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1919)

 

''' 김기영 감독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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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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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 제7회
(1970년) '''

''' 제8회
(1971년) '''

''' 제9회
(1972년) '''
최하원
(독짓는 늙은이)

'''김기영
(화녀)'''

김효천
(소장수)

''' 영화부문 감독상'''
신상옥
(1972)

'''김기영
(1973)'''

이원세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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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영화 스타일
4. 이야깃거리
4.1. 기묘한 죽음
5. 작품
6. 참고 자료


1. 개요


[image][image][1]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by 김기영'''

그가 평생동안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 분은 정말 기인이셨어요. by 윤여정'''

金綺泳
1919.10.01[2] ~ 1998.02.05
한국의 영화감독. 이비인후과 의사 출신이며 부인도 치과 의사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대학 연극부에서 연극을 연출하였다.

2. 생애


1919년 서울 교동에서 태어났지만 소학교 다닐 때 평양으로 이사를 하면서 평양에서 자라온 그에게 평양은 제2의 고향이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교토대학 의학부에 다녔다. 광복 후 서울로 돌아와 서울대 의과대학에 들어가 1950년 졸업했다. 연극부에서 연출을 맡던 중 평양에서 헨리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공연은 기성 연극 수준을 뛰어넘는 가작이라는 극찬을 들었고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연극이나 영화의 검열을 담당하는 관계자로부터 모스크바 유학 제의를 받기까지 했었는데, 거절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이때 부인과 결혼하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부인 김유봉 여사도 치과 의사였는데, 대학 시절 연극부 활동을 같이 했었다고 한다. 김유봉 여사는 1950년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3]를 졸업했다.
이후 주한미국공보원에 스카우트 되어 <나는 트럭이다>, <수병의 일기> 등의 문화영화, 홍보영화를 만들다가 미 공보원의 지원으로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를 1955년에 완성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 필름이 그러듯이 초창기 영화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필름이 남아있는 첫 상업영화 <양산도>는 필름의 훼손이 심해 결말부 부분이 아예 사라져 버렸고, 데뷔작인 <죽엄의 상자> 같은 경우 그 필름이 뒤늦게 발견되었지만,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이 아예 소실 되었다.
당대의 흥행 감독이자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성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대표적인 감독이었지만 점점 대중들에게 외면 받아, 1990년대 초반 쯤에는 거의 잊혔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류승완 등의 후배 감독들과 여러 신진 영화 평론가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고 연구한 덕에 덕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김기영은 하녀의 새로운 리메이크작인 악녀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집안에서의 화재로 부부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부부가 사망했을 때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고 한다.
2018년 11월 CGV 아트하우스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 헌정관이 설립되었다. 임권택, 안성기, 박찬욱에 이어 네 번째이며, 타계한 인물 중에서는 첫 번째다.

3. 영화 스타일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남성미를 강조하던 당시 시대상과는 사뭇 다른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며,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부인에게 의지하는 남성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강인하고 노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며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여성들이 계급적 욕망을 위해 집안의 본처와 충돌하며, 본처는 중산층의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동계층의 여성과 대립하는 내용이 '하녀 시리즈'의 기본 구조다. '이어도'에서도 남성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며,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까지 여성들이 모두 결정한다.
하녀 시리즈부터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쥐, 계단, 담배, 독약 등이 주요하게 쓰이는데 특히 쥐가 자주 등장한다. 김기영의 광팬인 봉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치콕에게 새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고(...) 참고로 영화 촬영 중에 윤여정, 이은심 같은 여배우들이 직접 쥐를 잡고, 때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쥐에 맞기까지 한다. 이 경험 때문에 화녀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당시 "촬영만 끝나봐라, 이 감독 내가 다신 말이나 거나 봐라" 하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물론 그래놓고 윤여정은 다음작 충녀에 또 출연했다.(...)
김기영의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묘한 에로티시즘이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괴하다. 충녀에서의 알사탕 위에서의 정사씬도 그렇고. 충녀가 시체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현지 관객들도 하수도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한다. '이어도'에서의 시체와의 섹스신도 그랬다. 이게 국내 방영 및 극장 개봉당시 잘려나갔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일본 NHK-bs 2 방영 당시 이 장면이 그대로 실리면서 이 버전을 녹화한 것이 고가로 팔리기까지 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서는 심지어 '뻥튀기 과자' 위에서의 정사씬까지 등장한다.
김기영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하녀 시리즈의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를 붙잡은 여자의 머리가 계단 층계 하나하나에 부딪히는 장면.''' 특이한 것은 이런 기괴한 장면을 스스로 찍으면서도 그걸 싫어했다는 것이다.
영화에 그때의 시대 상황과 현실을 집어넣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십대들의 반항이라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당시의 트렌드를 알 수 있다.[4] 놀라운 점은 그런 트렌드를 단순히 따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트렌드를 자신의 영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완전히 자기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하녀 시리즈로 유명한데, 본인도 하녀 시리즈에 애착이 있어서 꾸준히 리메이크해왔다.

