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洪國榮 | 홍국영'''
<colbgcolor=#000><colcolor=#fff> '''본관'''
풍산 홍씨(豊山 洪氏)
'''이름'''
홍국영(洪國榮)
'''자'''
덕로(德老)
'''여동생'''
원빈 홍씨(元嬪 洪氏)
'''생몰년도'''
1748년 ~ 1781년 4월 28일[1]
1. 소개
2. 생애
2.1. 세손 정조의 측근
2.2. 당대 최강의 실세
2.3.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다
2.4. 탄핵
2.5. 몰락
3. 야사
3.1. 자치통감강목(A.K.A 강목) 에피소드
3.2. 기타 에피소드
4. 여담
5. 창작물에서
5.1. 사극
5.2.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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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영조, 정조 시대의 정치가. 최초의 세도정치로 유명하다. 자는 덕로(德老).

2. 생애


1772년(영조 48) 과거에 급제 후 1774년 동궁시강원의 설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2.1. 세손 정조의 측근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72년 정조와 처음 대면해 빠르게 친해진[2]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영조 실록에 의하면 1773년에는 영조 곁에서 한림 역할을 했다.
정조 즉위 이후 급작스러운 출세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영조 또한 매력적인 홍국영을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세도 정치는 이미 영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을 숙청할 때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 즉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2.2. 당대 최강의 실세


이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곧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한다. 정조 즉위년 3월 13일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4월 13일 좌승지에 앉아 있다는 기록이 있고, 7월 6일 도승지가 되었다. 무조건 한 단계씩 거쳐서 승진하는 승정원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최말단인 동부승지에서 넘버2인 좌승지까지 '''일주일에 한 단계씩''' 승진한 셈.
그렇게 5년을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들을 도맡았다. 규장각 설립 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홍국영이 쫓겨나고 당시 홍국영이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종수는 정조를 보좌하며 홍국영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3.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다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후궁 간택을 명하였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음에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겨우 1년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치 않았다. 홍국영의 몰락 후에야 1786년 인명원과 효휘궁의 이름은 강등되었다.

2.4. 탄핵


그는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게 하고 군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당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에는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하고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인데 이는 대놓고 홍국영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행위를 정조가 괘씸하게 여겼을뿐더러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원리원칙을 철저히 하는 정순왕후 등 왕실 사람들마저 홍국영을 싫어하고 불쾌하도록 여기게 만들었다.
1779년(정조 3년)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 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3]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2살밖에 안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일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평소에 임금의 총애와 그의 권세, 좌의정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로 조정은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시열의 후손이자 사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는 송덕상[4]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살에 사직이 웬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했다.
그런데 소론으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은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여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 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탄핵하자 정조는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귀양보내 버렸다. 그러자 가뜩이나 원한이 많던 그가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이렇게 된 주된 원인은 홍국영이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았다는 것.

2.5. 몰락


처음에는 정조가 도성 바로 턱밑인 제기(현재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그냥 버려두다시피 놓아두었으나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와 함께 홍국영 본인의 뉘우침없는 언행들이 임금 귀에 들어가자 홍국영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도성에 출입할 수 없는 조치와 함께 강원도 강릉현으로 옮겨진다. 결국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몰락의 길에 다다르고 만다.
홍국영과 함께 송덕상도 몰락하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정조 초반기에 희한한 사건이 터진다. 송덕상이 삭탈 관직을 당하자 유생들이 통발로 반대 상소를 날리거나, 송덕상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고했다가 잡혀서 유배간 신형아, 신형아를 옹호해 유배된 박서집 등, 대다수가 유배를 갔다. 심지어 송덕상의 제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다른 일로 유배갔는데 우연히 같은 유배지였던 박서집에게 계획을 털어놨다가 박서집이 겁먹고 고발해서 잡혔던 문양해[5] 등,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3. 야사



