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clearfix]
1. 개요
사단법인 한국영화인총연합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가 후원하는 영화 시상식[2] 의 명칭. 3대 영화제 중 가장 역사가 깊으나 애니깽 사태, 배우에 대한 협박, 지나치게 보수적인 문화 등의 잦은 논란을 일으켜 불참과 대리수상이 이어지며 '''그 주목도가 내려가고 있는 상이기도 하다.'''
2. 역사
3대 영화상 중에서는 역사가 제일 깊다.[3] 1958년에 문교부에서 '우수국산영화 시상식'이라는 명칭으로 설립했다. 국산영화상 시절은 대종상의 역대 수상 목록에서 제외되어 있으나 그렇다고 국산영화상 시절과 단절을 선언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제 연혁에는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이름을 대종상으로 바꾼 것은 1962년이다.
1969년과 1970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의 영화 부문으로 통합[4] 되었는데 수많은 잡음 속에 1969년은 영화 부문 수상자 없이 끝났다. 1970년에는 영화 부문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이 본상을 수상했다.[5] 1971년부터 다시 대종상으로 환원되었다.
1988년에는 영화계 내분으로 이듬해로 연기되었고, 1998년에는 IMF 외환위기로 후원사를 찾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2019년에는 시상 방식 변경으로 이듬해로 연기되면서 개최되지 못했다. 과거에는 한국 최고 권위의 영화 시상식이'''었'''다. 사실은 애초부터 공정성과는 담 쌓은 후진국형 이권다툼 행사였다는 것이 90년대 들어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만천하에 들통났다.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넘어간 것은 1992년으로 삼성이 단독 후원을 맡아 영화인협회와 공동 주최했다.
조직위원회와 영화 단체의 갈등, 영화 단체들의 파벌 싸움과 공정성 논란 속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메이저 영화상’ 중 유일하게 언론사가 아닌 ‘영화인’들이 직접 꾸리는 시상식이기 때문이다. 주기적인 위기 속에서 위와 같은 이유로 되살아나기를 반복해왔다.
남녀주연상 수상자가 다음 해 홍보대사를 맡는 전통이 있다.
2015년 남녀주연상 후보 전원 불참 사태와 2016년 부터 TV 생중계가 지상파인 KBS에서 케이블, 종편으로 바뀌며 위상이 하락했다. 당시 대종상은 흥행 대작 위주의 시상으로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대종상 이후 열리는 청룡영화상이 2년 연속 독립영화에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비교적 공정하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결정적으로 2016년 청룡이 대종상엔 불참한 뒤 청룡에 참석한 여우주연상 후보들을 제치고 유일한 불참자[6] 에게 여우주연상을 주며 화제성과 함께 국내 최고 권위의 영화상 타이틀을 거머쥐었다.[7] 2인자 포지션도 JTBC에서 중계하는 종합 시상식 백상예술대상에게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TV에 생중계 되며 ‘3대 영화상’이라 불리고 있다.[8]
2017년 제54회 대종상영화제는 ‘리부트’를 선언하며 대대적인 개편에 나섰다. 외부 심사위원 비율을 높이고 국내 시상식 최초로 심사위원 명단과 함께 심사결과를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설경구, 송강호, 이병헌 등 배우들을 비롯한 영화인들의 참석률도 높아졌다. 출품제 심사 방식 역시 폐지됐다. 제55회 대종상영화제까지 TV조선이 생중계를 맡았다.
제56회 대종상영화제부터는 1월부터 12월 개봉작을 심사하기 위해 개최 시기를 11월에서 다음 해 2월로 변경했다.[9] 2020년 2월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6월 3일로 연기됐다. 중계 방송사는 MBN으로 바뀌었다.