4. 이야깃거리


중학교 때 쓴 시가 일본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틈틈이 그린 그림이 공모전에서 1등으로 뽑히기도 하는 등 글과 그림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 교사로부터 “김 군은 재주가 너무 많아. 그걸 모두 할 수 있는 직업은 소학교 선생밖에 없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이은심, 이화시, 윤여정 같은 배우들을 봐도 알겠지만, 김기영 감독은 전형적인 미인 여배우보단 좀 특이하고 퇴폐적인 느낌의 여배우를 선호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윤여정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윤여정에 대해 자기의 말을 알아들은 유일한 배우라 평했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도 크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후에도 그녀에게 '내 작품에 출연해달라는 건 아니고, 미스 윤이 살던 집값이 내렸으니 한국에 한 번 와봐요.'(...)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윤여정은 자신과 끈질기게 대화하며 영화 속 자신의 캐릭터 형성을 위해 연구하는 등 그의 열의가 당시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늘 존댓말을 사용했던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라고. 김기영이 거의 3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데다, 당시에는 배우들을 함부로 대하는 감독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이는 굉장히 특이한 점이다.
시나리오도 자기가 직접 썼는데, 특유의 문어체 대사는 매우 독특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려서부터 워낙 다재다능했고, 워낙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였기에 조명부터 디자인까지 본인이 직접 손대야 직성이 풀리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하녀 같은 경우는 본인 손이 안 닿은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조명과 카메라,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이해가 매우 뛰어났으며 카메라 배치도 본인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영화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집과 인테리어가 하나의 배우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정도로 소품 하나하나가 공들여진 모습(특히 시계, 벽지, 스테인드글라스)은 박찬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박찬욱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인 벽지에 대한 강한 집착도 사실 이 양반이 원조다. 박찬욱이 김기영 영화 중 제일 좋아한다는 화녀 82와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를 보면 그가 김기영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박찬욱 본인도 박쥐, 스토커 같은 작품들의 예시를 들며 자신이 무의식중에 김기영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하녀 블루레이 해설에서 밝힌 바 있다.
워낙 역량도 뛰어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배우, 스텝들이 잘 따랐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나 형식,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난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들을 젊은 시절부터 싫어했다'라고 말한 적도 있고, 부산 영화제에서 30년대 이후 발달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냐는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질문에 '난 그런 거 잘 모른다. 난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들이 싫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영화에 그대로 옮긴 것뿐임을 강조했다.[5]
전쟁 시절에 미 공보원에서 혼자 영화를 습작하며 감독이 된 사람이라 많은 해프닝이 존재한다. 조명 기술자, 장비가 없어 거울 등으로 조명을 내거나 사진 기술자가 하는 걸 보고 그대로 영화에 적용하는 등 직접 부딪히고 연구하며 영화를 익혔다. 당시 미 공보원은 첨단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난 미국 유학 공짜로 다녀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감독들 중에선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 임상수 감독 등이 김기영의 열혈 팬이다. 특히 봉준호는 71년작 '화녀'의 대사를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 한국영상원에서 나온 하녀 복원판 DVD 코멘터리도 녹음했다. 심지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에서도 김기영에 대한 존경을 따로 표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경외감은 봉준호의 영화에도 상당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봉준호는 황금종려상 수상후 김기영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그의 영화들 하녀, 충녀, 바보사냥 등에서 그의 칸 그랑프리 영화 기생충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인 블루레이(Blu-Ray) 브랜드 '''크라이테리언'''과의 인터뷰에서는 '''하녀'''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마틴 스콜세지도 하녀를 보고 호평을 하면서 필름 복원 작업에 투자하기도 했으며 외국 컬트팬들에게도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미국에서 이걸 보고자 찾아온 어느 백인 관객은 1960년에 이런 영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감탄한 적도 있다. 김기영 컬렉션 소개 포스트. 김기영에 대해 굉장히 잘 소개되어 있다.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무려 '''5살'''때부터 영화관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때로는 몰래 들어가서 영화를 즐겼었다고 한다. 이 시절 수많은 무성 영화들을 탐닉했다. 말년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일본에 가서 먼저 보고 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적도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거의 모든 국내 개봉작과 국내외 비디오를 꾸준히 섭렵하고 지냈다고.
생전에 남긴 글에 의하면 일본에 있던 시절, 당시 일본엔 외국영화만을 틀어주는 극장이 있었다. 1960년대 일본은 이미 인디 영화 조류인 ATG를 비롯해 미니시어터 같은 예술영화 시장이 활성화된 상태였다. 심지어 장 뤽 고다르 영화가 거의 동시기에 소개되었을 정도. 그 시절 시네필들이 대게 그렇듯 영화관에서 거의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 시절 르네 클레르 같은 감독들의 영화를 많이 봤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최신 음악 트렌트에도 밝았다. 영화음악 감독 한재권이 90년대 초 즈음 영화 음악 작업과 관련해서 김기영 감독을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만나기 전에는 '그 노인네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하나' 하면서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김기영을 만나서는 한 시간 동안 같이 힙합 음악 이야기만 하다가 왔던 일화가 있었을 정도(...)
프로필에 대해 인터넷 등에서 치과대학으로 잘못 수록된 정보가 많다. 그 이유는 그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1950년 같은 해에 그의 부인인 김유봉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데다가 하필 치과대학에 동명이인인 다른 김기영(金基永, 한자가 다르다)도 같이 졸업을 하게 되어 엮이면서 이력이 섞였기 때문이다.
생전에 모르는 영화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생전에도 새로 나온 영화들은 극장에 걸리자마자 모두 보곤 했었다고 한다. 무슨 무슨 영화 보셨냐고 물어보면 그 영화에 대한 세부적인 것, 느낀 점, 분석 등을 줄줄이 쏟아냈다고.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뺨칠 수준. 생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가 없으면 난 죽는다. 영화는 내 모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다. 때문에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영화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류승완 감독은 '그런 기괴한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충녀나 하녀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다니 그때 한국 관객들 수준이 지금보다 더 높았던 건지...'하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때는 TV나 라디오가 귀한 시절이어서 영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사인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인을 해주기 전에 영화를 보았냐고 물어본 후, 봤다는 대답이 돌아와야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촬영장에 콘티를 직접 그려서 오기는 했는데, 다른 스태프들이 못 보게 조그마한 종이에 그려와서 혼자만 봤다고 한다(...)
히치콕을 좋아하여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화>를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히치콕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는 하스미 시게히코로 김기영도 하스미 시게히코 번역본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이나 영화는 직접 일본의 잡지,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었었다고 한다. 김기영보다 훨씬 어린 최인훈 세대만 해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한 세대다. 김기영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오우삼의 브로큰 애로우가 흥행에 성공한 원인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흥미롭다.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그건 말이야, 주인공이 아무리 쌍권총을 들고 설쳐대도 나쁜 놈들이 쏘는 총은 하나도 안 맞잖아. 그건 게임 같은 거거든.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게임을 좋아한다. 그 영화는 게임처럼 찍었어. 그래서 손님이 드는 거야. 쉿,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 비밀이니까. 우하하핫...! #

