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

 



'''이기붕 의장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제3-4대 전반기 국회의장
이기붕
李起鵬 | Lee Ki-poong
'''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897년 1월 22일[1]
충청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
(現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6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2]
'''호'''
만송(晚松)
'''재임기간'''
제3·4대 서울특별시장
1949년 6월 6일 ~ 1951년 5월 7일
제3대 국방부 장관
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29일
제3대 전반기 국회의장
1954년 6월 9일 ~ 1956년 6월 8일
제3대 후반기 국회의장
1956년 6월 9일 ~ 1958년 6월 30일
제4대 전반기 국회의장
1958년 6월 7일 ~ 1960년 4월 28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부모'''
아버지 이낙의, 어머니 송정현#
'''배우자'''
박마리아
'''자녀'''
딸 이강희(李康姬, 1935~1949)
아들 이강석(李康石), 이강욱(李康旭)
양자 이강복(李康福)[36]
'''친인척'''
6촌형 이기룡(李起龍)[37]
'''학력'''
보성학교 (졸업 / 6회)
연희전문학교 (중퇴)
데이버 대학교 (철학 / 학사)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신장'''
약 165cm[38]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3''', '''4'''
'''경력'''
제3·4대 국회의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 장관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창작물에서의 이기붕
4.1. 영화
4.2. 드라마
6.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제3대 국방부 장관이자 제3-4대 전반기 국회의장.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부통령 직책을 역임한 적은 없다.

