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원순은 1890년 10월 8일 서울 을지로 1가 삼각동 근방에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창근(昌根)이었으나, 그의 나이 16세 때 한의사였던 조부로부터 '거짓 없이 살아라'라는 의미로 원순(原淳)이란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의 부친은 중국을 왕래하며 중국산 약재를 직접 수입해 약재상을 운영했다. 이원순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7살 때인 1906년에 배재학당 야간부에 입학하여 신사상을 익혔다. 특히 영어와 산술 과목에 흥미를 보인 그는 배재학당 졸업 후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진학하여 1909년 20살의 나이로 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이원순은 한동안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다가 황성기독교 청년회를 찾아가 미국인 선교사 그렉에게 영문타자 기술을 익혔다. 이후 1911년 경신중학교의 교장 비서로 취직했으며, 동시에 영어교사로 일하면서 최남선과 친분을 다졌다. 1912년 봄에 보성전문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법학과를 수료했다. 그러던 1914년 7월 29일, 이원순은 25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자신이 망명을 택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보성전문 졸업을 1년 남짓 앞둔 2학년 말 때였을 것이다. 나는 경신학교에서나 그 외의 장소에서 거의 매일처럼 이갑성, 여운형, 한백선(韓百善) 등과 어울리면서 진로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우리들의 관심과 화제는 기회만 있으면 해외로 나가보자는 것이 꿈이요, 희망이었다. 견딘다 해도 국내에선 노예 생활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2. 하와이
이원순은 용산에서 신의주, 상하이를 거쳐 1914년 10월 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샌프란시스코였지만 미국 본토에 들어가려면 100달러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배표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던 호놀룰루행 배표와 바꾸고 하와이로 들어갔다. 그는 하와이에서의 체류 초기에는 구직 활동이 여의치 않아서 8개월 간 하루에 10시간, 많게는 12시간씩 농장 일을 했고, 중국인이 운영하는 신문사에 문성공으로 취직해 활자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 일을 하는 등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구입해 자동창 행상을 시작한 그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한 덕분에 상당한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이후 사무용품점, 가구점 등의 사업을 이어나가며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여기에 하와이대학 부동산학과에 입학하여 1년 과정을 마치고 부동산 소개업 면허를 취득하여 부동산 중개업 및 토지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리하여 하와이에서 자리를 잡은 이원순은 독립 운동으로 시선을 돌린다.
2.3. 독립 운동
이원순은 대조선독립단의 박용만 단장의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용만을 보필하면서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호소하는 단행본을 발행하는 등 활발한 독립 운동을 벌였다. 그는 1919년 4월 대조선독립단의 회장을 맡아 3.1 운동의 진상을 밝히는 보고서를 작성해 미 정부에 전달했고,1928년 대조선독립단 회장 직에서 물러난 후 이듬해인 1929년 40세의 나이로 대한인동지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외교 활동 및 독립운동자금 자금을 조달하며 1943년까지 회장으로서 활동했다.
이원순은 이밖에도 1934년 4월 18일 이승만으로부터 주미제2행서의 재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하와이에서 인구세, 애국의연금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3년 7월 19일에는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워싱턴에 주재하며 대미 외교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을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주로 이승만과 함께 VOA(Voice Of America: 미국의 라디오 방송)에 참여해서 한인 동포들에게 단결을 촉구하고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 것과 적기가 오면 총궐기하라는 방송 원고를 작성해 이승만에게 전달하고, 이승만이 그것을 읽는 동안 녹음한 후 방송국에 전달해 동포들에게 전파하도록 했다.
2.4. 한국의 IOC 가입을 주선하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한국이 해방되었지만, 이원순은 바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이는 그가 1945년 3월 경 범태평양연맹 워싱턴 대회 파견을 두고 이승만과 마찰을 빛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뜻과 어긋나는 인사를 대표단에 독단적으로 추가하는 것에 반대를 표명했고, 이승만은 이를 고깝게 여겼다고 한다. 이원순은 회고록에서 자신은 '이박사'와 막 갈라서서 귀국해봐야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이 분명했고, 임시정부 요인들도 자신을 이박사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그들과 한편이 될 수도 없어 귀국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이사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미국에서 머물러 지내면서 1946년 한미무역회사를 설립했고, 1947년에 한인이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52년까지 역임하면서 한인이민법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그러던 1946년 봄, 당시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가 그를 찾아왔다. 전경무는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의 친서를 그에게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조선체육회가 IOC에 가입하려 하는데 물신양면으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원순은 경신중학교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여운형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전경무와 함께 미국체육회와 접촉하는 한편 당시 IOC 부위원장이었던 브런디지 미국 올림픽 위원장을 만났다. 브런디지는 한국이 1947년 6월에 개최되는 IOC 총회에 가입하는 걸 돕겠다는 약속을 해줬고, 이원순은 전경무를 한국으로 돌려보낸 뒤 정 월터와 함께 한국 올림픽대책위원회와 서신을 교환하며 가입 전략을 짰다.
