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득(1775)

 

'''은언궁의 역대 종주'''
1대
은언군[1]

'''2대
이성득
'''[2]

3대
익평군 이희
李成得.
생몰기간: 1775년 ~ 1817년 11월 27일.
조선 후기의 왕족, 평민.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생모는 미상이다.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자 풍계군 이당, 전계대원군 이쾌득(이광)의 이복 형이다.
은언군의 정실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 소생 아들 이창순과 이창덕[3]은 모두 일찍 죽었고 상계군 이담도 홍국영의 입양 사건으로 탄핵받다가 의문의 독살을 당했으므로 1812년(순조 12) 당시 강화도에 유배된 이철득, 이당, 이쾌득 등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다.
이쾌득전계대원군 이광으로 밝혀졌지만 1780년생 이철득은 1783년생인 풍계군과 출생년대가 맞지 않아 동일 인물로 보기 힘들다. 이철득이 성득의 동복 동생인지 이쾌득의 일찍 죽은 친형인지도 불분명하다.
상계군 이담 사건과 관련되어 일가족이 강화도로 유배갈 때 따라 유배되었다. 간간히 보이는 기록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것은 미상이다.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에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말소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발과 한쪽 팔이 마비되었다는데 제때 진료를 받지 못했다.
1817년 11월 27일 강화부 관아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과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버려서 그가 어떤 이유로 관아에서 고문을 받았는지는 알수 없다. 당시 43세였고 그는 미혼이었다.

1. 기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순조이당, 이철득, 이쾌득 등 그의 동생들의 석방을 고민하다가 1820년1822년 일시적으로 풀어주었다.[4] 제일 늦게 석방된 인물은 이쾌득으로 1830년 석방되었다.

그가 은언군의 봉사손으로 정식 추대되지는 않았지만 은언군의 살아남은 자녀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고 당연히 제사에 대한 권리는 조선시대 당시 법률상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철종 즉위 후 철종이 은언군 가문 사람들에게 시호군호, 품계를 추증했지만 이성득은 제외당했고 봉사손도 지명받지 못했다. 그래서 은언군가의 후계는 이복형 상계군의 양자인 익평군이 이었고 이성득은 은언군가의 사손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 원래는 이복형 상계군이 아버지 은언군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2] 상계군 사후 은언군의 서자들 중에 최연장자였고 1812년까지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가 연장자였다. 당연히 제사도 그가 받들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서자에다가, 42세에 미혼으로 사망한 탓에 철종 즉위 후 군호를 받지 못했다.[3] 그의 이복 형들이다.[4] 그리고 그때 관례를 치루고 성인식을 했으며, 이당은 첩을 두고 서자를, 이쾌득은 이해동으로 바꿨다가 이광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가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