3. 역대 주최·주관자
- 문교부 (1958~1959)
- 문화공보부 (1961/1971~1978)
- 한국영화인총연합회 (1967~1968/1986~)
- 영화진흥공사 (1979~1986)
- 삼성그룹 (1992~1993)
- 삼성문화재단 (1994~1996)
- 쌍방울 (1997)
- 서울특별시 (2007)
- 중앙일보 (2008~2009)
- SBS (2008~2010)
- 동아일보 (2010~2012)
- 한국방송공사 (2011~2012)
4. 시상 부문
2017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 최우수작품상
- 감독상, 신인 감독상
- 남녀 주연상, 남녀 조연상, 신인 남녀상
- 기획상
- 시나리오상
- 촬영상, 조명상, 미술상, 의상상
- 편집상, 음악상
- 기술상
5. 역대 수상
5.1. 우수국산영화 시상식
5.2. 최우수 작품상 및 감독상
5.3. 남우 / 여우 주연상
5.4. 남우 / 여우 조연상
5.5. 신인 남우 / 여우상
5.6. 신인감독상[12]
5.7. 기록
- 작품상
- 최다 수상 - 광해, 왕이 된 남자[13] (15개 부문 석권)
- 감독상
- 여우주연상
- 5회 수상자
- 4회 수상자
- 3회 수상자
- 2회 수상자
6. 역대 후보
6.1. 남우주연상
6.2. 여우주연상
7. MC
- 2001년 제38회 유정현, 정지영
- 2005년 제42회 손범규, 정지영
- 2006년 제43회 유정현, 이보영
- 2007년 제44회 유정현, 김아중
- 2008년 제45회 최기환, 김아중
- 2009년 제46회 최기환, 한예슬
- 2010년 제47회 신동엽, 김정은
- 2011년 제48회 신현준, 장서희
- 2012년 제49회 신현준, 김정은
- 2013년 제50회 신현준, 하지원
- 2014년 제51회 신현준, 엄정화, 오만석
- 2015년 제52회 신현준, 한고은
- 2016년 제53회 김병찬, 공서영, 이태임
- 2017년 제54회 신현준, 스테파니 리
- 2018년 제55회 신현준, 김규리
- 2020년 제56회 이휘재, 한혜진
- 2011년부터 2016년을 제외하고 2018년까지 진행을 맡았던 신현준은 생방송 중 후보자, 작품 이름을 헷갈리는 등 어수선하고 웃기려는데에만 치중하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2015 대종상 시상식 논란 당시에는 MC, 시상, 대리수상까지 하며 '신현준의 일당백', '신현준의 고군분투'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 2016년에 전문 진행자가 진행을 맡아 시상식이 다소 안정되어 보인다는 평도 있으나 메인 진행자인 김병찬의 진행 방식이 올드하다는 평 또한 있었다.
8. 심사위원
8.1. 2017년
김홍준(심사위원장, 영화감독, 영상원 교수),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교수),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교수), 김형준(한맥문화 대표), 달시 파켓(영화평론가, 부산영화아카데미 교수), 오동진(영화평론가, 마리끌레르영화제 집행위원장), 윤성은(영화평론가),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정수완(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2017년부터 생방송으로 수상자들의 심사 결과를 공개했다.
8.2. 2018년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교수), 김영(미루픽쳐스 대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김형준(한맥문화 대표, 아시아필름어워드 국제고문), 김홍준(영화감독, 영상원 교수), 달시 파켓(영화평론가, 부산영화아카데미 교수), 전진수(제천국제음악영화제 프로그래머), 정성일(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정수완(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채수진(프로듀서, 전 영화진흥위원회 다양성소위원회 위원)
8.3. 2020년
이장호(영화감독, 한국영화 100년 추진위원장), 김영 (영화 기획제작자), 김형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운영위원), 문재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백현주 (동아방송예술대 창의융합교양학부 교수), 변성찬 (인디다큐페스티벌 집행위원장), 성승택 (촬영감독), 양경미 (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영화평론가), 전철홍 (시나리오 작가)
9. 문제점
9.1. 수상자, 수상작 논란
대부분 시상식이 수상자, 수상작에 논란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특히, 대종상은 유난히 타 영화상에 비해 훨씬 정도가 지나쳐서 그 논란들로 인해 권위가 바닥인 상태다. 과거에는 유일무이한 영화제로서 권위가 높았지만 그 와중에 비리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돈 봉투 건네 주고 상을 '구입'한다는 말도 많았었고 지금은 흐지부지되어 거론되지 않으나, 1960~1970년대 영화계 인사들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정부에서 주도하는 관제행사라서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보는 어용 영화제로도 악명이 높았다. 사회비판적 영화는 절대 금기였으며, 1970년대 후반까지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서 사회계도성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품상, 감독상 다음으로 (체제선전용) 반공영화상이 주요부문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 이후로는 반공영화상도 폐지되고 노골적인 체제홍보는 줄었지만, 사회비판 영화는 여전히 금기였다.[40]
더구나 당시에는 막대한 이권이 있었던 해외 영화 수입권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우수 작품상 수상작을 내놓은 영화사에 수여했다. 같은 권리가 그 해 최고의 반공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도 돌아갔다. 반공영화상이 주요부문이 되고 제작자들에 의해서 반공영화가 미친 듯이 찍혀 나온 이유가 있다. 이 외화수입권은 당시 돈 기준으로 억 단위로 거래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상을 타는 것은 곧 수억을 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화사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타기 위한 영화를 찍었다. 당연히 그 영화들은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아야 했고, 무엇보다 정부의 입맛에 맞아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종상만 노린 영화는 작품상을 타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었지만, 만일 못 타면 '''그대로 영화사 창고로 직행'''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 외화수입 자유화는 1984년에야 이뤄지는데, 반공영화상이 이 때 폐지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대종상은 본질적으로 최고의 영화제인 동시에 최악의 영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성이 있으나 사회 부조리를 다룬다든지 높으신 분들을 까는 내용이 있다면 설령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더라도 일절 후보에도 못 오르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10월 유신 시대에는 아예 정부 주도로 수상을 통제했고, 친정부적이고 반공적인 영화에 '우수반공 영화상'을 따로 개설해서 시상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어용 영화제 시상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문제점을 찾아본다면 엄청나게 쏟아진다. 심지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후인 1990년부터 나온 문제점들만 봐도 이렇다.
