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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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3남이자 서장자인 은언군의 장남으로 조선 철종의 큰아버지이다.
2. 생애
1769년(영조 45년) 1월 21일 한성부에서 은언군과 상산군부인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첫 증손자이기도 했다. 종친부의 규칙에 의하면 왕세자의 손자, 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 작위 및 도정의 작위를 받아야 했으나 이담이 따로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종친으로 지냈으나 11살이던 1779년(정조 3년)에 '''정계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바로 정조 초기의 권신 홍국영이 상계군을 자신의 누이 동생이자 정조의 후궁으로 얼마 전에 죽은 원빈 홍씨의 사후 양자로 삼게 하고 군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정한 것.''' 참고로 '완풍군' 군호는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가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한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9]
이 일은 그냥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런데 '''그런 권신의 여동생이 중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 균형으로 보자면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힘이 한 쪽으로 쏠렸다는 것.'''
더구나 홍국영의 누이 원빈은 후궁 신분인데도 생전에 마치 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고,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10][11] , 후궁으로서는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했다. 게다가 원빈이 일찍 사망한 후에는 정조가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을 반대하며, 굳이 정조의 조카 상계군을 정조와 원빈의 양자로 들여서 왕위계승권자로 삼으려 했다. 아예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 당시 정조의 나이는 28세라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자녀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
단, 아이러니한 점은 홍국영은 (완풍군이 원빈의 양자이니)자신의 조카라며 아꼈으나, 정작 완풍군은 홍국영과 마음이 안맞아 그를 안좋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결국 무리수를 두던 홍국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을 잃었다. 완풍군 역시 파양당해 '상계군(常溪君)'으로 군호가 바뀌었고, 이 때 이름도 이담으로 고쳤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한 때 원빈의 양자이자 홍국영의 양조카였던 전적 때문에 조정 대신들과 다른 왕족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인지 통덕랑 신오의 딸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올린 지 몇 달 되지 않은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불과 18살의 나이로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은언군의 독살 설이 있다. 상계군이 사망하기 불과 2달 전,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12] 가 임신 중 사망했는데 이 때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복중 태아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는 설이 나돌았고, 이에 역적으로 몰려 온 집안이 망할 것을 우려한 은언군이 상계군에게 독을 먹으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3. 사후
3.1. 죽어서도 편히 눈 감지 못하고
그러나 상계군과 관련된 사건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상계군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인 송낙휴가 상복을 입은 채로 궁궐로 가서 고변했다. 내용은 "상계군은 파양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김 정승(영의정 김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급사했다."였다. 또한 송낙휴는 영조와 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이 상계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란 말도 했다. 구선복은 체포당해 심문을 버티다가 결국 반역을 꾀해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련자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고 상계군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 역시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갔다.[13]
그러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나섰다. 이미 오래 전 일인 1779년(정조 3년)에 상계군이 홍국영의 힘으로 완풍군 군호를 받고 왕위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해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그에 관한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를 승정원에 내린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상계군의 작위를 즉시 폐작시켜 '''"역적 담"'''으로만 부르게 했고, 역적의 가족이 된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갔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 일을 말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했다.
3.2. 복권과 묘소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이복 조카인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했다. 이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상계군 부부를 복권시켰고, 같은 해 6월 23일에 가덕대부(嘉德大夫)로 복작시켰다. 1858년(철종 9년) 11월에는 철종이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승급시켰으며 그 때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을 대거 세초, 말소시켰다.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의 2호선 신촌역 2번,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 근처 즈음에 있었다가 1854년(철종 5년) 2월 1일에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위치를 잊어 어디있는지 모른다.
4. 사극에서 상계군을 연기한 배우
5. 가족과 후손
친어머니 상산군부인 송씨와 아내 군부인 신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1801년(순조 1년)에 천주교 믿는 것을 들켜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고, 아버지 은언군도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이름 없는 첩과의 사이에서 역시 이름 없는(...) 아들을 얻었으나 일찍 죽었다. 뒤를 이을 후손이 없어 동생 풍계군 이당의 아들 익평군 이희가 사후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었다. 이후의 계보는 익평군(1824) 항목 참조.
[1]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2] 상계군 사후 은언군의 서자들 중에 최연장자였고 1812년까지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가 연장자였다. 당연히 제사도 그가 받들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서자에다가, 42세에 미혼으로 사망한 탓에 철종 즉위 후 군호를 받지 못했다.[3] 군호는 친어머니의 본관 충청북도 진천군의 별칭인 '상산(常山)'에서 따왔다.[4] 1900년(광무 4년)에 편찬한 《선원속보》에서는 이름이 감(㻣)으로 나와 있다.[5] 그의 서형제(庶兄弟)인 풍계군 이당이나 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름들을 보면 전부 구슬옥 변이 있다.[6] 서형제의 이름에 있는 구슬옥 변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선(李璿)이 나온다.[7] 서형제의 이름에 있는 구슬옥 변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제(李瑅)가 나오는데, 흥안군의 이름하고 똑같다.[8]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9] 애초에 원빈의' 원(元)'도 '으뜸 원' 자라서, 본부인인 중전이 있는데 어떻게 후궁 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느냐며 논란이 되었다. 당시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10] 본래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차기 국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 3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원빈이 원호를 받는 것은 당시 예법에 어긋난다.[11] 홍국영 몰락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 저 원호와 궁호를 강등시켰다.[12] 《이산》에서 한지민이 연기했다.[13] 능성 구씨는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무손을 많이 배출한 무반의 명문이었는데 이 일로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14] 2000년 생 배우. 2005년 KBS 《사랑은 리필이 되나요》로 데뷔하여 《계백》, 《인수대비》, 《신의》, 《비밀의 문》 등 사극에 많이 출연했다. tvN 《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서준 역을, OCN 《터널》에서 윤동우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