그런데 1947년 5월 29일,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급히 미국에 있는 이원순 재미 한인회장에게 긴급 전보를 보내 제40차 IOC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원순은 후에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후 비행기 추락 현장에서 찾아낸 조선 올림픽위원회 관련 서류들과 전경무가 사망 당시 휴대했던 각종 문서들이 미군 항공기 편으로 이원순에게 전달되었다. 이원순은 즉시 1947년 6월 15일부터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될 IOC 총회에 참석하려 했지만 비행기 표를 비롯한 여권을 준비하지 못해서 개최 5일전까지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월 13일 금요일에 '13일의 금요일'을 액일로 여기는 서양인들이 예약을 취소한 덕분에 가까스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었지만 한국은 당시 독립국이 아니었고 그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었다. 그는 훗날 여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내가 미군정 하지 중장으로부터 올림픽 대책위원회 대표로 IOC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전씨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 3일이 지난 때였다. 여운형 씨도 곧이어 별도의 전문을 보내왔다. 모두 조선올림픽위원회가 IOC에 가입하도록 최선을 다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당초 전씨가 뉴욕에 왔을 때 스톡홀름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한데다 고인의 일을 대신 한다는 생각도 들어 즉각 승낙하는 답전을 쳤다.
이원순은 혼자서 작성한 여권을 가지고 영국 총영사관을 비롯한 덴마크, 스웨덴 영사관을 찾아가 열심히 설득한 끝에 입국사증을 받아냈다. <매일경제>는 1988년 4월 13일자 기사에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원순의 '개인 여권'은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그가 만든 개인 여권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947년 6월 13일, 이원순은 뉴욕을 출발하여 덴마크를 거쳐 IOC 총회 개막을 이틀 앞두고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그는 여장을 풀기 무섭게 당시 IOC 위원장을 맡고 있던 에드스트럼과 부위원장 브런디지를 방문해 IOC 가입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대안이 없을까 궁리하던 끝에, 나는 개인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공문서 용지에 이름과 나이, 본적, 주소 등을 기입한 다음 <나는 한국인으로 KOC와 대한체육협회의 요청을 받아 IO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영국 올림픽위원회와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문제를 협의하려 한다.>라고 썼다. 그래도 모자란 것 같아 나의 인상착의, 부모의 이름, 아내의 경력, 가족사항까지 적어 넣었다. 그런 다음 공증인을 찾아가 공증을 받았다.
이에 에드스트럼 위원장은 가입 신청서를 회기 중에 정식으로 접수하겠으니 회의에 참석하여 취지 설명을 해달라고 답변했다. 이후 이원순은 총회에 나가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여러 IOC 위원들에게 한국의 가입을 승인해주도록 설득했다. 그가 이날 행한 연설의 요지는총회의사록(IOC Stockholm session, 1947)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나는 IOC 에드스트럼 위원장과 브런디지 부위원장을 찾아가 우리나라의 스포츠 보급 실정을 알리고, 우리가 얼마나 IOC 헌장을 충실히 이해하며 올림픽 정신을 얼마나 준수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며, IOC 가입을 승인해주도록 간청하였다.
연설을 마친 이원순은 사흘을 기다린 끝에 IOC 총회를 통해 한국의 가입 승인을 받아냈다. 이원순은 훗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한국올림픽위원회 대표인 이씨는 앞무대로 소개된 후 자기 올림픽위원회의 신청을 발표함. 조직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적 설명을 하고 여정 중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 한국 대표위원을 대신해 참석한다고 발표함. 이씨는 총회에게 자기 위원회의 올림픽에 대한 헌신을 보장한다고 했음. 에드스트럼은 감사를 표하고 내일 결정이 나온다고 발표함. 이씨는 자리를 뜸.
<경향신문> 1947년 6월 25일자 기사는 이원순의 활약과 한국의 IOC 가입 승인을 아래와 같이 전했다.총회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각국 IOC 위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나를 맞았다. KOC가 IOC에 가입된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곧이어 에드스트럼 위원장이 IOC 가입승인서(加入承認書)를 전달했다. 사진기자들은 나를 위원장과 브런디지 부위원장 사이에 세우고 연방 플래시를 터뜨렸다. 내 생애 이처럼 기쁜 날이 또 있을까? (중략) 나는 총회장에서 나오는 즉시 KOC와 미군정장관 하지 중장 앞으로 전문을 보냈다.