- 1990년
- 1991년
- 미군에 의하여 성폭행을 당한 여인이 되려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다가 결국 생계를 위해 양공주로 전락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미군을 깐다고 해서 작품상 후보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컸었다. 겨우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했을 뿐이었고, 이에 대하여 당시 영화지 로드쇼에서 취재하니 대종상 관계자들이 윗사람 눈치가 보이니 할 수 없다는 답변을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가 서울관객 17만을 기록하면서 흥행도 대성공하고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각본상 및 여우주연상(이혜숙)을 받고 원작인 안정효가 쓴 소설이 미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와 미군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점에 대하여 작은 화제를 낳았던 거와 대조적이다.
- 1994년
- 대종상의 권위가 본격적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부터였다. 당시 흥행스코어에서 참패한 영화 '두 여자 이야기'가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도 영화 개봉하기 전(1994년 4월 23일)에 수상(1994년 4월 3일)하여 한동안 작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막상 개봉한 이후 좋은 영화였다는 평이 많아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밑에서 언급한 '애니깽'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작품 또한 봉건주의 제도 하에서 두 여인의 굴곡진 삶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흥행성과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반드시 국내 영화 시상식 결과에 영향을 줄 필요도 없고, 그러한 전례나 후례는 많은 나라에서도 존재한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은 데뷔작 '오월의 노래'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세상에 알리지만 그 결과 한동안 영화연출 제의가 끊기기도 했었다고...한편, 함께 후보에 오른 영화는 안성기, 박중훈 콤비의 연기가 돋보였던 투캅스와 그 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등. 그러나 '화엄경'은 감독상을 받는데에 그쳤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빨갱이 영화'라고 까이기만 했다. 투캅스는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당시 서편제에 이어서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라는 엄청난 초대박을 거둬들이고[42] 화엄경은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트 바우어상을 수상하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고 서울관객 15만으로 그럭저럭 흥행도 하던 것과 달리 두 여자 이야기는 흥행도 서울관객 2만으로 참패하고 지금은 아주 듣보잡이 되었다. 그나마 감독인 이정국은 나중에 최진실 주연인 영화 편지로 서울관객 72만이라는 대박을 거두긴 했다. 하지만 2년 후, 역대급 병맛 시상식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 1996년
- 최악의 대종상 시상식 1. 1996년 제 34회 시상은 지금까지 진행된 대한민국의 영화 시상식 중에서도 넘사벽급으로 손꼽히며, 2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많은 대중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다른 말로는 영화 제목을 본떠서 애니깽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를 참조하자. 이 해 대종상 예심에서 탈락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본선에서 찬밥대접을 받은 '꽃잎'은 이후의 다른 영화상 시상식에서 주요부분을 수상했다.
