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란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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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에 남아있던 머그샷. 파인만이 부럽지 않은 절정의 외모를 자랑한다.[1]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소련판 폰 노이만'''[2]
소련의 물리학자로 란다우는 1908년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에서 태어난 인물로 13살때 이미 김나지움 학교를 졸업하는 비범함을 보이고 이른나이에 대학을 보낼수는 없다는 부모님의 취지하에 바쿠 경제학 학교에 보내지지만 1년후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공부한다.
1929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란다우는 1년 반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케임브리지에서 폴 디랙과, 그리고 취리히에서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특히, 코펜하겐의 보어의 이론 물리 연구소의 학문적 분위기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어, 란다우는 끝까지 보어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후, 그는 1933년과 1934년 두 번 더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고, 후에 그가 외국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어가 1934년 1937년, 1961년에 소련을 방문하는 등 보어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코펜하겐에서 란다우는 Peierls와 양자전기역학과 상대론적 양자이론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논문을 편찬하고 캐임브리지에서는 금속이론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금속에서 축퇴된 이상적인 전자가스는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의 양자 현상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1931년 서유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서 1931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고, 1932년 하르코프로 옮겨서 그곳의 새로 조직된 우크라이나 이공학 연구소의 이론 부의 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하르코프의 물리학 기술연구소와 Mechnic Building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1934년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Defend없이 수학과 물리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1935년 교수가 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간은 란다우가 가장 심도있고, 다양한 연구활동을 한 시기로 그 당시 란다우의 과학적인 활동의 범위는 그가 한 공부의 목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36년 한 해동안에 공부한 것이 일종 위상 변환 이론, 초 전도체의 중간 상태 이론, Coulomb interaction에서의 운동 방정식, 단원자 분자의 상호 작용 이론, 저온에서의 금속의 특성, 소리의 확산과 흡수 이론, 초전도체에서의 광전효과 이론 등이 있다.
또한, 그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역시 하르코프이고, 그곳에서 소위 '이론기초(theoretical minimum)'의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모두 9가지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개는 입학시험과 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미적분, 텐서해석, 군론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시험이고, 나머지 일곱개는 란다우 강좌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물리분야에 관한 것을 테스트하는데, 란다우가 이 프로그램을 하는 기간동안 단지 43명의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그만큼 란다우의 관점에서 제대로 물리학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3] 또한, 하르코프에서 그는 '이론 물리학 강좌'와 '일반물리학 강좌'의 전반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Lifshitz와 함께 공동작업하여 1950년경에 '이론물리학 강좌'라는 4000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게 된다.[4]
1937년 봄, 란다우는 모스크바로 옮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건의로 설립된 물리문제 연구소 이론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인생이 끝날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이 그 성과를 거두는 시기로, 실험 물리와의 깊은 상호협력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quantum fluid 의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란다우의 초유동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후에 실험에서 밝혀지게 된 새로운 현상을 예견하기도 했다.
1908년 1월 22일 카스피해에 있는 바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내과의사였다.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가 과학자로 그리고 교육자로 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61년 봄 모스코바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의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영재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그가 학교를 졸업하는 13세때 벌써 기본적인 미적분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판단하여, 란다우는 1년 간 Baku Economic Technikum[5] 에 다니다가, 14세인 1922년 바쿠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이곳에서 물리뿐 아니라 화학과 수학에 대해서도 공부한다.[6] 1924년 16살에 란다우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하여 1910년대 빈에 있는 볼프강 파울리가 그랬던 것과 같이 란다우도 일반상대론에 깊이 매료되었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한 양자역학의 글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된다.
