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누동궁의 역대 종주'''
전계대원군가 역사 시작[1]

'''1대
전계대원군 이광
'''

2대
영평군 이경응
'''조선 장조의 손자 | 조선 철종의 생부'''
'''全溪大院君 | 전계대원군'''
'''시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출생'''
1785년 4월 29일
'''사망'''
1841년 12월 14일 (향년 56세)
'''성씨'''
이(李)
'''이름'''
광(㼅)
'''초명'''
이쾌득(李快得)[2], 이해동(李海東)
'''부모'''
부친 은언군, 모친 전산군부인 이씨
'''부인'''
완양부대부인 최씨(完陽府大夫人 崔氏)
[3]
1. 개요
2. 사망과 이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은언군의 서6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친아버지이다.
은언군과 그의 첩인 이덕희의 딸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산군부인 소생 첫 아들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이 전계대원군이다.[4] 조선시대에는 동성동본 간 결혼이 금기시되었는데, 아버지 은언군은 같은 전주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1819년 6월 4일 그의 생모 전산군부인 이씨가 강화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819년 6월 5일[5]과 6월 7일[6]에 쾌득 생모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서 쾌득이 전계대원군의 30대 중반까지 쓰던 이름이란 게 밝혀진 셈. 이쯤되면 초명이라 보기도 힘들다.
1779년 아버지 은언군과 큰형 상계군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강화 교동도로 귀양갈 때 이광도 같이 유배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족으로 기본적인 품위는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1801년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30년 넘게 강화도에서 빈농(貧農)으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있는 동안 본처 외에 첩을 2명이나 두고 차남 이욱을 둘 정도였으면 그렇게 빈곤한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 초부터 경제적 상황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그의 장남이 1827년 9월생, 차남이 1828년 7월생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어 다급해진 4촌 형 순조에 의해 방면되어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다시 정착해서 1831년에는 3남 이원범을 얻고, 자식들을 키우다 1841년 사망했다.

2. 사망과 이후


사후에는 1844년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장남 이원경이 휘말려서 죽고 나머지 아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3남 이원범이 철종이 되자 원래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라서 군호를 받지 못했는데, 아들인 철종이 아버지에게 ''''전계군(全溪君)''''이라는 군호를 주고[7] 왕의 친부가 받는 '대원군'으로 봉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덧붙여 철종을 포함한 철종의 형제들도 철종이 즉위한 후에 군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8]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선단초등학교와 성당 근처에 묘가 있다. 전계대원군은 일단 은언군의 묘가 있던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자락[9]에 처음 본부인과 함께 합장되었고, 뒤에 철종 즉위 후 포천으로 이장된 것이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홍제동인 양주군 홍제원 답동리에 있던 염씨 묘소는 전계대원군과 본처 최씨 묘소 아래에 있다. 근처에 아들 회평군 이명, 영평군 이경응, 양증손자 풍선군 이한용 등의 묘소가 전계대원군의 묘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3. 기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에는 이쾌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이성득은 후에 잊혀졌고 선원보략에도 누락됐다가, 1970년대에 사서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철종, 고종 때 미처 인멸하지 못한 자료가 있어서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이쾌득과 함께 등장하는 이철득이 이성득의 친동생인지, 김포시 통진면 전산군부인 이씨 묘비문, 김문근이 쓴 비문 내용에 등장하는 전산군부인 이씨가 낳은 일찍 죽은 첫 아들인지는 불분명하다.

[1] 사실 직접 도정궁운현궁에서 살았던 덕흥대원군흥선대원군과는 달리 전계대원군은 누동궁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 철종이 왕이 되고 옛 집터 부근에 친아버지의 종가로 지은 것. 단 전계대원군을 모시는 종가이기 때문에 종주는 전계대원군부터 계산한다.[2]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에는 쾌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단 철득은 풍계군과 동일인으로 추정되었으나 생년이 철득은 쾌득보다 5년 연상이고, 풍계군은 선원보략에 1783년생이라 하여 서로 다르다.[3] 철종의 생모로,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이었다. 철종 즉위 후 임금의 생모라서 부대부인 작호를 받은 것 뿐이다.[4] 경기도 통진군 양촌면 마송리 산 13-48(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에 있는 전산군부인 묘비문에 나타나 있다.[5] #[6] #[7] 군호는 어머니 이씨의 본관 ''''전'''주('''全'''州)'에 들 군호의 돌림 '계(溪)'를 따서 지었다.[8] 역모에 몰려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懷平君)', 이욱은 '영평군(永平君)'의 군호를 받았다.[9] 현 은평메디텍고등학교 뒷산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