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
(かね( (ふみ(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3년 1월 25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고토부키 초
(現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color=#fff> '''사망'''
1926년 7월 23일 (23세)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우츠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
(現 구로바네 형무소)
<color=#fff>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경내)
<color=#fff> '''국적'''
[image] 일본 제국무국적 ('''아나키스트''')
<color=#fff> '''별칭'''
'''아명''' 후미(フミ)
'''이명''' 사에키 후미코(佐伯文子), 이와시타 후미코(岩下文子)[1]
'''한국명''' 박문자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사회활동가
<color=#fff> '''학력'''
충청북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졸업
(現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초등학교)
<color=#fff> '''가족'''
외조부 가네코 도미타로(金子富太郞)
외조모 가네코 요시(金子ヨシ)[2]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
어머니 가네코 도쿠노(金子 トクノ)
배우자 박열
<color=#fff> '''상훈'''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가네코 후미코와 남편 박열'''
[clearfix]

1. 개요


일본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3] 또한 박열의 아내이다. 한국명은 박열의 성에 후미코를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읽은 '박문자'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4]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하였다.[5]

2. 생애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의 사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제국의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의 소마구치(杣口)에 머물다가 농민의 딸이었던 후미코의 어머니 가네코 도쿠노(金子トクノ)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는 등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결국 술과 도박에 빠져 경찰 자리에서 파면되면서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태어난 후미코는 양친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출생 신고가 돼 있지 않아 소학교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호적에 없다는 까닭으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며[6] 큰 상처를 입었다. 이것이 후일 가네코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이후 아버지는 '''처제(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가출하였고''',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image]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된 가네코 후미코의 호적등본
후미코는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새 아버지가 살던 야마나시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지만 곧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촌 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시)에 가서 자랐다.
후미코가 9살 때 생부의 여동생, 곧 고모가 결혼한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 부강면에 있던 고모부 이와시타(岩下)의 집에 맡겨진다. 사위의 집에 살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후미코를 친손녀로 인정하지 않아서, 후미코를 외조부의 5녀로 입적시키고 고모와 함께 후미코를 식모처럼 부려먹으며 학대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사망 사고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조선에서 지주로 살던 고모부와 고모도 마찬가지로 후미코를 조카로 인정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모욕을 주거나 정신적으로 학대하였다.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자,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갑갑한 친척들과 사는 일본인 마을 생활과 달리 우연히 간 조선인 동네에서는 후미코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아이로 대우하였고 굶주린 후미코에게 먹을거리를 내어주기도 하는 등 따뜻이 대우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좋게 볼 리야 없겠지만, 학대받으며 굶주린 소녀를 그저 일본인이라고 배척하진 않았던 것.
그러던 1919년, 후미코는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고 한다. 이렇게 후미코는 조선인의 처지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한다.
후미코는 조선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까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재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미코는 자서전에 당시를 "집없이 나는 며칠씩 인근의 친척 집을 방황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외가와 짜고서 후미코를 재산 많은 스님인 작은외삼촌과 강제로 혼인케 하려 하였다.[7] 이에 반발을 품은 후미코가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야마나시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 외가와 헤어지고 1920년 4월, 17세 되던 해에 도쿄로 상경한다. 도쿄로 상경한 후 어머니 쪽 친척 집에 머물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신문팔이와 노점상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일을 하면서 마사노리(政則) 영어 학교와 연수 학관을 다녔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러시아 혁명에 대한 책을 접했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으며, 1921년 여름 무렵,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1922년 3월, 후미코는 박열과 만났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후미코는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와 아니키스트들로 분열되었고, 이후 박열홍진유,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焔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黑友會)에 김중한(金重漢), 니야마 쇼다이(新山初代),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와 함께 가입했다. 같은 해 11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8]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
이듬해인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3월부터 살던 도쿄의 집을 본거지로 정하고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가졌다. 후미코는 재판에서 불령사의 성격을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진술하였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쓰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나카시니 이노스케(일본의 노동 운동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지게 되고, 같은 시기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야마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다. 당시 후미코는 "다이쇼 덴노는 병자이기 때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엿보려 했다"라고 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수사를 받으며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른 불령사 동지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속 수사를 받았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나는 박열이다”고 답했다. 후미코 또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한다.
[image]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법정 사진 기사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
1926년 3월 26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이후 4월 5일 천황이 명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후미코와 박열은 옥중에서 혼인하였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이후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7월 23일 (향년23세) 의문사하였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의 발표에 의구심을 품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동료들은 후미코의 어머니와 함께 시신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사인을 밝힐 수 없었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다.[9]
법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조선에서 박열의 형 박정식이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가려 했다. 하지만 일본제국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받은 박열의 형은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후미코를 매장하였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구리하라 가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으로 출간되었다. 후미코의 묘는 본래 주흘산에 있는 박열 집안의 선산 지역(문경읍 팔령리)에 있었는데 2003년 박열의 생가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를 기념관 경내로 이장했다.
1976년 3월, 야마나시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이후(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으며, 한국인 여성과 재혼한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의 기일마다 집안 내에서 묵상을 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가졌다고 한다.

3. 기타


  • ||[image] ||
    법정에서의 모습을 재현한 영화 <박열>의 한 장면.
    2017년 6월, 박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박열>이 개봉하였다. 박열 역은 배우 이제훈이 맡았고, 가네코 후미코 역은 배우 최희서가 맡았다. 최희서는 가네코 후미코 역을 잘 소화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 각각 아버지와 고모쪽 성을 딴 것이다.[2] 호적상 가네코 후미코의 부모로 등재되어 있다.[3] 첫번째는 박열의 재판 변호를 담당했던 후세 다쓰지.[4] 당시에는 동거남.[5] 구 일본 제국 측에서 유가족에게 통지한 사망 원인은 자살이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6] 당시는 시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기보다는 국가의 신민(臣民)으로서 납세, 병역 등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에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시기였다. 호적은 국가가 시민에게 부과하는 의무에 대해 뒷받침하는 자료가 되었는데, 그렇다보니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국가가 나서서 직권으로 호적에 등재시키거나 복지 정책으로 보호하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멸시했던 것이다.[7] 2012년 후미코의 자서전이 출간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이종사촌으로 알려져 있었다(동아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1969년 7월 20일 방송).[8] '''후데이센진'''이라고 발음되는데 이는 불령선인이라는 멸칭과 같은 발음이지만 상반되는 뜻을 품은 다쟈레로서 내용도 일제에 대한 반발과 불령선인에 대한 옹호가 담겨져 있었다.[9] 천황에 의한 감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천황제를 부정한 후미코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끝까지 천황제에 저항하기 위하여 자살하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