그중 특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일반 상대론에서 공간-시간의 곡률과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1927년 19살의 나이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위해서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곳은 1년 전(1926년)에 그가 시간제 학생으로 공부했던 곳이고, 이때 이원자분자에서의 스펙트럼의 강도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고, 이어 1927년 밀도 행렬을 이용한 시스템의 양자 상태를 처음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소련 대숙청 때 란다우는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 사건[7] 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되나, 모스크바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5월 27일에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박해를 받게 된다. '''저 인간백정이 히틀러랑 뭐가 다르냐'''고 서기장 동무를 깠던지라 독일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1939년 5월 29일, 그의 동료 카피차가 서기장 동무에게 란다우의 결백과 신분을 보증한다, '''란다우 죽으면 나도 때려친다'''는 편지를 보내 석방될 수 있었다. 수틀리면 숙청하고 보는 인간백정이라고는 하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되면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서기장 동무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숙청의 칼날은 소련 인민 누구에게라도 향할 수 있었으며 명장들도 루뱐카로 끌려가는 마당에 일개(?) 과학자들이 예외일리는 없었다.[8] 그래도 대조국전쟁 이후 스탈린 훈장도 받았고, 스탈린 사후에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62년 1월 7일, 란다우의 차가 마주오는 트럭에 충돌한다. 그는 심하게 부상을 입고 석달간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으나[9] 많은 의료진과 주위 동료의 노력으로 57일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목숨은 구했지만, 그의 물리에 대한 재능은 구하지 못했고[10] 그가 사망하기까지의 6년간, 그는 명목상으로만 물리 문제 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 책임자였을 뿐, 아무런 창의적인 학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란다우는 이 부상 때문에 1962년 노벨물리학상[11]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고, 60세가 되는 1968년 4월 1일에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지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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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au and Lifshitz Course of Theoretical Physics
vol. 1: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896-0)
vol. 2: "The Classical Theory of Fields". L. D. Landau, E. M. Lifshitz, (4th ed. ISBN 0-7506-2768-9)
vol. 3: "Quantum Mechanics: Non-Relativistic Theor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539-8)
vol. 4: "Quantum Electrodynamics". V. B. Berestetsky,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ed. ISBN 0-7506-3371-9)
vol. 5: "Statistical Physics Pt. 1".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372-7)
vol. 6: "Fluid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2nd ed. ISBN 0-7506-2767-0)
vol. 7: "Theory of Elasticit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633-X)
vol. 8: "Electrodynamics of Continuous Media". L. D. Landau,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0750626348)
vol. 9: "Statistical Physics Pt. 2".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7506-2636-4)
vol. 10: "Physical Kinetics".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08-020641-7)
다른 책들
"General Physics, Mechanics and Molecular Physics". A. I. Akhiezer, E. M. Lifshitz (ISBN 0-08-009106-7)
국내에서는 1권을 시작으로 번역이 진행 중이나... 더디다. 더욱이 영어 중역판이라는 한계도 있다. 하기사 러시아 유학 경력의 이론물리학 박사가 국내에 있어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란다우는 마이너스 로그 스케일(0에서 5까지)로된 물리학자 목록을 만들어 유지했다. 뉴턴에 최고값 0, 아인슈타인에 0.5 를 매겼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슈뢰딩거, 보스, 위그너 등에 1점을 줬다. 란다우 자신에게는 2.5를 매겼다가 노벨상 수상 이후 2로 올렸다. 천재급을 제외한 물리학자들은 목록에 들어 갈 것도 없이 그냥 5점.
란다우 하면 물리학자들에게는 이 소련 과학자가 생각나겠지만, 수학자들에게는 에드문트 란다우도 굉장히 유명하다. 수학에서 란다우 이름 들어간 각종 정리나 떡밥이 보인다면 100% 에드문트 란다우. 가끔 수학과 물리학을 모두 전공하는 괴수들은 누가 누군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여담으로 둘 다 유대인이다. 란다우라는 이름 자체가 유대계 이름이기도 하고... 소련 란다우가 서기장 동무에게 숙청당했듯이 이 수학자 란다우도 말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고생하다 죽었다. 지못미.
