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영화 감독)

 

''' 이만희 감독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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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
[image]
'''감독상'''


''' 제1회
(1963년) '''

''' 제2회
(1964년) '''
[4]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유현목
(잉여인간)

''' 제3회
(1965년) '''

''' 제4회
(1966년) '''

''' 제5회
(1967년) '''
김수용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이만희
(시장)'''

김수용
(사격장의 아이들)


'''역대'''
[image]
'''감독상'''
''' 제2회
(1963년) '''

''' 제3회
(1964년) '''

''' 제4회
(1965년) '''
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신상옥
(벙어리 삼룡)

''' 제13회
(1974년) '''

''' 제14회
(1975년) '''

''' 제15회
(1976년) '''
김수용
(토지)

'''이만희
(삼포 가는 길)'''

설태호
(원산공작)


''' 영화부문 감독상'''
김수용
(1966)

'''이만희
(1967, 1968)'''

이성구
(1969)


[image]
1. 개요
2. 영화


1. 개요


대한민국영화 감독.(1931 ~ 1975, 향년 43~44세)
유명한 휴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쇠사슬을 끊어라, 암살자,삼포 가는 길 등의 작품을 만든 거장 감독.
1962년생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 마지막 연인은 문숙.
이만희 감독은 돈을 많이 쓰기로 유명했는데, 주로 영화가 끝난 후 배우 및 스탭들과 축하 파티를 많이 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사이비 종교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교주인 동명이인 이만희와 출생년도가 같다.

