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평군

 

'''은언궁의 역대 종주'''
2대
이성득[1][2][3]

'''3대
익평군 이희
'''

4대
덕안군 이재덕

'''조선 장조의 증손 | 은언궁 2대 사손'''
'''익평군
益平君'''

'''군호'''
익평군(益平君)[4]
'''시호'''
효희(孝僖)
'''본관'''
전주(全州)
'''이름'''
희(曦)
''''''
이수(而由+文, 而壽)
'''조부'''
은언군
'''양부'''
상계군
'''양모'''
평산군부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생부'''
풍계군[5]
'''생모'''
전주 이씨(全州 李氏)
'''부인'''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
'''자녀'''
2남[6]
'''생몰
기간
'''
'''음력'''
1824년 10월 16일 ~ 1863년 9월 18일
'''양력'''
1824년 12월 6일 ~ 1863년 10월 30일
1. 소개
2. 생애
2.1. 사망
2.2.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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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왕족. 사도세자의 3남이자 서장자인 은언군의 손자로, 풍계군의 아들이자 상계군양자이다.

2. 생애


1824년 10월 16일 한성부에서 은언군의 4남 풍계군과 그의 첩 '''전주 이씨''' 의 아들로 태어났다.[7] 초기 생애와 헌종 대까지의 행적은 3세 때 아버지 풍계군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다. 철종 때와 고종 때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은언군, 상계군과 관련 기사들을 대량으로 세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풍계군은, 죽은 이후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익평군 역시 은전군의 양손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익평군은 본가의 큰아버지이자 족보 상 5촌 당숙인 상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친아버지 풍계군과는 5촌이 되었다.[8]
철종 시기부터 생애의 기록이 나온다. 철종의 사촌인 그는 1849년 6월 23일 소의대부(昭義大夫)에 봉작을 받고, 같은 날인 6월 23일 익평군(益平君)에 봉해졌다. 이해 7월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고 7월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으며 9월 오위도총부 부총관[9]이 되었다. 이후에도 종척집사를 여러 번 맡았고 승헌대부, 숭헌대부, 그리고 가덕대부, 의덕대부, 현록대부로 계속 진봉하였다.
1851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사신으로 베이징에 다녀오고, 1853년 2월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璿源譜)의 찬수감인교정관(纂修監印校正官), 즉 관리수정감독을 하는 역할을 거쳐 4월에는 통례원의 인의인헌관(引儀引獻官)을 겸직하고 이후 천원수빈관(遷園守殯官)을 거쳐 종친부유사당상과 수릉관 등을 역임했다.

2.1. 사망


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익평군은 1863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더니 결국 1863년 9월 18일 향년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종묘에 있는 철종의 묘정에 공신 자격으로 배향되었다. 시신은 11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안현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한성부 연희궁 서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1865년 9월 14일 증직으로 증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판종정경(判宗正卿)에 특별 추증되었다.

2.2. 후손


부인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단지 한 명에게서 서자 이재성 한 명만 두었다. 이재성은 익평군의 친아들이었지만 서자라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더군다나 익평군 사후 불과 4살이었다.[10]
그래서 양자를 들이기로 했다. 익평군이 죽기 하루 전날인 9월 17일에 종친부에서는 덕흥대원군의 10대손 이병식의 손자인 당시 13세의 이덕주(李德周)를 익평군의 양자로 선택했다고 발표했다.[12] 이덕주는 1868년 흥선대원군의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재덕(李載悳)으로 고쳤다. 이후 관직 생활을 하다 1877년에 사망했고, 1899년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덕안군(德安君)으로 추봉받았다. 이재덕의 이후 가계는 덕안군 항목 참조. 서자 이재성에 관한 내용은 경은군 항목 참조.

[1] 상계군 사후 은언군의 서자들 중에 최연장자였고 1812년까지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가 연장자였다. 당연히 제사도 그가 받들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서자에다가, 42세에 미혼으로 사망한 탓에 철종 즉위 후 군호를 받지 못했다.[2] 익평군이 상계군의 양자 자격으로 입양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전 은언군의 생존 아들 중 최연장자였다.[3] 그리고 상계군이 복권되면서 은언군가의 적통은 은언군 - 상계군 - 익평군으로 적립된다. 이성득은 인정받지 못했다.[4] 군호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유래했다.[5] 상계군의 동생. 은언군의 동생 은전군양자이다.[6] 후술하겠지만 1남은 양자이다.[7] 원래 조선은 엄격한 성리학유교 사회이기 때문에 동성동본 간에는 절대 혼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풍계군을 비롯 풍계군의 아버지 은언군까지도 동성동본인 전주 이씨를 첩으로 두었다. 때문에 익평군의 생모 전주 이씨는 전주 이씨 선원세계나 선원보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1863년에 병조 판서 김병학이 그의 시호를 청하는 시장을 올릴 때, 익평군의 생모 전주 이씨의 존재를 언급하며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8] 친아들이 본가 큰집에 입양 가면서 정작 풍계군의 대는 끊겼다. 그래서 풍계군의 사후 양자가 들어왔는데, 첫 번째 양자는 파양당했고, 이후 새 양자가 들어와 대가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풍계군, 완평군, 이인응 항목 참조.[9] 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 기관이며 부총관은 이 오위 도총부를 총 책임지는 자리다.[10] 사실 이재성이 이 당시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과 더불어 '''실제 효종의 유전자를 받은 유이한''' 왕족이었다. 이재성, 이경응 이 두 명을 뺀 나머지는 전부 다 덕흥대원군, 선조, 인조 대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입양 온 것.[11] 양력 : 1864년 1월 16일[12] 그리고 당시 병석이었던 철종도 그가 죽고 3개월만인 계해년 12월 8일[11]에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