2006년부터 4라는 데뷔작으로 알려진 젊은 러시아 영화 감독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가 전기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문제는 제작 과정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기로 가득찼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세트로 축구 경기장 두 개 사이즈로 도시 세트를 짓고 배우와 스태프들 보고 이 곳에서 살라고 강제하면서 촬영했고.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증에 미친듯이 매달리면서 아예 스탈린 시절 소련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고... 촬영기간도 3년 정도고 흐르자노프스키가 저지른 기행도 장난 아니라는 얘기가 많다. 링크 원래는 소박한 사이즈의 영화였다고 하나, 지원이 꽤 들어오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문에 촬영한 분량도 장난 아니라서 8-10시간 영화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몇 편으로 쪼개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다우 나타샤는 2020년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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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에 남아있던 머그샷. 파인만이 부럽지 않은 절정의 외모를 자랑한다.[1]
1. 업적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소련판 폰 노이만'''[2]
소련의 물리학자로 란다우는 1908년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에서 태어난 인물로 13살때 이미 김나지움 학교를 졸업하는 비범함을 보이고 이른나이에 대학을 보낼수는 없다는 부모님의 취지하에 바쿠 경제학 학교에 보내지지만 1년후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공부한다.
1929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란다우는 1년 반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케임브리지에서 폴 디랙과, 그리고 취리히에서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특히, 코펜하겐의 보어의 이론 물리 연구소의 학문적 분위기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어, 란다우는 끝까지 보어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후, 그는 1933년과 1934년 두 번 더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고, 후에 그가 외국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어가 1934년 1937년, 1961년에 소련을 방문하는 등 보어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코펜하겐에서 란다우는 Peierls와 양자전기역학과 상대론적 양자이론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논문을 편찬하고 캐임브리지에서는 금속이론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금속에서 축퇴된 이상적인 전자가스는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의 양자 현상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1931년 서유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서 1931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고, 1932년 하르코프로 옮겨서 그곳의 새로 조직된 우크라이나 이공학 연구소의 이론 부의 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하르코프의 물리학 기술연구소와 Mechnic Building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1934년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Defend없이 수학과 물리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1935년 교수가 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간은 란다우가 가장 심도있고, 다양한 연구활동을 한 시기로 그 당시 란다우의 과학적인 활동의 범위는 그가 한 공부의 목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36년 한 해동안에 공부한 것이 일종 위상 변환 이론, 초 전도체의 중간 상태 이론, Coulomb interaction에서의 운동 방정식, 단원자 분자의 상호 작용 이론, 저온에서의 금속의 특성, 소리의 확산과 흡수 이론, 초전도체에서의 광전효과 이론 등이 있다.
또한, 그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역시 하르코프이고, 그곳에서 소위 '이론기초(theoretical minimum)'의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모두 9가지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개는 입학시험과 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미적분, 텐서해석, 군론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시험이고, 나머지 일곱개는 란다우 강좌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물리분야에 관한 것을 테스트하는데, 란다우가 이 프로그램을 하는 기간동안 단지 43명의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그만큼 란다우의 관점에서 제대로 물리학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3] 또한, 하르코프에서 그는 '이론 물리학 강좌'와 '일반물리학 강좌'의 전반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Lifshitz와 함께 공동작업하여 1950년경에 '이론물리학 강좌'라는 4000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게 된다.[4]
1937년 봄, 란다우는 모스크바로 옮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건의로 설립된 물리문제 연구소 이론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인생이 끝날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이 그 성과를 거두는 시기로, 실험 물리와의 깊은 상호협력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quantum fluid 의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란다우의 초유동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후에 실험에서 밝혀지게 된 새로운 현상을 예견하기도 했다.
