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문
1. 개요
'''이서문'''(李書文, 1862~1934)은 중화민국 허베이 성 창저우시 옌산현 출신의 무술가로 자는 동신(同臣). 팔극권의 달인으로서 이씨팔극권 혹은 무단팔극권의 개조다. 관련 글
2. 설명
전설적 권사이자 창술가. 팔극권을 중국 전역에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창술이 뛰어나 '신창(神槍) 이서문'이라고 불렸다. 팔극권은 권법뿐만 아니라 창술로도 유명하다.
허베이성 창저우 사람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궁핍한 생활로, 어렸을 때 극단에 들어갔으나 다리를 다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후 무술을 즐겨 처음에는 소림권(少林拳)을 배우다가 나중에 팔극권을 익혔고 벽괘장 또한 배웠다. 어려서부터 밤낮없이 무술에 몰두하였고, 게다가 재능까지 겸비했던 만큼 실력은 일취월장하였으나 대련에서 상대방을 용서 없이 몰아붙이고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이맹자(李狠子, 사납고 비뚤어진 녀석)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키가 작고 야위었음에도 엄청난 괴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연경(燕京) 제일의 장사로 소문난 사람이 힘겨루기를 청하였는데, 이서문은 세 척(약 90 cm)짜리 철봉을 석벽에 꽃아넣고서 "이걸 뽑아보게." 하였다. 장사는 반나절이나 철봉과 씨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철봉을 뽑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철두왕(鐵頭王)'으로 불릴 정도로 머리가 단단한 무술가에게 '당신이 먼저 나를 힘껏 세 번 때리고, 그 후에 내가 한 번만 때리는 승부를 하자.'고 했다. 상대가 승락하고는 온 힘을 다하여 세 번을 때렸으나 이서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서문이 철두왕의 머리를 내리치자, '''그의 머리가 몸에 박혀 그대로 죽었다'''. 이는 이씨팔극권의 제자인 쉬지아푸(許家福)의 문하생이었던 장종시(張忠世)가 증언한 내용이다.
또 북경에서는 결투에 임하여 견제타 한 방에 그대로 상대방을 죽여버리고 도망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유운초(劉雲樵) 대사의 증언이다.
다만 이런 증언들은 신빙성이 없고 중국무술 특성상 어느 정도 신격화는 감안해야 한다.
이서문의 창술 중 유명하면서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술이 점창술이다. 중단 자세로 상대의 가슴이나 목을 겨누다 찌르는데, 상대는 당연히 가슴이나 얼굴을 방어하지만 실제로는 손을 비틀면서 창 끝을 아래로 하여 찌른다! 찌를 때 손은 가슴이나 얼굴에 있지만 창 끝은 배나 사타구니에 간다. 물론 반대로 아래쪽을 노리는 척 하다가 상단을 쑤시는 것도 가능.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뛰어난 기술이라 막기가 매우 힘들다.
3. 힘을 주체할 수가 없다!
엄청나게 강한 인물이긴 했지만 결투에서 대전상대를 너무 많이 죽여서 원한을 많이 샀고, 그 때문인지 독살당해서 죽었다는 야사가 있다.[1] 또는, 병을 얻었음에도 단련을 계속하다가 병이 깊어져, 의자에 앉은 채로 죽었다고도 한다. 까들은 이서문 정도 고수라면 결투라도 상대를 죽이지는 않고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많이 사람을 죽였다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까곤 한다. 물론 빠들은 이서문의 권은 일격필살이라 적당히 봐주거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이서문이 주체할 수 없는 일격필살권을 휘둘렀다는 말은 '''전부《권법소년》의 과장이다'''. 상대방을 일격에 제압할 정도로 강력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힘을 주체하지 못해 죽일 정도까진 아니였다. 다만 상대방을 무술을 못할 만큼 불구로 만들어버릴 뿐. 이것만으로도 원한을 사기엔 충분하다(…).
일례로 철곤을 수련한 어느 무술가와 무기술로 경합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서문은 몇 합만에 상대의 손가락을 베어버려 승리했다. 자신의 실력을 컨트롤할 정도는 되었다. 물론 상대 무술가는 다시는 철곤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이서문이 전하는 이야기처럼 실제로 사람을 죽였을 가능성은 적다. 만약 살인을 했다면 아무리 당시가 혼란스런 시대였어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례로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음에도 3년간 투옥된 곽운심을 생각해보자.
4. 기타
당시에 육합대창을 잘쓰며 신창이라 불리던 이모씨가 북경에서 통배권의 달인 장책과 창술 대결을 벌여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2] 그리고 그 이모씨를 이긴 장책을 손록당이 이겼고... 이것은 손록당이 창시한 손파태극권 쪽 기록이라 객관성이 떨어진다.
이서문의 일대기는 절대 중국 및 홍콩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외국인에 맞선 것도 아니고[3]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로 싸움을 한 그의 일대기는 딱히 감동과 교훈을 넣을 수 없는 데다 애초에 상대방을 불구로 만들어 놓고 '내 알 바 아니다.' 하는 태도를 취하는 주인공이 중화영웅으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애초에 삼합회 소재 피카레스크물에서도 의와 협을 중시하는 게 중국이다. 민족의 자존심을 세웠거나 의로운 이로 존경받던 인물을 높게 평가하는 중국에서는 사실 인지도도 낮은 편이지만 오히려 대신 물 건너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데, 이는 찬바라의 인기가 높은 일본의 구미에 상당히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5. 제자
이서문의 제자 중 가장 대표적인 제자는 개산제자이자 곽씨팔극권의 개조이기도 한 곽전각(霍殿閣). 곽전각은 만주국이 세워지자 스승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춘으로 가서 선통제의 황궁 호위군에서 팔극권을 보급했지만, 일본인과의 충돌이 잦던 중 관동군의 시비로 벌어진 사건에서 호위군 20명이 무술만으로 관동군 200명을 쫒아내는 '호군사건' 뒤로 항일혐의를 받아 파면, 한을 품고 1942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무단팔극권의 유운초는 이서문이 말년에 거둔 마지막 제자로 만화 권아에 등장하는 고 켄지의 스승인 유월협은 바로 이 사람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6. 대중문화 속의 이서문
6.1. 만화 《권법소년》
소년 선데이에서 연재했던 일본 만화. 사실상 '''팔극권과 이서문의 존재를 서브컬쳐계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마이너 무술이던 팔극권이 일본 서브컬쳐계에 소개되었기 때문. 이서문은 주인공 고 켄지가 구사하는 팔극권 계열의 사조로[4] ,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이지만 그 일화가 종종 언급된다. 단행본 최종권은 한 권이 통째로 이서문의 일대기로, 주먹질로 '''사람 여럿 때려잡은''' 일화들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국내에서는 90년대 아이큐 점프의 별책부록으로 연재되었으며, pc통신을 통해 중국 무술에 관심이 있는 층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중국 무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당시 점프 독자였다면 이서문의 강렬한 인상 정도는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
6.2. 만화 《바키》
- 용서문 항목 참조
6.3. 게임 《에어가이츠》
이서문이 자신의 권에 희생된 이의 가족에 의해 독살당해 죽었다가, 현대에 다시 부활했다는 설정. 하지만 몸이 점점 젊어져서 이대로는 소멸될 것이 뻔하기에 완전한 부활을 위해 에어가이츠를 노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