었으며, 춘몽에서는 독일 표현주의의 형식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다루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1967년에 발표한 단편 <손>은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년작)>과 함께 한국 초기 실험영화로 통한다. 70년대에는 로보트 태권 V의 제작도 맡아 애니메이션의 영역에도 발을 들여놓았으며, 후기 인터뷰에선 탐미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김수용 등과 함께 1960대 문예영화 붐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는 극심한 검열때문에 슬럼프를 겪기도 했는데, 때문에 반공적인 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춘몽 땐 그 파격성 때문에 음화기소죄로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화 사조를 건드렸던 감독이다.

4. 가족사


6.25 때 부모님과 5남매, 모두 7명의 가족 중에서 아버지와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바로 아랫동생은 피신해 있던 과수원에서 폭사 당했고, 둘째동생은 해주예술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징집되어 인민군군악대에서 일했다는 소식 이후론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가족 즉 막내 동생 누이는 1ㆍ4후퇴 때 월남했는데, 어머니는 막내동생을 중앙신학교에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6.25로 인한 이런 아픈 가족사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5. 여담


목공예의 대가인 박성삼의 딸이자 화가인 박근자와 결혼했다. 아내가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다고.
김기영 감독과 라이벌로 통하기도 했는데, 살아있었으면 하는 영화인이 있냐는 질문에 김기영이라고 답하는가 하면, 50~60년대 한국영화 걸작 중에서 김기영의 10대들의 반항을 꼽는 등 평소 그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여여여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 기계 유씨 '穆'자 항렬[2] 당시 이 작품의 굉장한 팬이었다고 전해지며, 해방 후, 피에르 슈날 감독의 죄와 벌을 여러번 보았을 정도였다고 한다.[3]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평론가로,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문학인으로 통한다. 초현실주의풍의 시들을 여러 편 남겼으며, 생전에 시인 이상과도 친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