- 2000년
- 연예계 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2002년, 업무상 횡령 등 혐의로 구속된 대룡엔터테인먼트 장용대 대표가 소속 여배우의 수상을 위해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포착되어 조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 그 여배우는 바로 하지원. 하지만 하지원이 2001년 대룡기획과 소송 끝에 결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마무리 되었다. 하지원이 새로 둥지를 튼 당시 소속사 측에서는 하지원의 실력으로 수상한 거라 주장하며 로비 사실을 부정했고, 하지원 전 소속사 대표도 소환되어 조사했지만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여 결국 내사 종결처리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하지원이 이런저런 이유로 법적인 문제에 얽힐 때마다 대종상 신인상 로비 건도 함께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
- 2001년
- 흥행 최고를 기록한 친구가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하나도 수상하지 못했던 반면에[43] , 관객에게 외면을 당하고 평가도 좋지 않았던 영화 "하루"에 감독상 여우주연상 포함 4개를 줬다. 특히, 여우주연상 고소영은 역대 최악의 수상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그나마 공동경비구역 JSA에 작품상을 줘서 다행이다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 2003년
- 2004년
- 2007년
- 《태풍태양》으로 이미 전년도에 신인여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조이진이 《국경의 남쪽》으로 또 한번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고 결국 수상에 성공했다. 결국 신인상도 재수가 되나?라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다만 조이진의 연기가 안 좋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단지 신인상 자격이 논란이 되었을 뿐... 오히려 영화 자체는 조이진의 커리어 하이에 해당한다.
- 2009년
- 내사랑 내곁에의 하지원이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개봉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하늘과 바다>의 장나라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논란이 되었다. 기사에서는 미개봉작이라고 하고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대종상 시작하기 전에 개봉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출품된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대종상 1주일전에 개봉하였으며 제한적 개봉이라서 미개봉작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더 빨리 개봉했다하더라도 작품성 때문에 역시 논란은 피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같은 해에 시작된 청룡영화상은 하지원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대종상에게 빅엿을 선사했다.[44] 작품상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신기전이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를 누르고 수상했다. 마더야 작품성에서 호평을 받았고 해운대는 작품성에 비판이 있을 망정 천만관객을 넘긴 영화임에도 그 둘을 모두 제치고 수상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 2011년
- 써니의 심은경이 사정상 불참의사를 전하자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제외시키면서 논란이 됐다.[45] 그 대신 영화 로맨틱 헤븐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린 후 상을 줬는데, 심은경은 '상을 받아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담담하다.'라는 글을 올렸다. 거기다가 심은경을 대신해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수상소감까지 말해야 했던 사람은 써니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천우희. 다시 말해, 경쟁자 배우가 대리수상을 한 것이었으며, 정작 천우희는 수상작인 《로맨틱 헤븐》에 출연한 것도 아니었기에 《써니》 인연만으로 대신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받은 셈이다.
- 2012년
- 2014년
- 국내외영화제에서 극찬을 받던 ‘한공주’의 천우희, 아역시절부터 쌓아온 연기력으로 흥행까지 성공한 ‘수상한 그녀’의 ‘심은경’이 여우주연상 유력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결과는 후보[47] 중 가장 낮은 가능성을 보였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손예진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후보 중 가장 흥행한 영화에 출연하여 과거 대종상에서 흥행빨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욕을 먹었던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과 비교되며 ‘대종상다운 시상’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두 배우는 원톱으로 극을 이끌어가기라도 했다. ‘해적’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여럿인 영화인데다가 극 중 손예진의 어색한 사극, 액션, 코미디 연기가 방해가 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 독립영화를 비롯한 저예산 영화를 아예 빈 손으로 내보내면서 비난을 받았다. 청룡영화상은 한공주에는 신인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도희야에게는 신인여우상을 안겨줬다.
- 2016년
- 2017년
- 신인상 부문의 후보선정 기준을 두고 꾸준한 논란이 있는데 시상 전 단 한번의 기회라고 의미를 부여하던 MC들의 멘트와 달리 바로 전년도에 후보에 올랐던 배우들이 또 후보에 오르고, 2015년 후보 중 한명인 박서준이 수상까지 했다.
9.2. 운영상 문제
- 1998년 - 스폰서 부재로 인한 일시폐지
1962년 출범된 대종상은 그동안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총연합회, 영화진흥공사, 映協 등으로 주관단체가 바뀌어 오다가 1992년부터 정부 지원이 중단되었다. 이후 삼성문화재단의 협찬으로 운영이 되어 왔는데 상기에 서술한 1996년 애니깽 사태로 인하여 삼성문화재단이 협찬을 취소해 버리게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쌍방울이 후원에 나서면서 1997년 제35회 시상식은 쌍방울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서 열렸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로 쌍방울이 부도가 나면서 대종상은 다시 후원사를 잃었고, 결국 다른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1998년 시상식은 무산되었다.
- 2002년
당해에는 TV로 생중계되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되었다. 2002년 5월 26일에 개최되었는데, 이날 지상파 3사 모두 2002 월드컵 한국-프랑스 평가전을 생중계했기 때문. MC는 MBC 출발비디오여행의 진행자 아나운서 홍은철이 진행했는데 진행은 훌륭했으나 영화인협회가 단독 주최한 이번 대종상 시상식에선 불참자가 많아 시상식 대부분이 대리수상으로 진행됐다.[48]
- 2010년 - 초대 가수 선정의 병폐
2010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 참조.
