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언군

 


'''은언궁의 역대 종주'''
은언군가 역사 시작

'''1대
은언군 이인
'''

[1]
2대 이성득[2][3]
'''조선 장조의 왕자'''
'''은언군
恩彦君'''

'''군호'''
은언군(恩彦君)[4]
'''시호'''
충정(忠貞)
'''본관'''
전주(全州)
'''이름'''
인(䄄)
'''부왕'''
조선 장조
'''생모'''
숙빈 임씨(肅嬪 林氏)
'''부인'''
상산군부인 진천 송씨(鎭川 宋氏)
'''자녀'''
8남 1녀
'''묘소'''
실전
'''생몰
기간
'''
'''음력'''
1754년 ~ 1801년 5월 29일#
'''양력'''
1754년 ~ 1801년 7월 9일
1. 소개
2. 생애
2.1. 출생
2.2. 왕자군 책봉
2.3. 역적의 아비로 지목되다
2.3.1. 유일한 형제
2.4. 죽음
3. 사후
4.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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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 정조의 이복 동생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산 왕족'''
조선의 왕족으로, 이름은 인(裀). 사도세자의 3남이자 서장자로 정조의 이복 동생이다.
일찍이 영조 말엽에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유배를 갔다가, 훗날 홍국영 일당의 잔당들의 반란에 그의 아들 상계군이 휘말리면서 역적의 아비라는 점때문에 끊임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구박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들들이 역모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등 일생 대부분을 불행하게 보냈다. 심지어 아내와 며느리마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물론 은언군 본인도 역적의 아비라고 신료들에게 탄핵당해 유배를 갔으며, 가족의 얼굴조차 못 보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의 동생들 사이에서는 물론, 조선 왕조 역사상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불행한 인생을 보낸 왕자는 몇 없다.

2. 생애



2.1. 출생


1754년 사도세자와 궁녀 임씨(훗날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도세자는 은언군이 자신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영조에게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심지어 임씨를 낙태시키려 했고 보다 못한 '''세자의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임씨가 불쌍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라는 게 '너는 여자가 되어 가지고 투기도 안 하느냐?', '네가 남편(사도세자)의 편을 들면서 불충까지 저지르고 있다' 따위였다(...)[5][6]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천출 왕손을 본 것을 영조는 굉장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은전군을 얻어 더욱 더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사실 영조는 혜경궁 소생의 적손주들에 비해 후궁 소생인 서손주들을 비교적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7]

2.2. 왕자군 책봉


아버지 사도세자임오화변 때 사망한후 출궁되어 자라다가 10살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3년 후 송낙휴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항렬상 외조부인 홍봉한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았는데 김귀주한테 이를 탄핵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순회세자의 집이었던 용동궁을 사저로 하사받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1771년 외람되게 근수[8]를 많이 거느리고 남여를 타고 다닌다 하여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말았고, 나중에는 동복 동생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된다.[9] 그 곳에서 은신군이 죽자 그 덕에(?) 유배간 지 3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서 한성으로 돌아와 한동안 학문에 주력하면서 살았다.
이복형 정조가 즉위했을때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복직했고 종친에게 주어지는 최고 품계인 홍록대부(興祿大夫)에 오르며 나중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도 오른다. 이때 은언군은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챙기고 생일날 벌어지는 잔치를 주관하기도 했다. 다만 은언군은 그의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파는 물의를 일으켰고 대신들이 이를 탄핵했으나 정조의 비호로 무사했다.