2. 어린 시절
1908년 1월 22일 카스피해에 있는 바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내과의사였다.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가 과학자로 그리고 교육자로 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61년 봄 모스코바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의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영재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그가 학교를 졸업하는 13세때 벌써 기본적인 미적분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판단하여, 란다우는 1년 간 Baku Economic Technikum[5] 에 다니다가, 14세인 1922년 바쿠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이곳에서 물리뿐 아니라 화학과 수학에 대해서도 공부한다.[6] 1924년 16살에 란다우는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하여 1910년대 빈에 있는 볼프강 파울리가 그랬던 것과 같이 란다우도 일반상대론에 깊이 매료되었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한 양자역학의 글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된다.
그중 특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일반 상대론에서 공간-시간의 곡률과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1927년 19살의 나이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위해서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곳은 1년 전(1926년)에 그가 시간제 학생으로 공부했던 곳이고, 이때 이원자분자에서의 스펙트럼의 강도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고, 이어 1927년 밀도 행렬을 이용한 시스템의 양자 상태를 처음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3. 소련 대숙청
소련 대숙청 때 란다우는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 사건[7] 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되나, 모스크바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5월 27일에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박해를 받게 된다. '''저 인간백정이 히틀러랑 뭐가 다르냐'''고 서기장 동무를 깠던지라 독일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1939년 5월 29일, 그의 동료 카피차가 서기장 동무에게 란다우의 결백과 신분을 보증한다, '''란다우 죽으면 나도 때려친다'''는 편지를 보내 석방될 수 있었다. 수틀리면 숙청하고 보는 인간백정이라고는 하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되면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서기장 동무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숙청의 칼날은 소련 인민 누구에게라도 향할 수 있었으며 명장들도 루뱐카로 끌려가는 마당에 일개(?) 과학자들이 예외일리는 없었다.[8] 그래도 대조국전쟁 이후 스탈린 훈장도 받았고, 스탈린 사후에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4. 사고
1962년 1월 7일, 란다우의 차가 마주오는 트럭에 충돌한다. 그는 심하게 부상을 입고 석달간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으나[9] 많은 의료진과 주위 동료의 노력으로 57일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목숨은 구했지만, 그의 물리에 대한 재능은 구하지 못했고[10] 그가 사망하기까지의 6년간, 그는 명목상으로만 물리 문제 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 책임자였을 뿐, 아무런 창의적인 학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란다우는 이 부상 때문에 1962년 노벨물리학상[11]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고, 60세가 되는 1968년 4월 1일에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지에 매장되었다.
5. 저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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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au and Lifshitz Course of Theoretical Physics
vol. 1: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896-0)
vol. 2: "The Classical Theory of Fields". L. D. Landau, E. M. Lifshitz, (4th ed. ISBN 0-7506-2768-9)
vol. 3: "Quantum Mechanics: Non-Relativistic Theor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539-8)
vol. 4: "Quantum Electrodynamics". V. B. Berestetsky,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ed. ISBN 0-7506-3371-9)
vol. 5: "Statistical Physics Pt. 1".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372-7)
vol. 6: "Fluid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2nd ed. ISBN 0-7506-2767-0)
vol. 7: "Theory of Elasticit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633-X)
vol. 8: "Electrodynamics of Continuous Media". L. D. Landau,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0750626348)
vol. 9: "Statistical Physics Pt. 2".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7506-2636-4)
vol. 10: "Physical Kinetics".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08-020641-7)
다른 책들
"General Physics, Mechanics and Molecular Physics". A. I. Akhiezer, E. M. Lifshitz (ISBN 0-08-009106-7)
국내에서는 1권을 시작으로 번역이 진행 중이나... 더디다. 더욱이 영어 중역판이라는 한계도 있다. 하기사 러시아 유학 경력의 이론물리학 박사가 국내에 있어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6. 란다우 목록
란다우는 마이너스 로그 스케일(0에서 5까지)로된 물리학자 목록을 만들어 유지했다. 뉴턴에 최고값 0, 아인슈타인에 0.5 를 매겼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슈뢰딩거, 보스, 위그너 등에 1점을 줬다. 란다우 자신에게는 2.5를 매겼다가 노벨상 수상 이후 2로 올렸다. 천재급을 제외한 물리학자들은 목록에 들어 갈 것도 없이 그냥 5점.
