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치 게이조

 




'''오부치 게이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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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외무대신'''
'''제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제121대
오부치 게이조'''

'''제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
'''일본 중의원 (군마 5구)'''
''선거제도 개편''

'''제41대
오부치 게이조'''

'''제42~48대'''
오부치 유코



'''일본국 제84대 내각총리대신
오부치 게이조
小渕恵三 | Obuchi Keizō
'''[1]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37년 6월 25일
군마현 아가츠마군 나카노조정
'''사망'''
2000년 5월 14일 (향년 62세)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재임기간'''
제84대 내각총리대신
1998년 7월 30일 ~ 2000년 4월 5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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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부친 오부치 미쓰헤이
모친 오부치 치요
'''형제'''
형 오부치 미쓰헤이[18]
'''배우자'''
오부치 치즈코
'''자녀'''
장남 오부치 쓰요시
장녀 오부치 아키코
차녀 오부치 유코
'''학력'''
와세다대학 (영문학 / 학사)
와세다대학 (정치학 / 석사)
'''정당'''

'''지역구'''
군마 5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약력'''
중의원 의원
제10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제29대 총리부총무장관
제49대 내각관방장관[19]
제2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13대 자유민주당 부총재
제126대 외무대신
제18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84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헤이세이 아저씨
2.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
2.3. 재임 중 과로사
3. 한국과의 관계
4. 기타
5. TV 매체
6.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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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정치인. 자민당다케시타파 소속으로, 제84대 총리를 재임했다.

2. 생애


1937년 6월 25일 군마현의 나카노조 마을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카노조는 대략 일본의 주요 섬 혼슈의 중앙에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푸른 환경에 있있다고 한다. 오부치 총리의 부친은 비단 공장장이었다. 오부치 게이조는 오부치 미쓰헤이와 그의 아내 치요의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에 반장을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지방 중학교로 진학한 그는 13세때 당시 중의원으로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도쿄의 사립 중학교로 전학했다. 중학생 때는 산수와 자연 과목을 잘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후지산 등산을 즐겼다고도 한다. 오부치는 오부치 미쓰헤이(2선 의원)이 4번씩이나 낙선하는 것을 보고『죽어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의지를 드러내고 고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국제 무대에서 역할을 맡기 위해 부모님의 뜻과 다르게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여 1958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셰익스피어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두번째로 하원에 선출된 후 1958년 54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오부치는 정치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아버지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생 시절 국제무대에 서는 꿈을 접고, 정치가의 꿈으로 전향한 오부치는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것을 경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외국에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접시닦이, 카메라 조수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여 돈을 모아 대학 졸업 직후인 1963년 1월에 9개월 동안 남미, 북미, 유럽, 중동, 스리랑카 등 38개국 장기 여행을 시작한다. 지금도 저 정도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과 요즘 젊은 세대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하기에 나름 시대를 앞선 배낭 여행의 선배로 봐도 무방하다. 그는 워싱턴 여행 중, 모았던 돈을 다 써버린지라 남은 돈으로 당시 동서 냉전 중이던 독일 베를린에 가서 자신이 카메라 조수 아르바이트 한 것을 경험 삼아 독일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카메라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지고 일일히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어깨와 허리가 나갈 뻔했다고 하며, 다행히 돈을 마련하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런 여행의 경험으로 여러 사회 현상을 지켜봤고, 또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성실했던 정치인의 모습이나 한국 등 세계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실천적으로 노력한 모습도 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38개국 여행이 자신이 변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
그러나 상술한 듯 부친이 갑자기 숨지자 어쩔 수 없이 선거구를 이어받아 총선거에 출마, 26세의 나이로 처음 당선되어 그의 정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1. 헤이세이 아저씨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3]에서 요직을 맡고, 관방장관 시절이던 1989년에는 쇼와 덴노의 사망 후 수상관저에서 새로운 연호헤이세이를 공표했다.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 오후 1시 쯤(이 때는 쇼와 덴노가 사망한 날)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image]
이 장면은 지금도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전환하는 시대의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고, 연호가 써 있는 액자를 들고 있는 오부치 관방장관은 '''헤이세이 아저씨(平成おじさん)'''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5] 이 별명은 30년 후 레이와라는 새로운 연호(21세기에 처음으로 발표된 연호)를 발표한 '레이와 아저씨(令和おじさん)'가 물려받았다.
이후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거쳐 이듬해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2.2. 식은 피자에서 근성의 총리로


