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막

 

李邈
(? ~ 234)
1. 개요
2. 생애
3. 이막이 처형당한 이유


1. 개요


삼국시대촉한의 인물. 자는 한남(漢南). 이소의 형, 이조와도 형제이지만 어느 쪽이 서열이 높은지 알 수 없다.[1] 광한군 처현 사람으로 그의 형제들은 재능과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은 이씨삼룡이라 불렀는데, 삼룡은 이조, 이소와 일찍 죽은 또다른 동생으로 이막은 너무 오만하고 강직해 삼룡에 들지 않았다.

2. 생애


유장 휘하에서 우비장을 지내다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그의 휘하가 되었으며, 정월 초하루에 유비가 술을 권하자 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기 전에 적이 먼저 소멸되었기에 유비가 주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했다. 이에 유비가 옳지 않다면 왜 그 자를 돕지 않냐고 묻자,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한 것이라 대답해 관리 하나가 그를 죽이려 했지만 제갈량이 간청해 화를 면했다.
이후 건위태수, 승상참군, 안한장군이 되었으며, 228년에 제갈량위나라 북벌에 나섰다가 가정에서 큰 실책을 범한 마속을 처형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다.

"진(秦)나라는 맹명(孟明)을 용서함으로써 서융(西戎)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초나라는 장군 자옥(子玉)을 주살함으로써 두 번 다시 천하를 다투지 못했습니다."[2]

이로 인해 제갈량의 신임을 잃고 촉으로 돌아갔다.
234년에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선이 그 죽음을 애도했는데, 한창 상복을 입고 아버지와도 같았던 제갈량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던 유선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이막은 이런 상소를 올렸다.

"여록(呂祿), 곽우(霍禹)가 꼭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며 효선제(孝宣帝)도 신하를 죽이는 군주가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신하는 핍박이 닥쳐올까 두려워하고, 군주는 신하의 위세를 두려워한 까닭에 간사한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제갈량은 강한 군대에 기대어 이리(狼)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범처럼 사납게 노려보며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았으니, 신은 늘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제 제갈량이 죽었으니 일족은 온전함을 얻었고, 서융은 모두 평정되었으니 모두가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가장 아끼던 신하가 죽었는데 위로랍시고 "제갈량 있을 땐 저희 신하들도 그렇지만 황제께서도 제갈량 눈치 보셨잖아요. 이제 제갈량이 죽어서 그럴 일이 없으니까 오늘은 좋은 날이네요!"라는 패드립을 날려댄 격이니, 아무리 그 유선이라도 안빡치는 것이 이상하다. 여튼 유선은 이 상소를 받아들고 그야말로 격노하여 당장 이막을 체포해 감옥에 가둔 뒤 이내 주살하였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대세를 거스르고 엉뚱한 의견을 내놓는 것을 특기로 삼았던 이막은 끝까지 자신의 천성을 어쩌지 못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유선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진한(秦漢) 이래로 나라를 망친 임금이 모두 다 어리석고 포학한 이들만은 아니었다. 초나라 의제는 참으로 뛰어난 임금이었고, 진나라 자영은 즉위 초에 조고를 죽일 수 있었으니 또한 뛰어난 임금이라고 할 만하며, 한나라 헌제는 중간 정도의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말운(末運)을 만났을 뿐이다.

유선은 참으로 평범한 재주였지만, 시종일관 무후(武侯)에게 국정을 잘 맡겼다. 무후가 죽자 이막(李邈)이 "무후가 죽지 않았으면 필시 나라에 불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유선이 노하여 이막을 죽였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곽광을 믿고 맡긴 것도 이보다는 못하였다. 그런데도 용렬한 임금이라고 시호를 받았으니 원통하지 않겠는가.

위나라의 조모(高貴鄕公)은 죽어서도 생기(生氣)가 있었고, 원위(元魏, 북위)의 경종(敬宗)은 직접 강성한 신하를 죽였고, 원위의 절민제(節閔帝)와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도 모두 영명한 임금이었다. 북제의 안덕왕(安德王)은 충분히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고, 수나라의 황태(皇泰)도 충분히 선왕들을 계승할 수 있었다. 유요소연, 염민, 부견도 모두 스스로 나라를 얻었다가 잃은 자들이다.