2. 생애


충청북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3]의 몰락한 양반가 집안에서 남매 중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에서 끝이 났고 그 뒤 자손들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전성군(全城君) 이대(李薱)는 그의 12대조였다. 그의 증조부 이회정(李會正)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수하에서 활약하여 판의금부사[4]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으나 임오군란 직후 흥선대원군이 잠시 정권을 잡았을 때 흥선대원군의 명을 어기지 않고 명성황후의 국상을 반포하였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간 이후 탄핵을 받고 민씨 정권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당여[5]라고 하여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도 20세에 사망하고 아버지마저 오래 산다는게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6]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7세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인 홀어머니[7]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으며 가난한 환경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예사로 하여 몸이 병약하였다 한다. 그가 소학교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학교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리 어른들이 있었다고 하며 소학교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저기 뽑혀다니기도 했다.
유학 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밀양 박씨 박명삼(朴明三)의 딸[8] 박마리아(朴瑪利亞)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 일대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9][10] 지배인을 지냈다. 이 무렵 2남 1녀 이강희, 이강석, 이강욱을 두었으며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등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에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11]
[image]
제1공화국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이강욱. 이강석과 이강욱 위에 이강희(李康姬, 1935.12.19~1949.5.31)[12]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지만 중학생 때 사망해서 사진에는 없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던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특히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13]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탔다.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라고 소문났는데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지만 거절당했다. 보통 국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시에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가 되었던 것. 박마리아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 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는데 사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 다리를 끊고 후퇴를 할 때는 "서울특별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책임을 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항전하다 죽었다면 역사 교과서에서는 당연히 좌우익을 막론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위인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14]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들에게 사과한 사실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승만보다 나은 점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임한 신성모[15]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2인자로 등극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동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서 인기를 끌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당시의 혼탁한 정계 상황을 감안해서 그렇다 쳐도 이제부터는 정치 깡패 이정재를 영입하고 사사오입 개헌에 앞장서는 등 무리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자기 아들 이강석을 후사가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효령대군파인 이기붕간의 관계는 문중에서도 곤란한 데가 있었다. 세간에서는 아들을 팔아 출세한다고 까였다. 물론 이기붕 자신으로서도 장남인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기에 둘째는 안 되겠냐고 했다가 이승만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했단다. 이강석은 물론 부정 입학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는 했으나 서울대학교 법대를 잠깐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으며 남은 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남이다. 이승만은 대통령 당선 후 진짜 왕족인 이청(의친왕의 손자)을 양자로 삼으려다 어디 “양녕대군의 방계가 왕족을 양자로 들인단 말인가”라는 논리로 차인 후 겉으로는 이청의 입적이 '왕정 복고'를 연상시켜 이승만 스스로 거부한다는 형식으로 뒤만 겨우 수습해 둔 터였다.
하지만 잘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 정, 부통령 선거. 이기붕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장면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한 이유는 이기붕의 스펙이 떨어진 것도 있었으나[16]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조차 승리를 장담 못할 상황이었으나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사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신익희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낮았던 대통령 후보 조봉암조차 대통령 선거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을 정도였다.[17] 그 후 이기붕은 장면을 제거해야겠다면서 장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18] 1958년 자유당의 돌격대로서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던 정치 깡패 이정재가 고향이천에서 민의원에 출마하려고 하자 서울에서 지지율이 바닥이라 출마가 어려웠는지, 이정재의 출마를 포기시키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였다.[19]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라는 최악의 사건을 터뜨린다. 이번에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2달여를 앞두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시 나이 86세로 21세기 기준으로도 고령이지만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고령이라 대통령직을 임기 끝까지 무난히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20]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가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부정 선거를 감행한 것.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났고 상황이 나빠지자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합의했으며 국방장관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21]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서대문의 저택을 빠져 나와[22] 경기도 포천시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 사령부[23]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도 못해서 미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말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알아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1957년부터 이기붕은 각부신경통과 협심증을 앓고 있어서 미국 월터리드 육군 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녔지만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기붕은 1960년 4월 25일 오후 6시에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와 육군 6군단으로 피신할 때에도 대소변을 보기 위한 변기와 신경통을 앓는 다리를 덮을 담요를 챙길 정도였고 이미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 무렵의 이기붕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라 휠체어를 타고 다녔고 대소변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 상태라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휠체어 밑에 간이 대소변기를 달고 다녔다. 그래서 사실상 이기붕은 부통령 역할을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 역할은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가 대리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이였고 권력욕이 강해서 사실상 비선 실세나 다름없었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으로부터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다는 말을 했다.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으로 가서 이기붕의 사퇴 수락 소식을 전했고 한갑수를 시켜 사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 이기붕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신문 기사에는 이기붕 사퇴가 아니라 이기붕 '사퇴 고려'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무위원들은 김정렬 장관에게 항의했고 확인 결과 자유당 강경파들의 반발로 사퇴 성명서가 사퇴 고려 성명서로 후퇴한 것이 드러났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충수였다. 여론이 들끓자 다음날에 이기붕은 직접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4월 25일에 이기붕의 집은 파괴되었고 이기붕은 다시 6군단 사령부로 달아났다가 경무대 별관 36호실로 옮겼다.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난지 9일째되던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에 의해 이기붕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되었고 이강석도 자살했다. 향년 63세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24]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는 머리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1발, 가슴에 1발 쏘았다는 말인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타살론이 나왔는데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였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 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하야를 발표한 상황인데다가 이기붕 일가를 죽인다고 해서 국민 여론이 단번에 돌아설 리도 없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일전에 사는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이미 자살한 상태였고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보기도 한다. 한 자루의 총만 사용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종종 있는 일이다. 이강석의 사인이 타살이라는 루머가 퍼진 이유는 뜬금없게도 도조 히데키 때문이다. 이유는 도조 히데키가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쐈는데 이게 실패[25]한 것. 사실 도조 히데키는 콜트 22 같은 소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다. 그런데 이게 와전되어 "자살 목적으로 가슴을 쏘면 실패한다."는 속설이 퍼지고 이에 더해 "이강석이 가슴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타살"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타살론이 제기된 것이다.
이기붕과 가족들의 시신은 이후 수습해서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내외와 허정 등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석했으며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였다.# 1970년대까지는 이기붕의 비서 등 지인들이 망우리에서 추모 활동을 벌인 것이 확인되나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시기에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야산 사설묘지로 이전되었다. 이기붕의 가문인 효령대군파 종중에서 가끔 제례를 지내지만 묘지 관리비도 내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2008년경부터 미국에서 이기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여성이 거액의 관리비를 보내서 석축도 새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몇년 후 끊겼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10선거구)[26]
'''자유당'''
'''12,923 (58.63%)'''
'''당선 (1위)'''
전후반기 국회의장
1956
제4대 부통령 선거
자유당
3,805,502 (44.00%)
낙선 (2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제13선거구)[27]
'''자유당'''
'''단독출마'''
'''무투표 당선'''
전반기 국회의장
1960.4.28 사망





부정선거

4. 창작물에서의 이기붕



4.1. 영화


  • 1968년작 조긍하 감독 영화 <잘 돼 갑니다>에선 배우 장민호가 맡았다.