- 2013년 - 야구에 밀린 50주년 기념 대종상
50주년 대종상 시상식은 2013년 한국시리즈 7차전 중계 때문에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으로 방영되었고 그 영향으로 1부가 7.0%, 2부가 6.2% 평균 시청률은 6.6%을 기록하여 49회 시상식 평균 시청률 7.3% 보다 0.6% 감소했다. 관련기사 KBO 리그 포스트시즌은 KBS2, MBC, SBS 등 지상파에서 한 경기씩을 번갈아 가며 중계하는데,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갈 시 7차전을 KBS 2TV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확정이 된 상황이라 그 중계를 취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KBS 측에서는 대종상 주최측에 "행사일 변경이 가능하다"는 사전 고지를 했는데 대종상 측에서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갈 줄 몰랐다"고 변명한 사실이 드러났다.
작품상과 기획상 후보 명단이 미발표되었다.[49]
- 2015년
돈으로 인한 최악의 대종상 시상식 2. 애니깽 사태 이후 역대 최악의 대종상 영화제. 자세한 내용은 2015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를 참조하자.
2015년에는 아예 인기상 투표에서 투표권을 유료로 팔기까지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창조경제 투표법 인기투표에는 투표 한 표당 200포인트가 차감되는데 포인트를 얻으려면 강제로 각종 어플을 깔던지, 돈으로 포인트를 사야 한다.
2015년에는 아예 인기상 투표에서 투표권을 유료로 팔기까지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창조경제 투표법 인기투표에는 투표 한 표당 200포인트가 차감되는데 포인트를 얻으려면 강제로 각종 어플을 깔던지, 돈으로 포인트를 사야 한다.
- 2016년
기존 중계 방송사이던 KBS[50] 가 생중계를 포기함으로써 대종상 시상식은 중단될 것으로 보였으나,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서 생중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이 기사가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채널A 측에서 "(중계가) 확정된 건 없지만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며 또다시 난항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16년 12월 27일 iHQ 계열의 케이블채널(!) K STAR와 코미디TV에서 동시 생중계되었다.[51]
시상식을 2주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우여곡절 끝에 개최를 선언했는데, 시작전부터 여러모로 삐걱댔다. 장소대관도 여의치 않아 결국 세종대 컨벤션센터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추락한 대종상의 권위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시상식의 진행은 김병찬, 공서영, 이태임이 맡았다. 강행한 생중계도 혼란의 연속이었다. 현장을 찾은 팬들의 개인적인 대화가 방송에 계속 노출되는가 하면, 카메라는 잡을 곳을 못찾아 우왕좌왕하다 풀샷으로 넘어가기 일쑤였고, 행사장 내부 역시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작년에 문제가 되었던 후보자 참석 문제도 고스란히 답습되었다. 당연히 2주도 남지않은 일정에 제대로 참석할 수 있는 영화배우도 없는 듯.# 시상식 하루전에는 아직 결정 하지 않은 이병헌과 손예진을 제외한 나머지 주연 후보자들이 불참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당일에 손예진도 불참하기로 결정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곡성'의 김환희와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내부자들'의 이병헌을 제외한 신인남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모든 수상자가 불참하게 되었다. 그밖의 대부분의 기술상 수상자들도 불참하여 시상식은 대리수상자들의 향연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참석한 스타급 배우인 이병헌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뼈 있는 수상소감을 남겼다.