2. 영화


한마디로 팔방미인, 어떤 장르도 평균 이상의 물건을 뽑아내는 신의 손이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63년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고 늘 그렇듯이 이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수만명의 해병대를 군에서 지원받았다.당시에 전쟁영화 지원을 위해서 안전조치를 허술하게 하면서도 '''실탄을 사용'''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한국 영화계에 안전 대책이 미흡했던 건 꽤 흔한 일이기도 했고 영화 제작 기술 부족이란 이유도 있었다.
이후 1965년작인 <7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미화시켰다고 검열에 걸려 영화감독 최초로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때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코렁탕을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최종적으론 무혐의로 끝나서 무사히 풀려났다.
정작 이 영화는 북한군 장교가 '자유 대한'으로 귀순하는 반공 영화였다. 미화시켰다는 것도 코미디에 가까웠다. 북한군이 국군 부상병을 사살하자 국군 간호장교 포로가 '인민군은 제네바 협정을 교육하지 않습니까?'라며 항의하는데 이를 두고 검열 당국에선 '북괴를 정상적인 국가 및 교전단체로 설정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포로를 강간하려던 중공군을 북한군 장교가 제지하자 '장교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에요'라고 칭찬하고 이후 이 장교가 포로들과 합세해서 중공군과 교전하고 귀순하는 장면을 '괴뢰군이 중공군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민족적 자주성이 강해서 공산주의보다 민족애를 앞세우는 용맹스러운 군인같이 조작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 북한군 장교 배역엔 당대의 미남 배우였던 구봉서가 맡았고, 작중에서 신사다운 모습으로 나온 부분도 북한 미화라는 혐의를 받았다.
여기에 '양공주'(문정숙 분)가 국군 앰뷸런스에 태워달라며 '미군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다'라고 한 대사와, 이후 이 '양공주'를 북한군 부관이 살해 명령을 내린 뒤 '지금 죽은 건 양공주다'라고 부하들에게 말하는 장면을 두고 '미군은 마치 호색적이고 잔악적이며 야만적이어서 언젠가는 양공주의 신세와 같이 미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시사할뿐더러 미국과 제휴하여 일한 자는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암시하여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군이 자신을 버렸다는 대사만으로 반미 감정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지나치지만, '괴뢰군의 학살'이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더더욱 황당한 해석.
이 사건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만희 감독 본인의 최고 걸작인 만추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교도소에 다녀온 이만희 감독은 교도소에 모범수에게 특별 휴가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1], 거기에 영감을 얻어 만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영화 휴일은 아예 개봉도 못하고 있다가 2005년에야 필름이 발견되면서 공개되었다. 개봉을 못한 이유는 영화 분위기가 너무 암담해서. 실제로 원래 시나리오에선 신성일이 사체로 발견되면서 얘기가 시작되는데 감독도 작가도 너무 암담하다며 촬영은 하지 않았고, 검열 후 군대에 가는걸로 수정하면 개봉 시켜주겠다고 제시했으나, 감독이 그걸 거부해서 영화 개봉이 거부당했다(...)
그의 영화는 상당수가 필름이 유실되거나 복원되지 않았는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컬렉션 4편을 복원해 2010년에 DVD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만추를 비롯한 몇몇 영화는 포스터나 스틸컷만 약간 남아있을 뿐 필름조차 남아있지 않다.[2]
인터뷰365의 자료에 의하면, 안전을 '''등한시''' 했다. 신영균은 지각을 해서 급하게 오다가, 차가 추락할뻔했다. 그외에도 뇌관을 묻어놓고 폭발시켜야 하는데, 신인 전양자를 나무에 묶어놓고 사격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레디고를 외치며 진짜로 '''실탄'''을 쏴버렸다.[3]
그 밖에 엑스트라 한 사람은 그만 진짜 폭발에 휘말려 다리를 하나 잃기까지 했다. 보상으로 어느 땅 농지를 한가득 사서 주었는데 그 땅이 ......바로 강남이었다고......
그런데 이렇게 안전을 등한시하는 모습과는 참 모순되게도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다고(...) 같이 일을 했던 스텝들과 배우들이 모두 하나같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지도도 상당히 부드럽고 자상하게 해주던 감독'이라고 평한다. 당시 작업했던 배우들이 방송에 나와서 그가 다른 감독들이랑 다르게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실제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도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은 참 뛰어나서,영화 암살자의 DVD 코멘터리에 의하면 1969년도에는 영화를 열편이나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료는 한편당 50만원. 일반 감독료는 2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문제때문에 70년대에는 1년에 한편밖에 못 만드는데 그게 바로 유작인 삼포 가는 길이다. 그걸 마지막으로 44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만희는 영화 제작에 열중하느라 과음과 과로를 감수해야 했는데 이게 간암으로 이어졌고, 위출혈 합병증을 일으켜서 사망한 것이다. 딸인 이혜영이 아직 13세였을 때의 일이었다.
승승장구에서 딸인 이혜영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죽기전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에게 물려줄게 없구나. 나에겐 내 이름 석 자와 내 작품들 뿐이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불꽃 그 자체였고 영화가 전부였으며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명감독이 되었다. 그런 아버지가 멋있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딱 한 번 따라갔던 촬영 현장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사망하기 얼마 전인 1974년에 데뷔한 배우 문숙과의 사랑 이야기도 유명하다. 나이 차이가 무려 23세. 문숙이라는 예명(문숙의 본명은 오경숙)을 지어준 사람도 이만희였다. 이 사랑 이야기는 문숙이 쓴 '마지막 한 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다.


[1] 어느 날 같은 방에서 함께 복역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만희는 형기가 남아있는 그 사람이 탈옥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모범수 특별 휴가를 받아 잠깐 나왔다는 것이었다.[2] 많은 한국영화들, 심지어 1990년대 초반 영화까지도 필름을 재활용하거나 수거하여 녹여 은단을 만들거나(?!) 밀짚모자 틀을 만드는데 썼기 때문에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게 많다. 사실 이건 당시 TV프로그램이나 만화 등도 마찬가지라서 여러모로 보관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3] 총알은 주위 나무에 박히긴 했다고. 뭐 일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똑같이 실제 화살을 미후네 토시로에게 확실히 벽에 박히게 공기압축장치를 써서 여러발을 쐈던 것이 똑같다(...) 참고로 미후네 토시로는 촬영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으나 나중에 회식에서 술에 취하자 "구로자와 이 색햐, 날 죽이려고 했지? 그래, 이 자리에서 끝을 보자."고 방방 날뜄는데 전양자는 그러지도 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