당시 일본 역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었고, 관방장관과 외무대신 등 경제와 별 관련없는 부처를 거쳤기에, '''"3일이면 오래 간다"''', '''"식은 피자(冷めたピザ)"''' 등의 별명으로 여론으로부터 전방위로 불신을 샀다.
미국 뉴욕타임즈 98년 7월 13일 기사 Fresh Faces Are Few For Top Job In Japan에 존 뉴퍼[6]의 코멘트가 실렸는데, 그 중 "Obuchi has all the pizzazz of a cold pizza(오부치는 식은 피자 정도의 활력/매력이 있을 뿐이다.)[7]라는 문구가 있었고, 이것이 일본 내 언론에 확대 재생산 되면서 식은 피자라는 별명이 유명해진 것.
이에 오부치는 출마 회견에서 '''"식은 피자도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따뜻해진다"''' 라고 맞받아치고, 98년 7월 18일 저녁 그의 집 앞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에게 따뜻한 피자를 돌리며 자신이 식은 피자가 아님을 강조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방송에서 "레인지로 데운 피자는 맛이 없다."며 물고 늘어져 피자 논쟁이 이어지기도.
[image]
이 일화로 1998년 타임지에 피자를 들고 있는 사진이 표지로 선정되는 위엄(?)을 달성하기도 했다.
오부치는 '''"인기의 하시모토, 실력의 오자와, 인품의 오부치"'''라는 말처럼[8] 적을 만들지 않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했는데, 대표적으로 각계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하는 등 '''경청'''하는 자세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결국 재임기 별 탈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나간다는 평으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은 후반기에 50%를 돌파하게 되면서 총리로서 평판을 높이게 되었다. 관련 영상.
또한 경제통이자 미국통인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에게 대장대신을 맡도록 설득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때 했던 정책이 대량의 감세와 "국채 팔기" 정책. 물론 훗날 이 국채 팔기 정책이 빚더미 일본의 기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 국채 자체가 자국민들에게 파는 국채가 많아서 재정적으로 아주 심각한 부담은 되지 않았단 의견도 있으며, 어찌 됐든 당시엔 급한 불은 껐다. 그렇게 경제 위기를 돌파하면서 결국 식은 피자라는 비아냥에서 시작했지만 오부치 폰으로 대표되는[9] 근성의 총리라는 평가를 얻는데 성공한다.
1998년 11월엔 23조엔 규모의 긴급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는데, 이때 실제로 국민들에게 현금성 상품권을 배부하기도 했다. 약 3,500만 명에게 '고향쿠폰'이라는 상품권을 배부하는데(대상자 1인당 2만엔 꼴) 여기에 실제로 7천억엔이 소요되었다. 하시모토 류타로 정권 시절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다시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사망 직전인 총리 집권 마지막 해인 2000년 연설 모습.
오키나와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혹자는 오키나와를 생각해준 마지막 리더라는 평까지 할 정도. 강력한 진흥정책과 2000년 제 26차 G8 큐슈-오키나와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이 대표적이다. 슈레이몬이 그려져 있는 2천 엔권 지폐도 이 시기에 발행한 것.

2.3. 재임 중 과로사


혼수상태이며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하고 있다.