3.1. 자치통감강목(A.K.A 강목) 에피소드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이 된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이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중 '이모비야(爾母婢也, 네 어미는 종년이다.)'라는[6] 어구 때문에 강목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런데 세손(정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강목을 읽고 있었고, 어느날 영조가 세손에게 한 최근 어떤 책을 읽고 있냐는 질문에 세손은 아무런 생각 없이 '강목을 읽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영조는 대로했고, 세손(정조)은 해당 부분을 읽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다. '당연히' 영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며 내시로 하여금 동궁전에서 세손이 읽고 있던 강목을 찾아오라고 한다. 동궁전에서 근무하던 홍국영은 이 사실을 알고 낌새를 눈치채고 강목에서 문제가 되는 해당 부분만 잘라낸 후 내시에게 건네줬고, 이 내시가 받아온 '수정본'을 확인하고나서야 세손의 말을 믿게 된 영조는 정조에게 '할애비 말을 잘 듣는 기특한 세손'으로 칭찬을 하였고 이에 정조는 폐세손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동궁전에 돌아온 세손은 수소문 끝에 그 때 홍국영이 강목의 문제시 되는 부분을 잘라낸 것을 알게 되고 홍국영을 최측근으로 삼았다.
허나 영조 대에 강목을 금서로 삼은 적은 없으며 금서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치통감강목은 사마광자치통감을 주자가 '강(綱)과 '목'(目)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책인데, 조선 사회에서 자치통감과 주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 위치는 결코 낮지 않았다. 게다가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경연에서 통감과 강목을 자주 진강할 정도로 이 책들을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라 설령 개인적으로라도 암묵적인 금서 취급 했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해당 표현은 사기 「노중련전」에 나오는 말로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이 이름 뿐인 주나라 천자 주현왕을 질차하며(꾸짖으며) 한 말이다. 통감과 강목에는 애시당초 이 발언이 실리지도 않았다. 이 발언을 제위왕이 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당시에는 주 왕실의 권위는 바닥을 쳐서 아무도 입조를 오지 않았고, 제후국에서 조공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제위왕 만이 주현왕의 전왕인 주열왕에게 입조하였다. 그 덕택에 명분에서 우위를 얻은 제나라는 제위왕의 훌륭한 정치와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날로 강성해져 갔다. 이후 주열왕이 죽고 주현왕이 즉위했을때 제위왕이 늦게 도착했는데 이때 현왕이 제위왕을 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제위왕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주현왕을 이렇게 욕한 것이다. 노중련의 말에 따르면 이 말로 제위왕만 오히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실권없는 천자라지만 그렇게 주나라를 섬겨놓고선 천자가 그를 처벌한다고 하니 대놓고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을 모욕한 대역을 저지른 이상한 꼬락서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조는 세손에게 강목에 대해 질문하고 그 대답을 칭찬한 적도 있다. 게다가 영조가 한번도 질책하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정조가 저렇게 어리버리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찬탈자 컴플렉스는 있었어도 무수리 태생이라는 컴플렉스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예 없다고 하기는 그런게 동시대 인물 채제공의 <번암집>에 위의 야사와 비슷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조가 말년에 항상 홍문관의 한림과 주서를 시켜서 옛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여 듣곤 했다. 어느 날 승지가 먼저 읽고 다음에 겸춘추가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다음 부분이 바로 「노중련전」이었다. 겸춘추가 "질차하며" 다음 문제의 이모비야 네 자를 읽자, 잠을 자던 영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벌떡 일어나 화내어 말하길, "어떻게 차마 내 앞에서 그것을 읽는단 말인가. 읽은 놈이 누구냐?" 겸춘추는 읽기를 멈추고,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당시에 세손으로 있던 정조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얼른 대답하였다. “신이 내내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그 4자 읽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정녕코 내가 들었는데, 신료들이 듣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여러 신하는 세손의 대답을 따라서 한결같이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의 안색이 조금 풀려서 다시 침상에 누웠고 신하들도 물러 나왔다. 그 직후 채제공이 정조의 아량을 극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쨌든 이 야사가 실제 사실보다 훨씬 유명해져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인지 홍국영이 낮은 하급 관리였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지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3.2. 기타 에피소드


