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잡기

 

靑城雜記
1. 개요
2. 내용
2.1. 김자점
2.3. 일본 무협 소설
3. 작가


1. 개요


18세기 조선시대의 인물인 성대중의 저서.
원문 읽기(한국 고전 종합 DB)

2. 내용


잡기(잡다한 기록)라는 이름대로, 온갖 야사와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전 다섯권의 책으로, 그 내용에는 평범한 글들도 많지만 섞여있는 물건 중에 매우 흠좀무하고 비범한 이야기들이 좀 있다. 3권부터 진면목이 나타나는데, 전부 쓰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 중 몇 개 추리자면...

2.1. 김자점


김자점의 최후에 관한 야사가 이 책에 있다. 김자점이 능지처참을 시행하는 법을 건의했지만, 결국 자신도 그렇게 죽었다는 것.

심기원이 김자점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려 주벌될 때에 김자점이 수상으로 있었다. 이에 김자점은 심기원에게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이 역적은 상률로 단죄해서는 안 되니, 먼저 팔과 다리를 자른 뒤에 죽여 반역자들을 징계하소서."

심기원이 형을 받을 때에 집행하는 자가 먼저 그 다리를 자르려 하자, 심기원이 형틀에 엎드려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그러자 집행하는 자가 "김 상공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심기원은 탄식하며 말했다.[1]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김자점이 주벌될 때에 과연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후 이 법은 폐지되었다.


2.2. 가학증


홍인한(사도세자의 처삼촌,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라는 관리가 기생들을 학대하는 것을 즐긴다는 내용이 있다.

홍인한이 감사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미색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부질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 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2.3. 일본 무협 소설


삼랑전이란 일본 소설이 18세기 조선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쓰여있다. 문제는 정작 일본에 가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소설이 건너오기 훨씬 이전에 유행이 지나가버린 모양.

일본의 《삼랑전》 언해(諺解)[2]

가 우리나라에 유행하였는데, 삼랑(三郞)[3]의 뛰어난 무용과 원전(源𤩴)의 흉포하고 탐욕스러움과 월약(月藥)의 대단한 정절과 비곤(比琨)의 효성과 의로움이 사람들의 이목을 풍미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 내용을 외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 원전의 경우는 심지어 욕을 할 때 그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다. 삼랑은 금시(今市)[4]에서 죽었는데 강호(江戶)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우리나라 사신이 일광산(日光山)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에 금시에 들르곤 했는데, 남호곡(南壺谷)도 그를 동정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그곳 사람에게 물어보니 삼랑을 아는 자가 없었는데 하물며 금시를 알겠는가. 진자점(榛子店)에 쓰여 있다는 계문란(季文蘭)의 시를 우리나라 문인들은 모두 줄줄 외지만 정작 중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삼랑의 일과 비슷한 경우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할것도 없는 것이 홍길동전, 춘향전같은 한글 소설이 무수히 창작되었고,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 소설들도 많이 유입되어서 인기를 끌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일본 소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라 할수있다. 즉, 당대에는 색다른 무협소설로 여겨졌던것. 유입 경로는 아마도 왜관을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3. 작가


성대중은 영조, 정조 시대에 벼슬을 했던 인물로, 서얼 출신이지만 탕평책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패관 소품 문체를 비난하는 글로 정조에게 '순정한 문장'을 썼다고 칭찬받은 것. '패관소품'이란 일상생활을 기록한 글들로, 왕에게 있어서는 '시시한 인생들을 묘사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것을 비난했던 인물이 뒤로는 이러한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쓴 것. 성대중에 대한 기록이 적기 때문에 평소에 성향을 숨겼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완고했던 인물이 자료 조사를 하다가 패관문학에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물론 패관만 쓴 건 아니다. 성대중에겐 당대의 학문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학자로서 소명의식이 있었다. 성대중의 이러한 이중적인 부분을 2019년 4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5]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1] 아이러니하게도 심기원이 흥안군을 처형할 때 흥안군도 심기원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2] 한글로 번역된 것을 뜻한다.[3] 일본어로는 '사부로(さぶろう)'[4] 일본어로는 이마이치(いまいち)라고 읽는다. 닛코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으로, 현 닛코 시의 동남부이다.[5] 모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육예(六藝)에 해당하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