> 대종상을 처음 받았던 게 아마도 20년 전 신인상이 아니었나 싶다.[52]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꼭 그 무대 위에 서고 싶을 정도로 명예로운 시상식이었기 때문에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참여했었다. 오늘 시상식에 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상을 받는다는 기쁜 마음보다 무거운 심정이었다. 대종상은 그동안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다. 여전히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느낌이 있는 건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53년이란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이전처럼 명예를 되찾는 건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을 거라 본다. 하지만 53년이란 긴 시간 명맥을 유지하고 명예로웠던 시상식이 불명예스럽게 이대로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어떤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변화라는 건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된다기보다는 모두가 한마음이 돼서 조금씩 고민하고 노력하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언젠가 후배들이 내가 20년 전 이 시상식에 오면서 설레고 영광스러웠던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나도 그땐 태어나지 않아서 모르지만 50~60년 전 대선배들이 큰 뜻을 갖고 대종상영화제를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후배들이 더 고민하고 노력해서 지켜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2017년
TV조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 중 참석자인 최희서와 이준익을 비하하는 발언과 선미의 축하 공연 중 스태프로 추정되는 사람이 ‘커트’를 외치는 목소리가 동시에 방송됐다. 신인여우상 수상자인 최희서의 소감이 길어지자 "그만 좀 해라, 돌겠다."라는 발언이, 이준익 감독을 비춘 장면에선 "저 빡빡이 아니냐?"라는 발언이 나왔다. 중계 방송사인 TV조선에서는 유튜브의 대종상 시상식 영상을 삭제한 상태라서 검증이 힘든 상황이었으나 해당부분만 편집된 영상이 일반 유저에 의해 업로드되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직접 확인해보자. 이에 대해 TV조선 측은 "해당 목소리가 관객인지 스태프인지 알 수 없다" "방송사고는 아니고 유튜브 클립영상은 수정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오디오 채널이 달라 TV 생중계에서는 해당 음성이 전파를 타지는 않았다.
- 2018년
올해도 역시 대리수상의 향연이 벌어졌다. 영화사 또는 동료 배우의 대리수상이 아닌 조직위 측이 임의적으로 지정한 제3자가 대리수상하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특히 논란이 됐던 부분은 음악상이다. 남한산성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수상하게 되었는데, 사카모토 류이치의 불참으로 남한산성 스탭 중의 한명이 대리수상을 위해 나오던 찰나 가수 한사랑씨가 먼저 무대에 올라 당황하며 돌아서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대종상 조직위원회 측은 한사랑씨가 공식 대리수상자였다고 해명했다. 한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상은 돌려줬다고 하며 "대종상을 주최한 한국영화인총연합회의 한 간부가 어느날 전화가 오더니 ‘대종상 시상식이 있는데, 대리수상을 해줄 수 있느냐’고 하길래, 갑작스러웠지만 ‘알겠다’고 말씀드렸다."며 대리 수상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 관계자 측에 대리수상자 관련 내용을 확실히 전달하지 못하여 대리 수상자 두 명이 무대에 올라오도록 한 운영 상의 미흡은 덮을 길이 없으며, 또한 공식 대리수상자 선정 면에서도 영화와 상관없는 제3자가 상을 받도록 했다는 점 역시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조명상을 수상한 남한산성의 조규영 감독 역시 한 남성이 대리수상을 했는데 시상식 이후 트로피가 사라져 행방을 찾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뒤 조명상을 대리 수상한 사람은 정성면 조명협회 수석 부이사장임이 뒤늦게 드러났다. 정 부이사장은 "사라진 게 아니라 조명협회에 보관 중이며 대리 수상을 영화인연합회에서 요청이 와서 했다. 트로피는 조명협회에 갖다 놨으니 본인이 찾아가면 된다"고 제작사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라졌다는 기사가 나와서 황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9.3. 왜 이렇게 논란이 많은가?
아래 링크된 기사들을 읽어보면, 오늘날의 대종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개판으로 전락했는지 알 수 있다.
- 또다시 떠오른 '대종상 괴담', 무엇이 문제인가?
- '좌파척결' 외치던 보수영화인들, '돈 때문에' 내분
- 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거 놓고 삼각다툼
- 보수 온상 영화감독협회, 세대교체 이뤄지나
- 대종상 운영 놓고 서로 으르렁, 영화인협회 내분 심화될 듯
- 원로영화인들 싸움에 '대종상' 등 터진다
- 대종상 의혹에 격화되는 원로영화인들 갈등
- 이규태 방산 비리, 대종상에 불똥...영화계 옥신각신
- 시끌시끌한 영화인협회, 반세기 넘은 대종상의 현 주소 '씁쓸'
- '출석상 논란' 대종상 코앞... 과연 누가 출석할까
- 배우 문성근이 말하는 대종상이 파탄난 이유(45분부터 시청)
10. 여담
- 1999년 제36회 시상식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보내 "영화는 21세기 무한한 세계문화시장을 이끌어갈 전략상품의 핵심이 되고 있다"며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영웅이며 신지식인"이라고 영화인들을 격려했다.