  • 맹꽁이 서당에 의하면, 홍국영이 친척인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를 찾아가서 아버지인 홍낙춘의 벼슬을 알아봐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이 말을 듣고 홍인한이 "네 아비 같은 못난 밥벌레한테 줄 벼슬은 없다. 썩 물러가라."라고 크게 화를 내며 쫓아내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고 묘사된다. 참고로 홍낙춘이 왜 친척인 홍인한에게 멸시를 받았느냐 하면, 홍낙춘은 술자리에서 배따라기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불렀는데, 조선 시대에는 지금처럼 가수 같은 예능인들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지 못하고 못난 광대라고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홍낙춘도 광대라며 멸시를 받았던 것. 실제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가수나 탤런트 같은 예능인들은 딴따라라고 불리며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홍국영의 출세 덕분에 홍낙춘도 덩달아 살아났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풍산 홍씨 가문에서도 홍봉한, 홍인한과 함께 세도를 누릴 수 없는 방계 쪽이었던 듯 하다.[7] 홍국영이 홍인한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인한은 "영안위[8] 자손 중에 저런 못된 인간이 날 줄 어찌 알았으랴! 필시 집안을 망하게 할 자로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홍국영이 본격적으로 입신양명하기 전에 굉장히 깔봤기에 홍국영이 그 사실을 알고 오랫동안 분노했었다고 한다.
  • 사도세자의 정실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여동생 원빈 홍씨가 죽자 그 배후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를 의심하여 그녀와 대립했다고 한다.[9]
  •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홍국영이 처음 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의 기록에 의해 정조의 뜻이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던게 들통나서 쫓겨났다고 알려졌고 정조가 홍국영을 어쩔 수 없이 쫓아 보냈다고 했지만 유명한 이야기임에도 근거없는 이야기이고 도리어 홍국영의 세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구조는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홍국영의 세도가 강할 시기에도 홍국영은 어디까지나 왕의 제어하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반역자라기에는 사약은커녕 이름만 있는 관직인 '봉조하'를 받고 허무하게 최후를 맞은 모습이 너무 안습하다.
  • 죽기 직전에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지붕 밑에 사는 굼벵이를 잡아먹고 살면서 길가던 행인들에게 걸핏하면 저 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등 반쯤 미친 상태의 봉두난발 거지가 따로 없었고 오른쪽 눈 안에는 큰 점이 있어서 마치 눈동자가 3개로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4. 여담