이후 이원순은 1956년 개최될 예정이던 동계올림픽의 개최지 선정에 조선의 개최를 요구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다가 영국 올림픽 위원회 대표이자 IOC 위원인 벌리 경과 함께 런던에 들러 이듬해 런던올림픽 참가 문제를 협의했다. 이후 1947년 9월, 이원순은 조선체육회 관계자 및 친지들의 환영 아래 33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그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의 환영식에 참석했고, 체육회 부회장 유억겸(兪億兼)을 비롯해 체육회간부들, KOC관계자들과 오찬을 같이 한 후 IOC 가입 경과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며칠 후 비원(祕苑)에서 체육회(體育會) 주최로 성대한 환영식이 베풀어졌는데, 이 자리에는 체육인은 물론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많은 내외 인사가 참석했다.서전(瑞典) 스톡홀름에서 활약 중인 조선「올림픽」준비위원회 대표 이원순(李原淳)씨가 이번에 조선「올림픽」준비위원회에 보내온 전문(電文)을 보면 조선「올림픽」위원회가 국제 「올림픽」위원회 회의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조선은 「올림픽」 국가로서 일구사팔(一九四八)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으므로 이달 이십이(二十二)일 「런던」으로 가서 「올림픽」 참가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조사연구를 하기로 되었다 한다.
2.5. 런던 올림픽
1948년 6월, 이원순은 KOC의 요청에 따라 앞으로 2개월 남은 런던 올림픽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준비위원회를 찾아가 참가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알아봤고, 선수들의 숙소를 구한 끝에 영국공군학교 기숙사를 빌렸다. 또한 당시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 중 영어를 아는 이가 3명 밖에 없었기에, 그는 선수들을 대신해 각종 섭외를 담당했다. 대회 기간 중 각종 경기연맹의 회합이 빈번했기에, 그는 부득이 저녁을 두번이나 거를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며 선수들의 통역을 몸소 수행했다. 한국 선수들은 이러한 그의 도움을 받으며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고, 권투 플라이급 한수안(韓水安)과 역도 미들급 김성집(金晟集)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대해 이원순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런던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선수들은 실망감과 죄송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야말로 참가에 의의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독립해 처음으로 참가한 올림픽이 아니었던가. 대과(大過) 없이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하게 된 것으로 만족했다.
2.6. 국내 활동
1949년 5월, 신익희 대한체육회 회장은 이원순에게 공적치하와 함께 체육회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후 그는 1949년 12월 두번째 귀국길에 올라 6개월간 서울에 체류했다가 한국전쟁이 터질 무렵이 미국으로 돌아갔고,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던 해인 1953년 9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올림픽위원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사업에 관계했다. <매일경제> 1988년 4월 27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徐潤福)과 어울렸고, 그가 뉴욕에 있을 때 서윤복에게 아내 메리가 담근 김치와 고추장을 먹게 했다고 한다.
이원순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약 7년간 KOC 부위원장 직을 맡았고, 1960년 2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제56차 IOC 총회에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이기붕 IOC 위원을 대신해 총회에 참석했으며, 동년에 개최된 제8회 스퀘벨리 동계올림픽에 선수단장으로 참여하여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사업에도 눈을 놀려 1954년 한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5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해 운영했으며, 1963년 한미협회(韓美協會)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며 민간차원의 양국 교류와 친선을 도모했다.
한편 이원순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민간차원의 외교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1975년 6월 29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해외로 밀반출되었던 문화재 40점을 사들여 국가에 헌납한 공로로 1982년 2월 15일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이후엔 1984년 한국시각장애자복지회 회장을 역임했고 1986년에 자랑스러운 고려대인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사장,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한미협회 명예회장을 맡았고, 광복회 고문 및 백범기념사업회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8년 9월 18일, 이원순은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직접 관전한 뒤 <매일경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볼 수 있다니 이제 내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1989년 100살을 맞이하여 <매일경제> 1989년 9월 18일자 기사에 자신이 장수하는 까닭은 "절대 과식하지 않고 하루 8시간씩 숙면하며, 평생 앉는 것과 눕는 것을 피하고 많이 걷는 것, 흡연하지 않는 것, 마음을 바르게 할 것, 후회할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을 철저히 지킨 데 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3년 4월 19일, 이원순은 104세의 나이로 서울 강남구 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원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