- 2013년 제50회 대종상에 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작이 출품되지 않았다는 서술이 있었고 해당 나무위키 내용이 담긴 기사까지 났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출품은 배급사가 아닌 제작사에서 담당해 배급사와는 무관하며, 당시 롯데 배급작으로는 간첩, 연애의 온도, 더 테러 라이브 등이 출품됐다. 이 중 더 테러 라이브는 이후 상영 자료를 보내지 않아 예심에 오르지 못했다.# 소원, 친구 2는 심사 기간, 시상식 이후 개봉작이며 2014년 51회 대종상 후보에 올랐다.
- 2017년 제54회 시상식에서 박열의 최희서가 대종상 역사상 최초로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하였다. 신인상 후보가 주연상 후보에 오른 경우는 여러번 있었지만 수상까지 이어진 경우는 처음이다. 이전과 달리 주최측인 한국영화인총연합회와 전혀 무관한 영화계 인물들로 심사단을 구성했고, 심사위원들의 투표과정과 결과를 공개하였기에 가능한 시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여우주연상 후보 중 최희서만 참석했으나, 다른 부문 수상자 중 불참자는 사전에 촬영해둔 수상소감 영상을 방송하였으므로 불참했다고 주최측이 심사위원단의 결과를 번복하여 수상자를 바꿨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볼 수 있다.
- 2020년 시상식부터 인기상이 폐지됐다.
11. 관련 문서
11.1. 연도별 논란
11.2. 기타 관련 문서
[1] 1962년(1회)~1976년(15회)까지는 신인배우상과 통합하여 시상하였고, 1982년(21회) 및 1983년(22회)는 '특별상 신인부문(감독)'으로 시상되었다.[2] 영화제가 아닌 영화 시상식이 맞지만 법인 측에서 굳이 '대종상 영화제'라는 명칭을 고집한다. 물론 시상식의 전야제 개념으로 후보작과 역대 수상작들을 상영하는 영화제를 열기도 하지만, 인지도가 현저히 낮고 꾸준히 열리지도 않는다. 그에 비해 청룡영화상은 정식 명칭이 청룡영화'상'이지만 사람들은 대개 청룡'영화제'라고 주로 부른다.[3] 가장 오래된 영화상은 1958년 시작된 부일영화상이다. 단, 대종상 역사에 국산영화상 시절을 포함한다면 대종상도 부일영화상과 함께 가장 오래된 영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4] 대종상, 무궁화상, 방송문화상, 출판상, 3·1연극상, 문예상, 신인예술상, 국악상 등 8개 시상 제도와 6개 경연대회 등의 시상 제도를 단일화하여 본상 10개 부문으로 통합하였다.[5] 일부 자료에는 최금동이 1970년 제9회 대종상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것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엄밀하게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의 영화 부문 본상이다. 영화 부분 본상은 작품상, 감독상, 연기상 등으로 각각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해 1인에게 주었다.[6] 영화 아가씨의 김민희.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으로 연기 호평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감독과의 불륜으로 국내 각종 협회 시상식에 불참, 대중들의 비난 여론으로 1개의 여우주연상에 그쳤었다. 대종상에는 아예 작품을 출품하지 않아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7] 2019년 기준 지상파에서 중계되는 유일한 영화 시상식.[8] 2010년 초반까지는 MBC가 주최한 ‘대한민국 영화대상’이 SBS에서 중계했던 대종상, KBS에서 중계를 맡은 청룡과 함께 ‘3대 영화상’으로 불렸다.[9] 제56회 대종상 영화제는 2018년 9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1년 4개월간 개봉한 영화들이 후보에 올랐다.[10] 작품상 수상작 없음. # #[11] 신인연기상과 신인감독상 통합. 1962년(1회)와 1974년(13회)는 신인감독이 수상함.[12] 1962년(1회)~1976년(15회)까지는 신인배우상과 통합하여 시상하였고, 1982년(21회) 및 1983년(22회)는 '특별상 신인부문(감독)'으로 시상되었다.[13]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조명상, 음악상, 의상상, 미술상, 기획상, 영상기술상, 음향기술상, 인기상[14] 1979년 족보, 1981년 만다라, 1986년 티켓, 1987년 연산일기, 1993년 서편제[15] 최초 2연속 수상[16] 2003년 살인의 추억, 2007년 괴물, 2009년 마더, 2013년 설국열차, 2020년 기생충[17] 2006년 왕의 남자, 2008년 즐거운 인생, 2014년 소원, 2015년 사도, 2017년 박열[18] 1982년 철인들, 1983년 안개마을, 1985년 깊고 푸른 밤, 1994년 투캅스, 2007년 라디오스타[19]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3년 살인의 추억, 2007년 괴물, 2008년 밀양, 2010년 의형제, 2013년 관상, 2014년 변호인, 2016년 밀정, 2017년 택시운전사,2020년 기생충[20] 1962년 상록수, 19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6년[21] 1991년 분례기, 1994년 만무방, 2011년 시[22] 1974년 토지, 1975년 육체의 약속, 1985년 길소뜸[23] 1987년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 1990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24] 3연속 수상, 1988년도에 대종상 영화상이 개최되지 않았다.