  • 미남이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언급이 있고 심낙수의 '은파산고(恩坡散稿)'라는 기록에도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얼굴 생김새가 준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심노숭의 '자서실기'에 "키는 작았고 몸집이 비대했다"라며 홍국영 외모에 대해 언급하였다. 심노숭은 기해년(1779)에 둘째 외삼촌집을 방문하였는데 때마침 홍국영이 이곳을 찾았고 심노숭은 이날 홍국영을 처음 봤다고 한다.
  • 정조 일성록 정조 즉위년 7월 7일 9번째 기사 중 정조가 "저 승선이 비록 체모는 작지만 국량은 크다"라며 홍국영에 대해 평한 기록이 있다.(체모란 보통 일반적으로 털이나 체면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실록에 언급된 체모는 '체면'도 맞으며 '체격'과 동일하게 표현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홍국영이 체격은 작으나 국량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혜경궁 홍씨는 홍국영을 대단히 싫어해서 한중록을 보면 홍국영에 대해 실컷 욕해 놓았으며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10] 혜경궁 홍씨뿐만 아니라 홍인한 역시 "우리 가문에서 저런 망령된 물건(妄物)이 나올 줄이야. 저 놈이 우리 가문을 망칠 놈이다"라고 한탄했으며 형 홍봉한에게도 홍국영을 두고 "이 미친 놈(狂兒)에게 어찌 벼슬을 주어 등용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이 내용을 적은 편지가 홍국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홍국영은 홍인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한 것 뿐 아니라 세손 시절 그를 살해하려 한 전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할 경우 홍국영에 의해 제일 먼저 죽을 것이 확실시되었고 당연히 정조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국영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홍봉한도 같은 해에 귀양갔지만 사사되지는 않고 풀려났다. 하지만 홍국영에게 원한을 가질 법한 풍산 홍씨가 아닌 남양 홍씨인 홍대용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아도 심하게 촐싹거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세손이 공부가 지겨워서 홍대용을 비롯한 스승들에게 "나중에 마저 복습할게요"라고 하자 옆에서 "저하께서 지금 하기 싫어하는데 어찌 나중에 하시겠습니까?"라고 하는 장면이라든가 홍대용은 그 자리에서 홍국영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세손은 오히려 홍국영이 바른 말을 하는 것이라며 홍국영을 감싼다.
  • 남의 눈치를 읽는데 능했다. 1773년 영조가 이경양이상암의 발언을 의심하며 추궁하자 옆의 영의정 김상복이 열심히 말리는데 홍국영은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영조는 어차피 홍국영이 뭐라 하든 두 사람의 죄를 추궁할 생각이었고 영의정 김상복은 관직을 삭탈당했다. 1769년 홍국영이 정조를 만나기 전 별감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조가 궁궐에서 튀어나가 관 기생집에 놀러간 사건이었다. 이를 안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크게 꾸짖었는데 정조는 이를 마음에 오래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이 혜경궁 홍씨에게 정조가 당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 심낙수의 기록에 의하면 어릴 때부터 시정잡배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시거나 장기를 두었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한양에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을 정도였다.
  • 한국사의 이런 저런 가십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정조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하여 게이 드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단 정조의 모후인 혜경궁 홍씨부터 말하길 "주상이 홍국영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가 꼭 사내계집을 가까이 하는 모양새같다", "간사한 첩에 미혹된 것과 같았다"라고 홍국영에 대해서 '매우 잘 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미모로 내 아들을 홀렸다'라는 식으로 묘사하며 정조와 홍국영이 각별한 사이임을 언급했다. 홍국영의 정조 사랑은 사직서에서도 나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부분은 "신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은 남자의 몸이니 전하를 위하여 뒷날의 도모를 할 수 없으나 신의 누이가 이미 입궁하였으니 다행히 자손이 번창하면 우리 삼전의 기쁨을 돕고 우리 성명(聖明)의 근심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하였으나 신의 복이 적어서 신의 누이가 또한 젊은 나이로 죽었습니다"라고 쓴 대목이다. 한마디로 '자기가 정조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남자의 몸이라 그게 불가능하니 여동생을 대신 보냈다'는 소리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홍국영의 순애보를 이용해 단물 다 빼먹고 매정하게 내버렸다는게 포인트.