4.2. 드라마


  • MBC 드라마 공화국 시리즈에서는 박규채가 담당했다.[28] 병약했던 모습이 부각되었으며 항상 느긋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박마리아가 지나치게 나대면 계집년이 너무 나선다면서 다그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조병옥과는 사석에서 친구처럼 말놓고 지내며 서로 내각책임제 막후협상을 벌이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그리고 걷기조차 계속 힘들어하는 모습에 이강석이 “아버지, 정치 그만둬, 정치를 뭐할려고 해, 죽을려고 해?” 라고 따지는 모습에 “알았어, 안할께. 응?”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3.15 의거가 발생했을때에는 상황 파악 못하고 기자들 앞에서 "총은 쏘라고 준 거지, 가지고 놀라고 준게 아니다." 라는 실제로 했던 발언을 그대로 표현했다.
결국, 4.19 혁명이 발발하자 앓아누운 상태에서 업혀서 제6군단으로 피신하고 그 와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깔끔하게 사퇴를 하지 않고 사퇴 고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해서 민중의 분노를 더 극대화시켰다. 이승만이 하야 결심을 하자 6군단에서도 더 머무르지 못하고 경무대로 왔고 결국 아들 이강석에 의해 가족이 집단자살한다.[29]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곽영주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 자체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이기붕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로 왔다는 말을 듣고 "이것들 차라리 집단자살해줬으면 좋겠네..." 라는 식으로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 1985년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양재성이 맡았다.
  • 1989년 KBS2 미니시리즈 무풍지대에서는 배우 권성덕이 맡았는데,[30] 1998년작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인철[31]이 맡았는데, 캐릭터로서의 상세 내용은 이기붕(야인시대) 항목 참고.