[25] 1993년 결혼 이야기,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 물고기[26] 1999년 약속, 2000년 내 마음에 풍금, 2001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2004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2005년 인어공주, 2006년 너는 내운명, 2008년 밀양, 2010년 하녀, 2014년 집으로 가는 길, 2020년 생일[27]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 1983년 불의 딸, 1990년 수탉, 2010년 시[28] 2006년 왕의 남자, 2010년 이끼, 2011년 부당거래, 2014년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5년 베테랑[29] 2010년 방자전, 2013년 7번방의 선물, 2015년 국제시장, 암살, 2016년 터널[30] 1963년 새댁, 1968년 갯마을, 1968년 엄마의 일기[31] 2008년 무방비도시, 2012년 도둑들, 2015년 사도[32] 2008년 무방비도시, 2009년 박쥐, 2012년 도둑들, 2015년 사도, 2017년 재심[33] 1997년 초록물고기, 2000년 박하사탕, 2010년 시[34] 2000년 유령, 2003년 살인의 추억, 2013년 설국열차, 2020년 기생충[35] 1971년 화녀, 1974년 국회 푸락치, 1978년 과부, 1982년 만추, 1983년 안개마을, 1991년 젊은날의 초상, 1993년 서편제[36] 1971년 화녀, 1974년 국회 푸락치, 1978년 과부, 1982년 만추, 1983년 안개마을, 1991년 젊은날의 초상, 1993년 서편제, 1996년 본 투 킬, 1997년 아버지, 2000년 춘향던, 2001년 침향[37] 1978년 망명의 늪, 1981년 만다라, 1983년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91년 젊은 날의 초상, 1992년 개벽, [38]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비트, 1999년 태양은 없다, 2001년 인터뷰, 2002년 무사, 2003년 살인의 추억, 2005년 역도산, 2007년 괴물[39] 1996년 테레리스트, 1997년 접속, 피아노맨, 1998년 정사,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5년 얼굴없는 미녀, 2008년 황진이, 2009년 신기전, [40] 당시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영화를 독재정권의 3S정책의 도구라고 비판하였다.[41] 1973년까지 시행되다가 1974년에 영화계의 질적 하락을 이유로 잠정 폐지된 후 이때 부활했다.[42] 다만 투캅스의 경우는 해당 항목에도 있지만 표절 시비가 꽤 강하게 일었었다는 것은 고려하자.[43] 조선일보는 이 때 문화면 1면 톱으로 JSA가 대종상을 수상했다는 얘기 대신 "친구, 대종상 전 부문 탈락"이라고 유일하게 카피를 뽑았다. 조선일보를 정치성향상 싫어하건 좋아하건 간에 조선일보의 헤드 선점능력 얘기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다.[44] 하지만 이것도 청룡영화상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2009년 청룡영화상에서 하지원이랑 같이 후보에 오른 배우들이 마더의 김혜자랑 박쥐의 김옥빈이었다. 두 배우들 모두 각자의 영화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고 적지 않은 영화 팬들이 당시에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김혜자나 김옥빈을 예측하고 있었기에 하지원의 수상도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하지원도 영화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논란은 덜한 편.[45]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학업에 전념하려고 불참했다.[46] 당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류승룡은 "광해로 상을 받았지만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수상 소감을 말하겠다."라면서 연출가 민규동 감독을 비롯해서 함께 출연한 배우 임수정과 이선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원래 해당 작품으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으면 이런 관례를 깨고 수상소감을 말했을까?#[47] 심은경, 천우희, 전도연, 엄지원, 손예진.[48] 전년도 파동의 여파도 있고, TV로 생중계도 안 되는 상황이니 굳이 참석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49] 후보가 미발표되었다는것은 본선 진출작이 전부 후보인 셈이다.[50] 90년대까지만 해도 MBC와 SBS에서도 생중계를 해줬다.[51] 청룡영화상은 SBS에서, 백상예술대상은 JTBC에서 생중계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대종상의 위상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실.[52] 실제로 이병헌은 1996년 제34회 대종상 남자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 중, 닥터봉의 한석규와 함께 수상이 유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