'''아오키 미키오''' 내각관방장관 발언

사실 오부치는 총리 이전부터 병원에 자주 입원할 정도로 심장이 좋진 않은 상태였는데, 총리가 된 이후부턴 쉬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직무를 무리하게 수행한 탓에 몸에 이상증세가 찾아왔다. 뇌경색이 찾아온 결정적 계기는 2000년 4월 1일 토요일 오자와 이치로와 연립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오자와 당수가 연정탈퇴를 표명하자 그 영향으로 큰 충격을 받은 걸로 추정된다. 이때 경색된 표정으로 관저로 복귀하던 도중 기자들의 질문에 10초간 말을 하지 못했고, 4월 2일 새벽에 관저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송 직후 검사 결과 뇌사식물인간 상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당시 FNN 보도 영상 당시 MBC 보도 영상.
그렇게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4월 3일부터 아오키 미키오 내각관방장관을 총리 권한대행으로 하는 내각이 출범되었다. 다만 이때 언론에선 오부치 총리가 쓰러진 4월 2일 새벽부터 뇌경색 사실이 밝혀진 4월 3일까지 내각에서 총리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극비에 부친 것과 13시간 동안이나 총리 공백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국기위기 관리 체제 부실과 관련해 비판하기도 했다.
4월 5일 신임 총리로 모리 요시로를 정식 내정했다. 모리 요시로 정식 출범 이후 오부치 총리는 임기가 종료되었고, 결국 1달 뒤인 5월 14일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병원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일본 총리가 재임 중 병사하는 것은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이후 2번째였다.
6월 8일 열린 장례식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추도사를 낭독했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참여했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장례식에 참석하여(대한민국 대통령 최초의 외국 정상 장례식 참석) 애도의 뜻을 전했다. 영상, 영상2.
공교롭게도 오부치 총리가 타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6월 19일에는 오부치 총리가 관방장관 시절 헤이세이 연호를 발표할 적의 총리이자 와세다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까지 세상을 떠났다. 한 달 간격으로 전/현직 총리를 두 명이나 보내는 비보를 맞은 것이다.[10]
2001년에는 큐슈-오키나와 G8 정상회의가 열렸던 오키나와 정상회의장 앞에 오부치 게이조 총리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에는 고향인 군마현(群馬県)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재임 시기 국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총리인 만큼 재임 중후반기엔 인기도 제법 있었고, 그가 병으로 사망했을 땐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덧 그가 사망한 지 20년도 넘었고, 그의 재임 시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는 '전임 수상'보다는 '헤이세이 연호의 발표자'로 더 알려진 편이다.

3. 한국과의 관계


[image]
내각총리대신 시절인 1998년 10월, 도쿄 영빈관에서 일본을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악수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한일 파트너십'이라고도 불리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김대중 오부치 공동선언의 배경과 내용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痛節な反省と心からの謝り)'''를 했다.

오부치는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외교적 수사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취하기 위해 제법 노력한 총리였다. 한국에도 나름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수상 재임시기 한일관계는 원만했다. 이후의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과 함께,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 총리들 중에서 한국에 우호적이었던 대표적 사례.[11] 수상 재임 이전에도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당시엔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이었으며,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의 정체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총리 시절인 1998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당시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방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가해자=일본, 피해자=한국, 그리고 사죄'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표현을 했다. 해당 영상.
이전에도 일본의 사과에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이 있기는 했지만, 둘 다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대중-오부치 선언(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 내의 사과는 '''한국을 지칭한 사과라는 점[12], 기존의 담화형식이 아닌 공식문서화 했다는 점, 자민당 보수정권의 사과라는 점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사과'''라고 볼 수 있다.[13] 김대중 대통령도 이 같은 일본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이후 일본 총리들은 딱 이 수준 혹은 더 못한 수준에서 사과 발언들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에게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추진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것이 11개 항목(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의 핵심 내용과 43개 항목(부속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을 위한 행동계획)의 행동 계획으로 구성된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이다. 한국은 미래를 바라보고, 일본을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취지로 지금도 한일관계에서 대표적인 양국 협력 선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여담으로 오부치 총리는 김 대통령이 써준 '경천애인' 휘호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한일 양국 국민간의 사랑과 협력의 뜻도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나가는 김 대통령을 붙잡고 웃으면서 친근하게 말하기도 했다. 관련 영상.
또한 1999년 방한 당시에는 해인사를 방문해 팔만대장경을 돌아봤고, 동시에 일부 학생들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강연을 하였는데, 어색한 한국말로 "오늘은 고려대학교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원본 풀영상, MBC 뉴스 또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해 참배했다.관련 영상.
그 외 오부치 총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여성 다우치 치즈코[14] 여사가 전남 목포시에 설립한 고아원 공생원에 매화나무 묘목 20그루를 보내기도 했고, 2008년 공생원 설립 80주년 행사에는 오부치 총리의 부인인 오부치 치즈코 여사가 초청을 받아 방문했다. 오부치 총리 본인도 생전에 공생원 방문을 희망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4. 기타


