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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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진(秦)나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마지막 왕. 왕호로는 항왕(降王),[2] 진나라 황제 칭호를 포기하긴 했지만 후대인들이 삼세황제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2. 출신
사실 영자영은 기록상에 그 출생이 확실하지 않다. 《사기》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 따르면 호해(胡亥)의 형의 아들(즉 진 시황의 손자)이 되며, <이사 열전>(李斯列傳)에서는 진시황의 동생, 《사기》 <육국연표>(六國年表)에는 자영은 호해의 '형'이라는 기록과 동진(東晉)의 학자 서광#s-7(徐廣)은 진시황의 조카[3] 라는 설을 주장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흔히 소설 《초한지》의 영향으로 자살한 진 시황의 아들인 부소 황태자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부소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기록은 없다.#
확실한 것은 사기의 내용을 따르면 자영에게 함께 조고(趙高)를 죽일 모의를 꾸밀 수 있는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손자는 아닐 확률이 높다. 진 시황은 50세에 죽었고, 자영이 조고를 죽인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이기에, 아무리 일찍 자식을 낳았다고 해도 손자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호해의 형이라기에는 호해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형들을 죽였다는 기록과 실제 유골들이 있어 배다른 형이라는 설도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 대체로 견제 안 당할 정도의 진나라의 방계 황족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3. 생애
이세황제 호해가 몽염을 처형하려고 했을 때, 자영은 과거 조왕(趙王)이 이목을 처형하고, 조나라가 망한 고사를 들어서 반대했으나 호해는 듣지 않았다.
3.1. 왕위에 오르다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유방과 항우 등 반진 반란이 곳곳에서 터져나와 해결이 불가능해질 무렵, 승상 조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세황제 호해는 자살하고 만다. 조고가 본래 생각했던 것은 유방에게 진나라를 팔아먹는 것이었지만 조고가 못미더웠던 유방이 무시하고 계속 밀고들어왔기에 대신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시키려고 했다.[4] 헌데 자영은 즉위식 당일에 병이라고 칭하고 결석하여 거듭해서 사자의 설득을 거부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조고는 스스로 자영의 집으로 찾아와 침소에 들어와서 설득을 하려 했는데, 자영은 자신의 아들과 심복 부하들을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자영은 역적 조고를 살해하고, 그 일족도 모두 제거한 뒤에야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천하는 이미 각지의 군벌이 차지하고 있어 진나라의 영토는 함곡관 서쪽으로 축소된 상태였으므로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진왕(秦王)으로 낮추었다. 다만 자영이 스스로 진왕을 자처했는지, 후의 역사가들이 낮추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5]
3.2. 진나라의 멸망
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간신 조고를 죽인 정도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미 유방의 군대는 함양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자영은 장수들에게 몇 차례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자영의 자질이 엄청나게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옆에 제대로 된 보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장량의 계략 등에 농락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자영은 장례식을 상징하는 백마가 끄는 흰 마차, 흰 소복을 입고 목에는 전국옥새를 걸고서 유방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즉위한 지 45일 만이었다. 중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진시황 영정의 후예가 집에서 갈굼받던 촌동네 백수 건달이었던 유방에게 항복을 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자영과 그 일족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뒤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시황이 각국을 멸망시킨 죄 등을 물어서 진왕 자영과 일족을 처형시켰으며 자영의 죽음으로 진나라 황족의 대는 완전히 멸족당한다.
이런 자비없는 대처로 인해 민심은 항우에서 유방으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전국시대 진나라 영역이던 관중 및 서천 지역은 유방을 지지하게 되었는데, 진나라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옛 진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왕을 죽이고 수백 년간 이어진 진나라를 결딴낸 자를 따르고 싶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수많은 진나라 포로들을 생매장시킨 신안대학살을 저질렀으니 그 포로들의 동향이고 가족이었을 진나라 사람들은 유방의 든든한 후방 보급처가 되어주었고 이때부터 항우는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한다.[6]
4. 대중매체에서
보통 초한지의 영향으로 진시황의 장남 부소의 아들로 등장한다. 나라를 망쳐오던 간신 조고를 죽이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망한 거나 다름 없는 상태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비운의 왕으로 등장하며, 항우가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방에게 항복한 것에 대한 질투심, 진나라에 대한 증오 등 감정적인 이유로 자영을 죽였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
영화 초한지 : 영웅의 부활(2013)에서는 유방에게 항복 후 항우가 와서 자신을 죽일 것을 다 예상을 하였다. 그래서 유방을 호적이 기록된 기록실로 데려가서 유방의 족보를 보여준다. 그의 의도는 유방으로 하여금 항우를 대항하게 만들게 하려고, 아무런 욕심이 없던 유방에게 황제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 항우에게 심하게 고문을 당한 후 요참형을 당하고 사망. 그런데 위에 언급되었듯이 자영은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으니 왕이 되었을 때 최소한 중년에 가까웠을 텐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 어리게 나온다.
초한전기에서는 조고의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정신 병자 연기를 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호해가 자영을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자영은 끝까지 바보연기를 했다. 조고는 치밀하고 간교한 인물이었지만, 자영의 바보 연기에 완전히 속아넘어가 방심을 하였고, 이 틈을 노려 자영은 조고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을 부흥시키기에는 때가 늦었고, 결국 진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유방에게 투항하고 유방이 떠난 뒤 항우가 함양에 입성하자 딸에게 작별을 고한 후 항우에게 자결을 권유받아 자결한다.[7]
5. 둘러보기(계보)
[1]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경우는 진시황의 아들이거나 조카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진다.[2] 항복한 왕이란 뜻으로 사기 고조본기(史記 高祖本紀)의 기록.[3] 진 시황의 동생 영성교(嬴成蟜)의 아들.[4] 고조본기와 한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사 열전에선 지진에 지레 겁을 먹어서(...)라는 더 찌질한 일화로 나온다.[5] 후대의 군주인 모용성이 그랬던 것처럼 영자영도 스스로 지위를 낮추고 형식상으로만 진왕의 직위를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을 수도 있다.[6] 장한 군에는 진나라 병사뿐만 아니라 반란 진압 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참전한 구육국 출신 노무자들도 상당히 있었다.[7] 자영의 딸은 이후 궁을 떠나고 어느 헛간에서 쓰러졌다가 우미인에게 발견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우미인과 친해졌다가 항우의 권유로 영포의 아내가 돼버렸지만, 이후 영포를 떠나 항우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자신을 죽일 기회를 준 항우를 죽이진 못하고 대담을 나누는데, 이때 나눈 대담이 자영에게 항우가 물은 질문인 '진시황은 어떤 인물이며 자신(항우)는 어떤 인물인가'였다. 자영과 자영의 딸 모두 진시황은 영웅이며, 항우에 대해선 후에 평가를 받을 것이란 말을 남긴다. 이후 항우는 그녀를 그냥 보내줌으로서 극중에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