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역사
강화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현재는 일개 군이긴 하지만, 강화도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며,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고을이었다.
1. 선사시대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2. 청동기시대
3. 고조선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에는 단군이 쌓았다는 전설이,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각각 전해진다.
4. 원삼국시대
마한의 대석삭국인 곳으로 추정되는곳이다. 3세기 이후, 4세기쯤 백제에 병합되었다.
5.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강 및 임진강과 예성강의 입구라는 입지 탓에 삼국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맨 처음 강화를 차지한 나라는 백제. 요새 관미성의 유력한 위치로 거론되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막을수없어 갑비고차를 잃게된다. 고구려 치하에서 '''혈구군(穴口郡)'''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진흥왕 이후 최종적으로는 '''신라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독재자이자 명장인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고려산 등에는 연개소문 관련 전설들도 전해진다. 하지만 고구려 명문가인 연씨 가문이 평양에서 멀리떨어진 신라령 강화도에 정착해 연개소문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정황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전설 취급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6. 남북국시대
신라의 영토에 흡수한 이후로도 혈구군으로 유지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했다.
당시의 강화도는 해구군과, 해구군 직속 관할 영현인 호음현(沍陰縣, 하점면), 수진현(守鎭縣, 양도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근 교동도 또한 강화 해구군의 영현으로 교동현(喬桐縣)이 있었다.
제46대 문성왕이 844년 8월 서해안 방비 거점으로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다. 이것이 근현대까지 천 년 이상 방어시설로 활용된다.
7. 고려시대
고려 태조 때 강화현(江華縣)으로 개칭되어 비로소 현재의 명칭이 정립되었다.
고려시대 왕이나 왕족이 유배를 자주 가던곳이고 고려 전기 무역 거점 벽란도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고, 여몽전쟁 시기에는 몽고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개경에서 천도하여 38년 간 '''정식''' 수도로 기능했다. 이때의 이름이 바로 강도(江都). 장기간 전투로 인해 삼별초와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이탈하게된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궁궐과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버렸다.
고려의 왕릉도 대한민국에서 4기가 존재하는데 그 중 3기가 이 강화도에 있다. 다만 한 기가 유실되었을 뿐... 다만 고려 고종의 왕릉이 올라가기 힘든 산중턱에 자리잡고있고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려 희종의 왕릉인 석릉도 초라하긴 마찬가지다.[1] 그 외에 왕비릉인 가릉과 곤릉도 있다. 가릉은 충렬왕의 어머니인 정순왕후 김씨, 곤릉은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왕후 유씨의 능이다. 하지만 국력이 약할 때라 그런지 봉분도 석물들도 전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조선왕릉이나 신라왕릉의 깔끔한 봉분과 수준높은 석물들과 비교했을 때 고려왕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안습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무신정변 이후에 무신정권이 대대로 해먹었다. 아무튼 이 시절만 놓고 보면 강화의 리즈시절이라고 할만한데, 강화의 인구가 10만에 달해서 2018년 현재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개경 복귀 이후 반발한 삼별초가 이곳에서 거병했으나 이들은 곧 진도로 남하했다.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8. 조선시대
조선 태조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요충지로 기능했다. 수도에서 가까운 섬이라는 입지 덕에 유배지로도 애용되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이 강화로 유배당한 대표격 인물.
임진왜란 당시는 주 전장[2] 에서 비껴난 탓에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터지자 인조는 강화로 도망쳤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다시 그대로 하려고 했는데, 왕실은 성공했으나 인조 본인은 실패. 김경징이란 희대의 졸장의 분투로 강화는 함락되고 인조는 한층 더 대차게 망했다.
이후 조선 후기 들어 효종과 숙종 대에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12진보(鎭堡)라 불리는 수많은 요새가 수축되었다. 정조 대에는 군사적인 중요도 때문에 화성, 남한산성, 개성과 함께 유수부(留守府)로 지정하여,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도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 미국 같은 서양세력이 있었다.
조선 말기 발발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외세를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대표적인 사례.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조선은 1876년 2월 27일 연무당[3] 에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망국으로 향하는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심도(沁都)'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4] 구한말 조선군 편제 중, 강화도에 설치된 군영을 '심영(沁營)' 이라 불렀다.
9.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 때 교동군(喬桐郡)을 흡수 통합하였다.
10.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기도에 잔류했으며,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3월 1일 김포군 검단면, 옹진군과 함께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강화군이 인천으로 편입된 근거로는 경제권, 생활권 상 인천과 연계가 있고 인천에 진출한 강화군 출신자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경기도청(수원)보다 인천시청이 더 가깝다는 점도 편입의 근거가 되었다. 사실 원래 계획은 김포시도 전역을 인천에 편입하는 것이었는데 김포는 검단만 내주는 것으로 조정되면서 지금처럼 애매한 모양새가 된 것.
그 덕에 경기도는 졸지에 대명항을 제외한 북단 해역을 완전히 봉쇄당하게 되었다(...) 남단도 옹진군의 상실로 완전히 잃어버릴 뻔했지만 대부면를 비롯한 일부 해역을 건사하며 구사일생.[5]
사실 관리비용에 비해 직접적인 수익이 적은 바다와 별도로 관리해주어야 하는 섬이 줄어드는 것이 경기도에게도 썩 나쁘지는 않았는지, 종종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떡밥이 나오기는 하나 큰 주목은 받지 못하고 묻히곤 한다. 기사 1기사2 경기도 당국에서도 강화군의 경기도 환원에 대해선 적극적이진 않고 '해볼테면 해봐라(=너희들이 시도를 하겠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강화군 자체를 보면 거리나 생활권이 완전히 인천과는 거리가 있으며[6] ,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때마다 타 지역에 붙어서 하는 등 불이익도 적지 않아서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1] 그 외에 강종의 후릉도 강화도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후릉은 유실된 상태다.[2] 주로 남해안과 영남대로 일대가 주 전장이었다.[3] 강화산성 서문 인근[4] 심도중학교, 심도지구대 등에 이름이 남아 있다.[5] 사실 화성과 평택이 있어서 옹진군이 통째로 날아간다고 해도 완전 상실은 아니다.[6] 강화군의 주 생활권은 김포, 넓게는 서울(영등포)이지, 인천 쪽은 아니다. 물론 위에 상술하다시피 인천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