  • 그의 사후, 차녀 오부치 유코(小渕優子)가 아버지와 똑같이 26세의 나이로 지역구인 군마현 제5구를 이어받아 당선되어 중의원에 입성했다. 자세한 내용은 오부치 유코 문서 참조 바람.
  •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에 당시 내각 관방장관시절에 새 연호인 헤이세이를 발표했다.해당영상[15]
  • 2000년 1월, 오부치 게이조가 발족한 자문기구 '21세기 일본의 구상'이 낸 보고서 중 '영어 제2공용어화 계획'이 수록된 게 밝혀져 일본 열도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계획은 오부치 사후 사실상 사장(死葬)되었다.
  • 그의 별명 변천사는 헤이세이 아저씨→식은 피자→오부치 폰이다.
  • 평소 유머스런 말을 꽤 잘했다고 한다.
  • 정작 인터뷰를 할땐 쑥스러움을 제법 탔다. 그래서 기자들 질문에 답변할때 약간 부끄러움을 타는 것도 종종 볼 수 있었다.
  • 원래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으나 정치생활을 하면서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 잠버릇이 독특한데 총리 시절 잠을 잘때 바지는 잠옷차림으로 입고 자지만 위에는 양복 와이셔츠 그대로 입고 잔다고 한다. 이유는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몰라 곧바로 집무실로 출동하기 위해 바지만 갈아입고 잔다고 한다. 이 정도로 일에 열심이었으니 과로사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
  • 평소 아이들을 좋아해 유치원에 방문하여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 생애 황소 모형을 좋아하여 젊은 시절부터 수집하기 시작해 집에 황소 모형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 총리 시절 1999년시카고 메이저리그 투수 시구를 한적이 있다.해당영상
  • 총리 재임 시절 한 여성에게 "저 아세요?" 라고 물었는데 모른다는 답을 듣고 입을 붕어처럼 내민 채 연호 액자를 들고 있는 시늉을 하자 곧바로 알아 맞혔다고 한다.(...)
  • 총리 재임 시절에 도쿄의 어느 라멘집에서는 그의 지지율 변동에 따라서 라멘값을 다르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 1999년 자민당 정치극 1년해당영상
  • 총리 시절 러시아에 방문했을 당시 러시아 털모자를 착용하고 행진한 적이 있다. 오부치 총리의 러시아 방문.
  • 오부치 총리의 독일 방문해당영상
  • 오부치 총리의 폼페이 방문해당영상
  • 오부치 총리의 중국 방문해당영상
  • 오부치 총리의 프랑스 방문해당영상해당영상2
  • 오부치 총리의 필리핀 방문해당영상