7. 기타
란다우 하면 물리학자들에게는 이 소련 과학자가 생각나겠지만, 수학자들에게는 에드문트 란다우도 굉장히 유명하다. 수학에서 란다우 이름 들어간 각종 정리나 떡밥이 보인다면 100% 에드문트 란다우. 가끔 수학과 물리학을 모두 전공하는 괴수들은 누가 누군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여담으로 둘 다 유대인이다. 란다우라는 이름 자체가 유대계 이름이기도 하고... 소련 란다우가 서기장 동무에게 숙청당했듯이 이 수학자 란다우도 말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고생하다 죽었다. 지못미.
2006년부터 4라는 데뷔작으로 알려진 젊은 러시아 영화 감독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가 전기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문제는 제작 과정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기로 가득찼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세트로 축구 경기장 두 개 사이즈로 도시 세트를 짓고 배우와 스태프들 보고 이 곳에서 살라고 강제하면서 촬영했고.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증에 미친듯이 매달리면서 아예 스탈린 시절 소련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고... 촬영기간도 3년 정도고 흐르자노프스키가 저지른 기행도 장난 아니라는 얘기가 많다. 링크 원래는 소박한 사이즈의 영화였다고 하나, 지원이 꽤 들어오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문에 촬영한 분량도 장난 아니라서 8-10시간 영화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몇 편으로 쪼개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다우 나타샤는 2020년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1] 상당한 미남인데, 여자관계도 꽤 복잡했다. 아내에게 "나 맘대로 바람피울테니까 너도 맘에 드는 놈 있으면 피워"라는 개방결혼을 주장했다고.[2]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란다우는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으로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 공학의 여러 분야에 손을 뻗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소련에서 그가 쓴 교과서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에서는 대학/대학원 교재로 사용될 정도.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일찍 사망하기는 했는데, 노이만보다는 운좋게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둘다 유대인.[3]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중 일부는 시험을 통과하는데 모든 기력을 쏟은 관계로 바로 물리학계에서 사라진 사람이 많았지만, Pomeranchuk, Lifshitz, Khalatnikov, Abrikosov와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다.[4] 아래 저술 목록 참고.[5] 김나지움 정도 되는 듯.[6] 물리-수학 학부와 화학 학부를 복수전공했다. 나중에 화학 학부는 전공을 포기하지만, 생애 전반에 걸쳐서 화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한다.(ex: 열역학의 란다우 퍼텐셜 등)[7]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УФТИ)의 과학자들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전단을 발포한 사건.[8] 그래도 과학기술 분야는 이런 숙청의 물결에서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편이다. 서기장 동무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것은 소련의 공업화와 대조국전쟁 승리를 통한 초강대국으로의 발돋움인데, 이 과정에서 공업화의 선봉에 설 이런 과학기술 분야 인재들은 없어서는 안될 이들이라 이런저런 경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는 경우가 다른 업계에 비해 꽤 많았다. 또한 굴라그 내에서도 따로 연구할 수 있는 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창립자인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반동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20년형으로 감형되었음에도 끝내 옥사하는등 눈물겨운 사연도 적지 않다.[9] Dorozynski, Alexander (1965). The Man They Wouldn't Let Die(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사나이)를 참고하라. 1962년 란다우의 자동차 사고 이후, 물리학자 사회에서 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한 과정을 다룸. 시도 자체는 성공해, 1968년까지 란다우는 살아있었다.[10] 인지능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매 상태.[11] 노벨상은 사고가 있던 그해 11월 응집에 관한 이론, 특히 액체 헬륨에 관한 개척자로써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데,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 줄 수 없으므로 서둘러서 주었다는 소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