기인이라는 별명답게 제작진을 따돌리고 혼자 고기를 구워 먹었다거나 집값이 싸다고 폐가를 구입해 살았다거나, 하녀 시리즈에 나온 쥐들이 실은 그가 직접 키운 쥐들이었다거나 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아주 수두룩하다.
목소리가 상당히 굵고, 말투가 어눌하다. 웃음소리도 매우 특이했던 듯하다. 톤이 높고 쩌렁쩌렁하지만, 아이들이 킥킥대는 것처럼 때로는 순진하게도 들리는 웃음소리였다고.
의외로 상당히 유쾌하시다. 젊은 영화 학도들과의 대담에서 과거 재밌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도.
생전에 컬트 감독으로 재조명받으면서 촬영된 다큐(감독의 인터뷰도 들어있다.)가 하나 있는데, 그의 가치관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KMDB VOD로 감상할 수 있다.

4.1. 기묘한 죽음


김기영 감독의 아들 김동원 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영 감독의 죽음에 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영화처럼 기묘한 죽음과 또다른 유작들
누가 봐도 기묘한 죽음이었다. 김기영 감독 부부는 1998년 2월 5일 새벽, 명륜동 집 화재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까지 미공개 작품이었던 그의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부부가 화재로 죽는 것이었다. ‘그로테스크’, ‘괴짜’. 1960년대 신문에 실린 영화 인상평부터 김 감독을 따라다니던 말이었다. 그가 전에 기거하던 주자동 양옥집은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서 싸게 구입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들 동원씨는 “처음에 살던 집에 살던 젊은이가 철조망에 목이 걸려 죽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앞서 인용한 <전설의 낙인>에 따르면 대학로의 집은 이미 두 차례나 노부부가 죽었는데, 대들보가 무너지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날 한시에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새벽 2시에 달려갔다. 잿더미가 내 키보다 높게 쌓였다.” 아들 동원씨는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기이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다 타서 잿더미가 되었는데 비닐에 싸인 문서가 발견되었다.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유서였다. “너무 놀랐다. 유서 첫 마디는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는 책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것이다.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집 마당을 내려다 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동원씨)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 감독이 묘사하고 있는 모습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단독]고 김기영 감독 유작 시나리오 ‘생존자’ 찾았다