5. 이기붕계




6. 여담


  • 이기붕은 생전에 국어학자 한갑수손도심, 임철호, 오범수, 최승만, 김영찬, 김일환 등 지인 150여명을 모아다가 '만만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멤버들은 이기붕 사후 1970년에 묘비까지 쓸 정도로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 박마리아의 서적도 충격적이라는데 서적을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을 보면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혼동하는 글도 발견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과 여성 교육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 이승만의 정치 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 책인 'Japan Insideout'은 2차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 책을 번역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에 재출간된다. 당시에도 이승만의 이미지가 생각보다 안 좋아서인지 영향으로 원저자인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
  • 이기붕의 유산 상당수는 상속인인 사후 양자 이강복이나 연고자 등에게 양도됐으나 이승만 정권 때 부정축재한 자금은 4.19 혁명 이후 환수되어 공항대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이기붕의 저택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가재도구 등이 파손된 후 5월 27일부터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가 사무실로 썼다. 1963년 자택이 국가로 환수되자 4.19 관련 단체에 무상 대여하여 1964년 4.19기념 사설도서관이 개설됐는데 현재의 4.19혁명기념도서관이다. 1971년에 새 건물이 들어서 과거 이기붕 때 흔적은 전부 사라졌다.
  • 3.15 부정선거 및 이승만의 양자 관련으로 한국 권력 2인자를 굳히면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자이자 대한민국 정치인 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자이지만 욕은 이승만이 거의 다 먹는 듯하다. 지금은 이승만이 욕을 다 먹고 있지만 부정선거 이후 사회 분위기는 이기붕이 부정선거 책임자로 욕먹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애초에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서 당선이 확실했기 때문에 굳이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시민들은 이승만이 독재자이기는 해도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민 대표를 보내 정중하게 면담을 요청했고 이승만도 당시 나이가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버티는게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하야를 선택했는데 사실 하야 때는 나이가 85세나 됐다.[32] 이런 상태에서 의학도 당시에는 부실한 상태였는데 이승만보다 젊은 이기붕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나이가 많은 이승만이 정권을 꼭 잡겠다고 생각을 해야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권력욕이 무엇인지 사퇴를 한다고 하고서도 그것을 취소하고 계속 남아있으려고 했으며 하와이로 도망갈 때도 길어도 2달을 넘기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살아서는 한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33] 1965년 7월 하와이에서 죽었다. 물론 2인자인 이기붕의 입지는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인자인 이승만의 책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현재의 평가로서는 이승만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기붕은 뭐라할 것도 없이 간신 취급을 받으며 이승만 옹호자들에게도 미움받는다.[34] 이승만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도 이기붕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에게 몰릴 욕을 4인방에게 몰아버리는 것처럼 여러가지 이승만에게 몰릴 비난을 이기붕으로 몰아버리는 것도 있어서 아예 이승만이 하야하거나 부정선거에 얽힌 것도 모두 이기붕 탓이라고 책자로 비난하고 이기붕만 없었더라면 이승만이 비참하게 해외에서 객사하지 않았을테고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 이렇듯 이승만을 옹호하는 보수 쪽에서 이기붕 탓으로 돌리며 이승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지만 반대로 이승만을 비난하는 쪽에서는 그러한 간신배 이기붕을 오냐오냐하고 차기 권력자를 물려주려고 한 것만 봐도 이승만도 다를 게 없었다고 깐다. 이승만 정도 되는 정치인이 긴 집권 기간 동안 휘하 인물됨을 알아보지 못했을까.[35] 이후 박정희와 2인자 차지철의 관계에서도 반복되는데 양쪽에서 차지철이나 이기붕이나 신나게 비난을 듣고 있으며 한쪽은 최고 권력자를 옹호하기 위한 악역으로서 희생양, 한쪽은 그 권력자의 2인자로서 그 놈이 그놈이라는 평가.
[1] 음력 1896년 12월 20일.[2] 효령대군 18세손, 시조 41세손 '起'자 항렬.[3] 현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4] 判義禁府事. 종1품.[5] 黨與. 한편이 되는 무리.[6] 《선원속보(璿源續譜)》에 의하면 조부 이석우(李錫宇)는 계축년(癸丑:1853년)에 태어나 신사년(辛巳:1881년)에 별세했다. 아버지 이낙의(李洛儀)는 병자년(丙子:1876년)에 태어났다가 1904년에 사망했으니 28세에 사망한 것이 된다.선원속보-여양군파 계보.[7] 교리(校理)를 지낸 은진 송씨 송규원(宋圭元)의 딸로 을해년(乙亥:1875년)에 태어났다.[8]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9]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에 있는 국일관이다. 개점 당시부터 현재까지 존속되어 온 상호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지금은 주인도 바뀌고 용도도 달라져 일반 상가 건물로 쓰인다.[10] 당시 아내 박마리아가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여학교 교수 남편이 요정을 운영한다고 말이 많았고 기사화도 되었다.[11] 사실 박마리아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전국을 돌며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12] 물론 족보에서도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13] 중앙대학교 설립자, 초대 이사장 겸 총장. 