5. TV 매체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7기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에서 총리(한국판에서는 대통령) 역으로 특별출연 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방영된 <흉내내기를 잘하는 마사오 군이라고> 편에서는 카자마 토오루(김철수)가 이 인물을 흉내 냈는데, 한국판에서는 김제둥으로 현지화 했다. 실제로 김제동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평을 받았다. 해당 장면 이후에 나오는 짱구의 식은 피자 드립은 상기된 내용에서 기인한 것. 다만 한국에서는 김제동과 식은 피자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좀 붕 뜬 느낌이 되어버렸다.
은혼 4기 2화 (267화) 엔딩이 끝나고 사카타 긴토키가 오부치 게이조의 연호를 공개하는 장면을 패러디 했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47,350 (14.7%)'''
'''당선 (3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61,543 (18.2%)'''
'''당선 (3위)'''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50,185 (13.8%)'''
'''당선 (4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37,258 (9.7%)'''
'''당선 (4위)'''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76,012 (18.5%)'''
'''당선 (2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62,375 (15.4%)'''
'''당선 (3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59,647 (14.6%)'''
'''당선 (4위)'''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49,028 (12.5%)'''
'''당선 (4위)'''
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75,289 (18.5%)'''
'''당선 (4위)'''
9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76,932 (17.7%)'''
'''당선 (4위)'''
10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3구)
'''89,440 (22.7%)'''
'''당선 (1위)'''
11선[16]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군마 5구)
'''127,052 (70.7%)'''
'''당선 (1위)'''
12선[17]
[1] 일본에서는 (깊을 연)을 인명에서 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淵과 渕의 경우에는 신자체구자체의 관계가 아니며 이체자이다.[2] 연혁상의 공식적인 임기는 4월 5일까지이나 4월 3일부터 5일까지는 후술하듯 혼수상태에 빠져 아오키 미키오 당시 내각관방장관이 총리 권한대행을 했다. 재임 중에 아예 사망해버린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는 임기 종료일 = 사망일이지만 오부치 총리는 사망하지 않고 혼수상태였던 점을 반영하여 오부치 총리는 임기 종료일 = 모리 요시로 후임 총리 취임일이다.[3]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둘 다 와세다대학 동문이었으며 다케시타 총리의 다다음 사람과 오부치 총리의 바로 다음 후임자도 동문. 일본 사회도 학연이 알게 모르게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오부치 총리의 전임자다다음 사람은 와세다대학의 영원한 숙적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이다. 대강 나열해보면 다케시타(와세다) - 가이후(와세다) - 하시모토(게이오) - 오부치(와세다) - 모리(와세다) - 고이즈미(게이오) - 후쿠다 야스오(와세다) - 노다 요시히코(와세다) 등 헤이세이 시대는 소케이 출신들이 2:1 비율로 번갈아가면서 총리를 해먹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중간중간에 타 대학 출신들도 없지는 않다.[4] 한 일화로, 골프장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나를 알고 있나요?"라고 물으면서 액자를 내거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5] 극장판 가면라이더 지오 Over Quartzer에서 가면라이더 발크스가 들고 있는 방패에 헤이세이 라이더 전원이 힘을 합쳐서 '헤이세이' 글씨로 구멍을 내 버리고 발크스가 이 광경을 쳐다보고는 벙찌는 장면으로 패러디되었다.[6] 일본 영사관에서 일하거나 일본의 한 연구소에서 지내면서 정치 관련 뉴스기사를 송고하기도 한 인물.[7] 보면 알겠지만 pizzazz 와 pizza로 말장난을 유도했고, 존 뉴퍼 본인 스스로도 단순히 glib comment였다고 하는 등, 이렇게 일본에서 논란을 불러올 지 몰랐다고 한다. 존 뉴퍼는 이 일로 일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가 일본 정치에 대해 코멘트를 했다는 둥, 존 뉴퍼가 대체 누구냐는 둥 비난에 시달렸다.[8] 원래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비롯된 말로 인기의 세-리그, 실력의 파-리그(人気のセ、実力のパ)가 원본이다.[9] 짬날 때마다 아무에게나 불쑥불쑥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던 전화광이라 붙은 별명.[10] 비슷한 사례로 한국에서도 2009년 직접적인 전-후임 관계이자 같은 당 출신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5월과 8월에 연이어 타계한 일이 있었다.[11] 하토야마, 간 총리는 민주당 내각 출신의 인물들이었고, 때문에 자민당 출신 총리로서는 오부치가 한국과 가장 잘 맞았던 편이라고 할 수 있다.[12]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사과였다.[13] 물론 당시 자민당 내부 강경파들은 이런 총리의 행보에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보면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이 수준까지의 행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외교란 결국 주고 받는 것이기 때문.[14] 한국명 윤학자. 목포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복지 사업에 전념하여 광복 전후 목포시에서 명망을 얻었다.[15]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절 녹화한 VHS 비디오 영상이며 4:3 비율의 아날로그 감성이 돋보이는 아날로그 시절 일본의 인상깊은 영상자료이다.[16]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7] 임기 중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