5. 작품


김기영은 총 32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이 문서에 소개된 영화는 김기영 연출작의 극히 일부분이다.
  • 나는 트럭이다 : 1953년작. 트럭의 '1인칭 시점'으로 독특하게 진행되는 영화이다.
  • 죽엄의 상자 : 1955년작. 김기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양산도: 1955년작. 당시 상당히 흥행하여 극장이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2번째 장편 연출작.
  • 하녀 : 1960년작.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주연은 김진규, 주증녀, 이은심이지만 현대인들은 조연으로 나온 안성기(아역)나 엄앵란을 더 잘 알 것이다. 감독이 애착을 가져서 1970년대에는 <화녀>로도 리메이크했고, 1980년대에는 <화녀82>로도 리메이크했다. 90년대에는 악녀로 리메이크하려 했으나 결국 감독의 사망으로 불발되었다. 원래는 20분이 잘려나갔으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충녀> 같은 경우는 <하녀>와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하녀의 변주 영화에 가깝다. <육식동물>은 <충녀>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 고려장 : 1963년작. 나이 칠십이 되면 산봉우리에 올라가 죽는 관습이 있는 산악 마을에 하나 남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여인(주증녀)이 시집을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영화의 도입부에 현대 사회의 인구 증가 문제를 다루는 심각한 분위기의 토론회 장면이 등장하는데, 갑자기 아무 설명 없이 한자로 적힌 영화 타이틀과 사극톤의 본편으로 연결되는 기묘한 편집으로 유명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4K 화질로 복원되었다. 영화 필름의 일부가 유실된 상태인데, 복원판에서는 유실된 해당 부분에서 시나리오 내용을 화면상에 띄웠다.
  • 아스팔트 : 1964년작. 이건 필름이 소실되어서 줄거리만 남아있다. 형사 김진규는 밀수범 장동휘의 아내를 검거 도중 살해하고, 승진하지만 장동휘는 여장을 하고, 다리를 끌면서까지 김진규의 아내를 미행하는데... #
  • 화녀 : 1971년작. 11년 만에 하녀를 리메이크 했다. 배우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 육체의 약속 : 1975년작.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작. 물론 원작과는 괴리가 커서, 그야말로 김기영 영화라 할 수밖에 없다.
  • 이어도 : 1977년작. 이청준 작가의 소설 '이어도'를 영화화한 작품이지만, 별개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소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천남석'이라는 남자의 미스테리한 실종과 죽음을 추적하면서, '파랑도'라는 섬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오묘한 심리, 섹슈얼리티, 독특한 모계 사회적 구조와 샤머니즘적 코드를 다룬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드물게, 환경오염과 공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비판하는 사회 참여적 코드가 등장한다.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 1979년작. 김자옥 주연의 옴니버스 괴기영화(라고 밖에 말할 길이 없다). 남자 주인공이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리는 에피소드들을 엮었다.
  • 반금련 : 1981년작. 중국의 소설 금병매를 원작으로한 작품. 당시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검열로 거의 영화가 난도질된 상태로 개봉했고, 이 때문에 더욱 기괴한 영화가 되었다. 김기영 특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천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
  • 화녀 '82 : 1982년작. 화녀를 11년만에 리메이크 했다.

6. 참고 자료


  1. 95.03.01-박찬욱-김기영 감독 이야기
  2. 하녀들 봉기하다 / 영화 감독 김기영. 이효인. 하늘아래. 2002
  3. 근대성의 유령들 판타스틱 한국영화 . 김소영. 씨앗을 뿌리는 사람. 1999
  4. ~ 블로거 홍준호 X 영화평론가 사토 타다오 인터뷰 Pt.2 중 김기영 관련 대목
  5. 김기영 감독이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의 '털어놓고 하는 말' 코너에 직접 쓴 자기 인생 이야기


[1]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1997)에서. 왼쪽의 김동호 위원장이 훨씬 나이 들어보인다. 당시 김기영 감독 79세, 김동호 위원장 61세...[2] 1922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다.[3] '전문부'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서울치대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학제 차이 때문에 임시로 설치한 과정으로, 남은 재학생들이 모두 졸업하자 폐지했다. 전문부 및 전문학교는 구제중학교와 동급이라 소학교(보통학교) 졸업자가 진학하는 곳이었다.[4] 70년대, 호스티스물이 유행하자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은 화녀, 충녀와 청춘물이 유행하자 그런 코드를 집어넣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대표적.[5] 다만 평자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준 감독으로 루이스 부뉘엘이 언급되곤 한다. 실제로 부뉘엘의 작풍은 김기영의 그것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