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자

 

''' 윤학자 ''' | ''' 尹鶴子 '''
'''성명'''
다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たうち ちづこ)'''(귀화전 성명)'''
윤학자(尹鶴子)'''(귀화후 성명)'''
'''생몰년도'''
1912년 10월 31일 ~ 1968년 10월 31일
'''출생지'''
일본제국 고치현 고치시 와카마츠초
'''사망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국적'''
일본제국 → '''대한민국'''
'''별칭'''
목포의 어머니「木浦の母」
한국고아의 어머니「韓国孤児の母」
'''직업'''
고아원 원장
'''종교'''
기독교
'''가족'''
윤치호(남편), 다우치 모토이田内 基(たうち もとい(장남) 등 2남 2녀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 문서


1. 개요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 출신 교육가 겸 복지 활동가. 한국 이름은 '윤학자(尹鶴子)'이며 남편의 성씨였던 윤씨에 자신의 이름 치즈코(千鶴子)의 鶴子를 따서 조합한 이름이다.

2. 생애


1912년에 일본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면서부터로 아버지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후 목포시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때 목포에는 윤치호(尹致浩, 1909 ~ 1951?)[1]라는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보육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공생원에서 음악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고 공생원에서 함께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았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뻔 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헌신을 익히 보아온 마을 주민들이 막아서 고초를 면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고 목포에도 인민군들이 몰려들자 다른 이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고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공생원에 그대로 남았다. 그로 인해 이들 부부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고초를 겪지만 마을 주민들이 다시 나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공생원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남편 윤치호는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편 윤치호는 이듬해인 1951년 1월에야 겨우 무혐의로 풀려났고, 식량난 때문에 전남도청이 있었던 광주광역시[2] 구호요청을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전시 상황이라 치안이 대단히 나쁠 때여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증명할 만한 증거는 없다.
이후 공생원 운영은 온전히 그녀의 손에 맡겨졌고, 그녀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생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1963년 박정희 정부에서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고, 1967년에는 일본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65년에 목포시에서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수여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인망을 얻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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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68년 그녀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목포시 최초의 목포 시민장으로 치뤄졌고,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여명의 시민이 참석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1968년 당시 목포시의 인구는 대략 16만여 명이었으니, 과장 좀 보태 전 목포가 울었던 셈. 묘지는 남편 윤치호의 고향인 함평군 대동면 옥동 마을에 있다.

3. 여담


1995년,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한일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졌다.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시다 에리가 다우지 치즈코역, 길용우가 윤치호 역을 맡았다. 한일합작영화임에도 당시 일본영화 상영길이 막혀있던 한국에서는 개봉을 못하다가, 1998년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로 제일 먼저 수입허가를 받게 되었다.
공생원은 지금도 목포에서 운영 중이며, 일본 정재계 인사들이 내한하면 종종 방문하기도 한다. 일본항공(JAL) 한국지점 같은데선 이미 몇십년째 후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공생원 홈페이지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도 생전에 공생원에 매화나무를 선물로 보내고, 2008년 공생원 창립 80주년 행사 때 아내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을 받아 방문하기도 했다. 게이조 본인 역시 방문을 원했으나 병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들인 다우치 모토이(한국명 윤기)씨도 복지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4. 참고 문서



[1] 친일파 윤치호(尹致昊, 1864~1945)와는 다른 사람이니 유의하자.[2] 2005년에 도청을 무안군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