5. 창작물에서



5.1. 사극


조선 최초의 세도 정치... 내지는 세도 정치를 할'''뻔'''했다는 오명으로 평은 좋지 않으나 1980년대 이후 재평가되는 분위기. 영조와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감초처럼 등장한다. 좋게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여러 가지로 각색하기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와 함께 이상을 펼치려 했다가 타락했다는 전개가 자주 등장한다.
  •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편에서는 김동현이 연기했다. 사실상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드라마의 후반부를 주도하는 캐릭터로 위기를 겪던 세손을 보필해 정조로 즉위하게 하고 정적들을 제거하는등 큰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이지만 차츰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삼는등 권력의 정점으로 오르려하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홍국영의 퇴장과 함께 드라마도 종료.
  • 199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 연재된 유현종 원작의 역사 소설 《사설 정감록》(풍운정감록이라고도 한다)은 정여립 반란 사건과 홍국영의 조상이 얽혀 있고 그 증거인 죽간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조합한 작품인데… 심심하면 나오는 나체 고문과 검열삭제 장면으로 파문이 일기도 했다.
  • 위의 작품을 극화한 것이 KBS 1TV에서 1990년대 초반에 방영한 《왕도》인데, 김영철이 홍국영, 강석우가 정조로 나왔다. 검열삭제 부분은 당연히 안 나오고 원작을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김영철의 열연을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방영 당시 그다지 인기는 없었고 홍국영을 너무 미화했다고 사극 속 역사 왜곡으로 까던 사학자의 책도 당시 나온 바 있다. 이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유배지에서 정조 임금이 찾아오는 환상[11]을 보며 홍국영이 기뻐하면서 '전하! 오셨군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유언을 남기며 그대로 숨을 거두고 지인이 슬퍼하는 마무리로 끝난다.
  • 2001년 MBC사극 《홍국영》[12]에선 (훗날 대왕 세종의 세종을 맡은) 김상경이 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사극인데도 지나치게 현대적 분위기에다 자주 삽입되는 무협 장면도 극의 사실성을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 동시간대 SBS 여인천하로 인한 시청률 저조(4% ~ 5%대) 탓인지 40부작 만에 조기 종영되었다.
  • 2007년 드라마 《이산》에서는 한상진이 홍국영 역을 맡아 방영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조의 세손 시절 때부터 온갖 위기를 이겨내는 대담한 책사로 대활약하다가, 정조 즉위 후에는 자기 권력 강화에 집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워낙 정조의 고생이 심한지라 이를 극복하는 조력자인 홍국영의 활약도 엄청난 편. 전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홍국영 루트를 따라가지만, 마지막에 자신이 정조를 배신했다는 것에 대해 참회한다는 점이 차이점.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에게 매우 우호적이라는 점도 역사와는 큰 차이다.
  • 2011년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는 양초립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본래 이름인 홍국영으로 돌아갔다.

5.2. 만화


  • 만화인 야뇌 백동수에서도 등장. 주인공인 백동수와 동기였지만 무술을 포기하고 과거 시험을 치른다. 무술도 나름 괜찮고 한번 본 필체를 단숨에 베껴내는 등 천재 기질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인데 어째 외모가 어떤 만화신세계의 신을 닮았다.

[1] 음력 4월 5일[2] ‘오늘은 신이 임진년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6일 정미 1번째 기사.[3]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관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퇴직시에 받는 명예직으로 실제 정사는 보지 않고 예식 등에만 참여하였다. 현직보다는 적지만 녹봉도 지급된다.[4] 송시열의 손자이지만, 학문적인 성취나 수준은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어서 정조 임금이 그리 미더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5] 이때 잡혔던 인물은 김귀주 쪽 인물인 이현과 홍국영의 사촌이었다. 이 인물은 부자인지라 100칸짜리 소금 1천포를 내놨다고 한다.[6] 다른 바리에이션으로는 한문제남월의 왕 조타에게 보낸 글에 "'''짐은 고황제 측실 소생이었다'''"라고 적은 부분을 싫어했다고도 한다.[7] 홍인한과 홍국영은 6대조가 같은 10촌 할아버지 손자뻘 관계다.[8] 홍주원. 선조의 사위로, 인목왕후의 소생 정명공주의 남편이다. 혜경궁 집안과 홍국영 집안은 모두 홍주원의 후손이다.[9] 드라마 《이산》에서는 이 부분을 따와 원빈 사후 효의왕후와 홍국영이 대립 관계가 되는 걸로 그렸다.[10] 혜경궁 홍씨가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말이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았고 상당히 담대한 성격이었다는 의미도 된다.[11] 사실 유배지로 찾아온 지인을 잘못 본 거다.[12] 이재갑 연출, 대왕의 길의 임충 극본. 최불암영조, 정재곤이 정조, 정웅인정후겸이라는 지금 시점에서는 후덜덜한 배역을 자랑했다. 크레딧에서는 역시 《사설 정감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지만 원작과 관련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