2.3. 역적의 아비로 지목되다


그러나 당시 실세로 군림하던 홍국영이 은언군의 장남 이담을 이용하려고 하면서 이때부터 은언군은 위기에 처한다. 홍국영은 정조후궁이 된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상계군 이담을 그녀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10]에 봉하고 대통을 잇게끔 하려 했다. 은언군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나중에는 홍국영의 부탁과 설득에 넘어가 승낙한다.
그런데 이는 미친 짓이었다. 정조가 병약하고 나이도 많으면 또 모르겠는데 아직 젊고 건강한 정조에게 "다 됐으니 너 애 낳지 말고 내가 지정해 준 애나 양자 삼아서 후계자 삼아라. 그래야 내가 내 양조카 덕을 보면서 권세를 누리지."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러니 이는 홍국영 실각에 결정타가 되었고, 이에 관련된 상계군과 은언군 모두 파면되고 작위를 몰수당하여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가 상계군이 한 각종 불온한 말을 고해 바치면서 대형 옥사로 번졌고, 상계군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면서 상계군이 유배지에서 자살하자 사태가 커지게 된다.[11] 이때 정순왕후 김씨가 연일 대신들과 함께[12] 은언군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에 정조는 증거가 불충분한데다 혈육을 죽일수 없다고 강력히 거부했으나 정순왕후와 대신들이 굽히지 않자 단식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순왕후도 단식을 하며 버텼고 이와중에 훈련대장 구선복 등이 홍국영과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꾀했음이 드러나서 사건은 더 커졌다. 하지만 왕의 단식에 굴복한 대신들은 이인의 사형을 감해 제주도로 유배보내자고 했다가 정조가 크게 화를 내며 거부하자 할 수 없이 진도로 유배보내기로 했는데, 정조는 은근슬쩍 진도를 강화도로 바꾸어버렸다. 유배지가 멀면 멀수록 벌이 엄중하므로 이는 벌을 매우 경감시켜준 것이었고, 신하들은 반발했으나 정조는 이를 씹었다.
그 후 은언군은 끊임없이 노론과 정순왕후에게 역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세가 된다. 특히 노론은 은언군이 귀양간 뒤에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사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정조의 비호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2.3.1. 유일한 형제


정조는 수시로 동생 이인을 유배지에서 몰래 불러내어 만나는 쇼를 벌였고, 심환지가 "어찌 병가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하십니까?"라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벌여가며 만났다.[13]
그때마다 노론, 소론, 남인들까지[14] 정순왕후와 함께 이를 크게 규탄했지만, 정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민심이 (이유야 어쨌건) 절절한 우애를 보이는 정조에게 쏠리면서, 처음에는 "사저에 나가서 살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던 정순왕후도 의례적인 반대에 그치게 되었다.
사실 형제간의 우애도 우애이지만, 당시 은언군은 정조를 제외하면 사도세자의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자식이었으므로 이런 정조의 행동은 곧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홍보하기 위한 정치적 쇼의 성격도 있었다. 사실 단순히 은언군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면, 오히려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납득할 만한 곳(즉,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은언군을 유배시키고 조용히 편하게 살도록 하는 게 더 나았다. 정조로선 굳이 이인의 존재감을 키우는 부작용을 감수해서라도 할 일이었다는 뜻이다.
정순왕후가 한 발 물러선 이유도 민심도 민심이지만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효성'은 대단히 강력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민심이 정조에게 쏠린 다른 이유도 '전하께서 이복 형제를 저토록 아끼시니 참으로 효성스러운 분이다'라는 분위기로 흘러간 것. 정순왕후가 정조의 할머니이니 "아비에 대한 효만 하고 할미에 대한 효는 안 하시렵니까? 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정순왕후가 친할머니라고 해도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니니, 사도세자가 정순왕후보단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이는 은언군 이인의 존재를 정계에 강력히 각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게다가 유배생활을 못 견딘 은언군이 그의 서자 이철득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다가 붙잡혀서 다시 안치되어 은언군의 위치가 더욱 위험해진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은언군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했으나 정조가 거부하면서 은언군은 무사한다. 정조는 이후로도 은언군을 석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때마다 정순왕후와 노론의 강력한 반대로 모두 실패하고 만다.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11살의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신유박해를 정순왕후의 반동 정치로 해석하는 움직임이 강하지만, 정조가 "정학을 바로 펴면 사학은 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큰소리친 것이 천주교의 지속적인 교세 확대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완전히 몽상에 불과했던 것으로 밝혀진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칼을 뽑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 자체가 빼도 박도 못할 반역죄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신유박해 문서 참조.
이 과정에서 양제궁의 어느 궁녀가 밀고하여 은언군의 아내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천주교 신자라는 게 밝혀졌다.[15]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가 사약을 받고 순교하자, 은언군은 서자 이철득과 함께 가시덤불 장벽 사이에 거적을 들이밀어 틈을 만들어 유배지를 탈출했다.[16]