금나라 애종은 망국의 임금 중에서도 특별한 점이 있는 사람이며, 명나라 의종은 더욱 그러하니, 만일 태평한 세상을 만났다면 정치적 업적이 어찌 다만 중간 정도의 임금이 될 뿐이었겠는가.

청성잡기


3. 이막이 처형당한 이유


유선이 비록 무능력의 아이콘으로 유명할지언정, 사람됨 자체는 딱히 모난 데가 없어서 한평생 화도 잘 안 내고 유순한 성격이었다. 그랬던 위인이 이렇게까지 노발대발하며 강경하게 나갔다는 기록은 정말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막이 얼마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 유선에게 제갈량은 외정으로 항상 밖에 나돈 친아버지 유비보다도 후방에 머물면서 성장기 유선과 가장 많이 조우했을 사람 가운데 하나이며 국정에 바쁜 와중에도 손수 유선에게 책을 필사하면서 가르친 스승이었다. 유선에게 있어 제갈량은 또 하나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텐데 그런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모욕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다.
또한 이막의 행동은 인간적인 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충분했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 그를 숭배하는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겠다고 하자 유선이 이를 불허한 것을 볼 때, 제갈량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 및 총애와는 별도로 유선도 군주의 위엄을 위협할 수 있는 제갈량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을 어느 정도 견제할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이막은 이런 정상적인 신권 견제에 동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제갈량을 인격적으로 모독해 버리면서 유선의 의도를 한참 넘어버렸다. 게다가 이막의 행동은 달리 해석하면, 앞서 말한 유선의 제갈량에 대한 믿음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오히려 나라에 해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꼴이었다. 즉 유선 본인에 대한 모욕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따라서 유선으로선 도저히 이막을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또한 유선과 제갈량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도 제갈량이 당대에 대중들로부터 크게 존경받던 인물임은 확실한데 이런 인물이 사망한 것에 대해 잘 죽었다고 말하는걸 넘어간다면 제 3자 입장에서 보기에 적절하지가 않다. 이 정도 수준의 막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간다면 대소신료들에게 '어? 폐하께서 은근히 제갈량을 맘에 안들어하시긴 하셨나보네?' 라는 인상을 줄 수 있고, 괜히 넘겨짚은 신료들이 제갈량이 세워놓은 국가기본방침에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의견 충돌에 국력만 소비될 가능성도 있다. 이막의 처형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승상은 죽었어도 짐의 마음 안에 살아 있으니 괜히 태클걸지 마라. 승상의 방침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라는 정치적 제스처의 의미도 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유선 개인적인 입장이 어떻고 자시고 간에 일단 화를 내야할 필요가 있는데다가, 유선의 과거 행적에 대한 모욕의 의미이기도 하고, 유선에게 있어서 작은 아버지와 같은 진심으로 존경하던 존재가 모욕당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분노를 넘어 즉시 처형으로 이어지는게 이상할 것도 없다.
당시 촉한에서 반제갈량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유선은 제갈량을 싫어하거나 견제한 적도 없었으며 그 아들인 제갈첨에게 해코지를 한 적도 없었다. 제갈량이 죽자 유선이 삼일간 소복을 입고 애도했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신하가 죽었는데도 그런 애도를 한 유선에게 '제갈량 죽었으니 기뻐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건 오히려 유선을 욕하는 말이 된다.
또한 승상부가 조정을 장악했으니 유선이 눈치를 봤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제갈량만 하더라도 황권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는데 승상부가 조정을 장악한다는 것도 유선의 재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제갈량이 죽고 장완, 비의가 국정을 장악한다? 제갈량을 능가하는 권신들도 아니었는데 유선이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유선이 실은 제갈량을 내심 싫어했으며 소복을 입고 애도한 것이 연기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하나 이후 유선이 친정을 하면서도 제갈량 라인을 그대로 두고 숙청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갈량 라인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유선은 제갈량만큼은 정말로 믿었지만 수도에 사당을 짓는 것만은 '황제'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1] 중국 위키피디아에선 이막이 이조의 형으로 서술되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조, 이소, 요절한 동생의 형이 되는 셈이다.[2] 재밌게도 이막이 언급한 두 나라는 춘추시대 당시 이민족의 나라 취급을 받았다. 촉한은 후한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국가인데, 이막은 후한을 이민족의 나라였던 진, 초에 빗댄 것이다. 이러니 촉한의 재상이었던 제갈량이 그를 신임하지 않을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