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직계 14대 종손이며, 이문영은 그의 조부이다.
2. 생애
이응렬은 1914년 10월 16일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서 이종옥(李種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종옥은 1914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태을교에 입교하였다가 1919년 반일 발언을 한 혐의로 태 70도를 맞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사람으로, 이응렬은 일찍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아버지로부터 배양받았다. 한편,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부 간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에 거주했다.
이응렬은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경성부에서 조선곡자(朝鮮麯子)주식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그가 1941년 5월부터 11월까지 하숙을 하던, 경성부 전농정(현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민흥식(閔興植)의 집에서 동료·하숙인들에게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41년 7월 하순 하숙집의 동료 임정호(任程鎬)[3] ·권용옥(權容玉)[4] 등에게, "나는 이순신의 종손으로서,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육·해군 대장으로서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격파하였는데 과거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전쟁을 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내선일체는 지극히 어려우며, 현재 조선의 상태로는 조선은 독립할 수 없지만 언젠가 시기가 오면 자치국 또는 독립국이 될 것이다. 우리 조선인은 확실한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2
이에 1942년 4월 초순경 임정호·권용옥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이응렬은 과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자신의 부친 이종옥이 평소 들려주던 이야기를 전달한 것일 뿐이라고 했는데, 부친 이종옥은 1941년 2월 15일 사망했으나 사망하기 전인 1941년 1월 초, 조선의 실정을 이야기하며, "현재 조선의 상태로서는 조선인은 무기도 없고 모두 일본화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실현이 어렵다. 다만, 만약 조선인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조선인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조선도 독립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이렇듯 이들은 서울 용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같은 해 5월 8일 관계자 11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다.
1943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후에는 박헌영과 친하게 지내면서 친척 형제들과 함께 남조선로동당 활동에 깊이 관여하여 빨치산 행적이 있다. 그러다가 정부의 좌익 소탕으로 인해 4촌과 6촌 형제 등 8명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이응렬 만큼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충무공의 종손이니 살려둬야 한다고 배려해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59년 고향 근처인 영인면 아산리에서 아산정미소(牙山精米所)를 경영하며# 정부 수매곡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 1월 6일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지정하고, 3월 18일 아산 현충사를 사적 155호로 지정하는 등 이순신장군 성역화 사업을 단행하자 이에 적극 협조하였다. 한편, 당시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응렬에게 충무공 종손이 국회의원을 한 번 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출마를 권유하자, 그는 국회의원직을 맡게되면 빨치산 전력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해진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1974년에는 난중일기를 국역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70세되던 1984년경부터 심한 천식을 얻어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며, 투병생활을 지속하다 1993년 1월 17일 별세하였다.
201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영정을 그린 장우성 화백은 충무공 종가에 사흘간 머무르면서 이응렬을 관찰하고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