2.4. 죽음


하지만 얼마 도망가지 않아서 붙잡히고, 이 일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1801년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의 아들들 중 이당과 서자 이쾌득(이광)은 몇번의 위기를 넘긴 뒤 용케 살아남고 순조헌종의 비호 아래에 석방되어 관례도 올리고 장가도 들게 됐다.
첩 전산군부인 이씨에게서 얻은 아홉째 아들이자 서자[17]인 이광은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첫째 이원경은 헌종 시기에 민진용 일당의 역모에 휘말려 죽었으나 서자들인 둘째 이욱과 셋째 이원범은 살아남았다. 훗날 헌종이 후사없이 죽으면서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한다. 철종 즉위 이후에 이광은 전계군의 군호를 받고, 전계대원군에 추증된다.

3. 사후


그 후 손자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었으며, 순조비의 명으로 그와 상계군에 관한 기록을 대량으로 세초[18]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 때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후손


후손 중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그 후손을 적지 않고 본인까지만 적었다. 왕실의 족보인 선원속보(자손록)에 기록된 인물은 진하게 처리하였다.
  • 처: 상산군부인 송 마리아 (1753~1801)
    1. 상계군 이담 (1769~1786)
    2. 이창순 (?~?): 조졸
    3. 이창덕 (?~?): 조졸
    4. [19]: 은전군에게 입적됨
    5. (1796~1872): 한각신(1795~1853)에게 하가
  • 첩: 불명 (?~1821)
    1. 이성득 (1775~1817)
    2. 이철득 (1780~?)[20]
  • 첩: 전산군부인 이씨 (1764~1819)
    1. 조졸
    2. 전계대원군 이광 (1785~1841)

[1]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2] 상계군 사후 은언군의 서자들 중에 최연장자였고 1812년까지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가 연장자였다. 당연히 제사도 그가 받들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서자에다가, 42세에 미혼으로 사망한 탓에 철종 즉위 후 군호를 받지 못했다.[3] 은언군의 살아남은 아들들 중 연장자. 사실상의 가계 계승자[4] 군호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인 은진(恩津)에서 유래했다.[5] 참고로 이건 혜경궁이 평생에 걸쳐 영조에게 '''딱 한 번 꾸지람을 들은 일이라고 한다.'''[6] 헌데 사실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투기가 심한 것도 문제로 여겼지만 투기를 안 하는 것도 문제로 여겼다. 성종이 폐비 윤씨를 폐하려고 할 때(1차 시도) 임사홍이 옛 부인들 중 투기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설득한 것을 보면, 투기는 악덕이 맞지만 어느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았고 때문에 오히려 아예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본 듯하다.[7] 서손주들의 생모들이 하나같이 다 양반가 규수 출신인 간택 후궁 소생이였으면 모를까 신분이 미천했던 궁녀 출신이였기 때문이다.[8] 관원의 시중을 드는 노비[9] 진짜 이유는 빚을 졌는데 갚지 않았던 이유이다. 은신군의 보모인 황덕혜의 남동생 황경룡이 내시들과 결탁해 시전 상인들의 재물을 탈취한 죄목이 고발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냥의 빚을 지었는데 갚지 않았던 것이 들통났다. 나중에 영조가 이를 알게 되어 그의 분노를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10]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며, 뒷날 상계군으로 도로 고친다.[11] 게다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가 요절하고 후궁 의빈 성씨가 출산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사산하고 사망하자 이를 노론에서 은언군의 책임으로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면서 은언군의 입지가 더욱 위태로워졌다.[12] 특히 노론은 물론 정조의 지지세력이었던 남인까지 은언군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한 상황이었다.[13] 겨울밤에 미행을 나가 썰매를 타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만나기까지 했으니...[14] 왕이 뭐라던 간에 어쨋든 은언군은 역적의 아비니 정조 덕에 명함 내밀게 된 남인들까지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15]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다. 주 신부는 신유박해순교했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문서를 참조.[16] 당시 강화도에는 이철득 외에도 이성득, 이당, 이쾌득 등 다른 아들들도 있었다.[17] 소실인 전산군부인 이씨에게는 둘째 아들.[18] 사초(실록을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기록들)를 없애는 것으로 세탁을 하여 먹물만 지우고 다시 사용했다.[19] 일부 족보에는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20] 1817년까지는 생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