초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냈으며(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이후 대한여자국민당을 조직해서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중앙대학교 학생들 앞에서 "내가 부통령 선거에 떨어져서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사람들이 욕할 수 있다. 데모하지 마라"라는 자뻑성 연설을 한 적도 있다. 실제 이승만에게 토사구팽당한 이후로는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부통령 선거 결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14] 이때는 아마 자신이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한 국일관 지배인으로 일했던 경력이라거나 아내 박마리아의 지대한 친일 경력들이 문제가 되었을 수 있다. 자신은 그렇게 친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백선엽보다 오히려 옹호하기 좋았을 것이다.[15] 신성모는 나중에 일본으로 쫓겨간다.[16] 사실 이기붕은 마누라가 구축한 인맥으로 출세했을 뿐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박사 하나도 못 땄다고 까였다. 당시에 정계에서 리더로 인정받으려면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고 영어에도 능통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는데 이기붕은 민주당 신파 리더이고 법학박사였으며 초대 주미대사까지 한 장면보다 스펙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다. 일제하 미국 유학파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주구가 되지 않으면 버로우타는 이유도 있어서 그랬다.[17] 조봉암은 훗날 간첩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한다. 자세한 것은 진보당 사건 항목 참고.[18] 자세한 것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참조.[19] 야인시대에 묘사된 모습을 보면 치졸함 그 자체다. 처음에는 이정재에게 좋은 말로 출마 포기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자 선거 운동 중이던 동대문파를 전원 체포한 다음 협박해 결국 출마를 포기하게 만든다. 애초에 이정재가 정치 깡패가 된 것도 김두한국회의원이 되자 자신도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여당이던 자유당에 줄을 대고 대가로 궂은 일을 해주는 과정에서였다. 언제까지 깡패질에 만족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고 언젠가는 어엿한 국회의원이 되려한 을 산산조각낸 것. 이에 이기붕을 저격하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려던 것을 후배이자 경무대서장(현 청와대 경호실장)인 곽영주의 만류로 그만두었다.[20] 실제 이승만은 5년 뒤인 1965년에 사망했다. 4.19 혁명 없이 1번 더 재선했다면 4년 대통령 임기를 마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사망하기 3년 전인 1962년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재선을 했다 하더라도 건강 악화로 사임했을 수도 있다.[21]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의 아버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22] 이때 이기붕의 저택에서 수박을 발견한 군중들은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다. 일반인들은 제철 과일도 먹기 힘든 시대에 수박을 4월에 구해서 먹는다는건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치이기 때문이다.[23] 이때 6군단 사령관이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 강제 예편당한 강영훈이었다.[24] 이기붕 사후에 양자를 들였는데 그의 7촌 조카인 이강복(李康福)으로 딸만 둘이 있다.[25] 였다는 얘기도 있다.[26] 서대문 을[27] 이천군[28] 제1공화국에선 청년기는 이계인이 맡았다.[29] 제1공화국에서는 뒤이어 나온 무풍지대나 야인시대처럼 가족들을 만난 이강석(길용우)가 직접 총으로 쏘고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는 반면 제2공화국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가 머무르는 건물로 들어가고 잠시후 총성이 5발 울리는 것으로 간접 표현하였다.[30]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승만 역으로 나온다. 최불암 이후 이승만 배역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최불암이 MBC 외의 다른 방송사 출연을 꺼렸고, 정작 MBC에서는 이승만 나오는 작품을 자주 만들지 않게 된 탓에 권성덕의 캐스팅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31] 무풍지대에서 김영삼 역으로 나온다. 실제로 이 배우는 외모가 대통령이 된 90년대 당시의 김영삼과 매우 닮았지만, 이승만 정권 시절 김영삼은 20대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성우 겸 배우인 정명준이 맡았다.[32] 그런데 이승만은 이후로도 5년이나 더 살았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만일 3.15 부정선거가 일어나지 않거나 부정선거가 일어나도 4.19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승만은 1960~1964년까지의 임기를 무사히 끝마쳤을 것이고 1964년 선거에 나서서 대통령이 되었다면 역사에 대한민국 대통령 제1대에서 제5대까지는 이승만이 대통령이었다고 기록되었을 것이고 재임 기간도 17년이라고 기록되었을 것인데 이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박정희의 기록을 1년 정도로 앞선다. 대한민국 최장 기간 동안 재임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가능성도 높으며 당시에는 80세 넘은 노인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기는 했다.[33] 1962년 입국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34] 이승만이야 논란의 대상이어도 어쨌든 독립운동가였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과도 크지만 공도 있기에 옹호자들이라도 있을 수 있지, 이기붕은 옹호해주려고 해도 옹호해줄 정도로 업적이 없다.[35] 다만 이승만의 용인술은 이기붕을 빼더라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예시로 대한민국 국방장관들 중 최악으로 꼽히는 신성모가 이승만 정부 시절의 국방장관이다. 심지어 사사오입 개헌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에서는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했을 정도다. 당대에도 용인술은 개판이라고 평가받았으니 말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