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모

 


'''최초 무신 출신 배향공신
왕국모
'''
'''시호'''
'''경렬공(景烈公)'''
'''수직'''
'''수사공(守司空)'''[1]
'''직위'''
'''좌복야(左僕射) - 참지정사(叅知政事)'''
'''본관'''
강릉 왕씨(江陵 王氏)(?)
'''이름'''
국모(國髦)
'''생몰연도'''
? ~ 1095년 10월 (음력)
1. 소개
2. 일대기
2.1. 이자의의 난 이전
2.2. 선종 붕어, 헌종 즉위
2.3. 이자의 처단
2.4. 천자의 은혜를 받다
3. 평가
4. 기타
4.1. 최초 무관 출신 배향공신
4.2. 가장 높이 올라갔던 무관
4.3. 가족관계


1. 소개


고려의 무신이자 문신. 숙종 명효대왕의 심복으로 이자의의 난 당시 큰 공을 세운 킹 메이커이다.

2. 일대기


왕국모는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지만 굉장히 짧다. 오히려 타 인물 열전에서 더 많이 등장한다. 고려사 소태보, 이자량 열전, 이자의 반역열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1. 이자의의 난 이전


왕국모의 초기 생애는 알 수 없다. 고려사 왕국모 열전에 따르면 국모는 평생 무예를 수련했다고 기록했고, 그는 무관직을 제수하며 커리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위 무관직인 정3품 상장군까지 올라간 왕국모는 어떠한 인연으로 문종 인효대왕의 아들 계림공[2] 왕희와 친해진다. 국모는 그의 신하가 되어 문관 소태보, 무관 고의화 등 인물과 같이 행동하게 된다.

2.2. 선종 붕어, 헌종 즉위


이 정도였다면 왕족과 친하게 지낸 그저그런 인물이다. 왕국모가 역사에 기록된 이유는 고려 왕실 정계가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왕위 상속을 형제간에 물려주는 걸 선호한 것이다. 태조의 유훈 10조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숙종의 아버지 문종에게, 선종도 에게 보위를 이어받았다.
선종이 젊은 나이에 건강이 안좋아지자 사람들은 전례에 따라 선종의 동생 계림공이 즉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림공 또한 티를 안낼 뿐 본인도 은근 기대하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문제는 선종이 어린 아들 왕욱을 태자로 삼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할려는 의도를 보였고, 결국 선종 사후 정말로 어린 태자가 즉위한 것이다.
차기 임금 헌종의 나이는 고작 만 11살이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이리 어리니 정계는 곧바로 통제가 안되기 시작했다. 헌종의 어머니인 사숙태후수렴청정을 통해 국정을 다잡으려 했으나 이미 분란의 씨앗은 커지고 있었다.
계림공은 계림공 대로 분노한 듯 하다. 그 모두가 본인을 차기 국왕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형이 끝까지 자기 아들을 올려놓았으니 분노의 이유를 알만하다.
계림 공작 왕희 뿐 아니라 중추원사(中樞院使)[3] 이자의 또한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자의의 여동생은 선종의 궁주가 되었는데, 아들 한산후[4]를 낳았다. 이자의는 기왕 선종의 장남이 등극했으니, 그를 폐위하고 자신의 조카인 선종의 차남을 옹립하기로 마음 먹는다.
결국 조정은 계림공파(계림공) vs 이자의파(한산후) 양상을 띄게 되었고, 이 정국 속에서 왕국모가 활약하게 된다.

2.3. 이자의 처단


고려사 이자의 반역열전엔 이자의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고, 1095년 7월 경신일에 반란을 도모했다고 한다. 눈치를 챈 계림공은 이자의가 일어나기 전에 죽일 생각으로 소태보와 왕국모를 소환했다.[5]
계림공의 말을 들은 왕국모는 명복궁에 있던[6] 계림공을 호위해 본궐로 향했다.
본궐에 도착한 왕국모는 처남 왕자지를 시켜 궁궐 대문을 닫아 감시하게 했고, 고의화를 시켜 이자의를 체포, 선정문(宣政門)[7] 앞으로 끌고 가 목을 베어 죽였다. 이자의의 아들 2명[8]과 수하 15명도 선정문 앞에서 죽였다.
계림공과 소태보, 왕국모는 곧이어 50여명을 남쪽 지방에 유배 보내고 그들의 가족을 양계에 보내 노비로 강등시켰다.[9]

2.4. 천자의 은혜를 받다


헌종은 이자의 처단의 공로를 들어 왕국모를 상서성 판병부사(判兵部事)[10]로 승진시켰다. 왕국모가 병부 즉 국방부의 장관이 됐다는 건 계림공이 군권을 차지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소태보는 상서성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됐는데 이부는 인사권을 담당한 부서였으니, 계림공은 군권 및 임명권까지 모두 차지하여 조정을 장악한다.
결국 헌종은 쓸쓸히 계림공에게 양위하고, 계림공은 즉위해 숙종이 된다.
숙종은 즉위 후 자신을 도와준 국모에게 판병부사(判兵部事) - 상서복야(尙書僕射) - 참지정사(叅知政事)[11] - 주국(柱國)[12] 관작을 주었다.[13] 또한 수사공(守司空) 직을 주어 삼공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천자를 만들어낸 왕국모는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숙종의 비호 아래 조정을 장악한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는지 권력을 가진지 3개월만인 1095년 10월 병술일에 죽었다. 숙종은 왕국모를 애도하며 그의 생전 관작을 그대로 추증하고 시호 경렬(景烈)을 내렸다.

3. 평가


왕국모는 일개 무관에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라인을 잘 탔고, 또 과시적인 활약을 벌여 숙종의 눈에 들었다. 자신의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한, 어찌보면 문관보다 더 정치를 잘했던 무관인 셈이다.

4. 기타



4.1. 최초 무관 출신 배향공신


태조 ~ 정종까지는 개국공신들이 쟁쟁하다보니 장수들이 배향공신에 올랐다. 허나 광종 대부터 공신들이 대거 죽고 성종 대에 대대적인 정부조직 재편성이 시행되어 무관은 더 이상 개국 초 같은 권력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왕국모는 성종의 정부 재편성 이후 최초로 태묘에 배향된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무신정권이 개부(開府)하여 관료들은 무관직을 필수로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문극겸, 윤인첨 등 문관들은 무관직도 겸하여 중방회의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니 이들도 무관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다 진성 무관인 최이도 배향공신에 올라갔다. 허나 이 때는 나라가 비정상이었으니, 정상적인 방식으로 국왕과 더불어 태묘에 모셔진 무관은 왕국모 하나 뿐이라고 할 수 있다.

4.2. 가장 높이 올라갔던 무관


무신정권과 척준경 등장 이전까진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무관이다. 고려사 왕국모 열전엔 사람들이 '무관이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국정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할 것이다.'하고 불안해 했다고 기록되있다.
왕국모 이전엔 지채문 장군의 상서복야, 강민첨 장군의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 병부상서(兵部尙書) 및 천수개국남(天水縣 開國男), 하공진의 공부낭중 정도가 가장 높았는데, 왕국모는 병부상서, 상서복야를 넘어 문하시중, 평장사의 바로 아래인 종2품 참지정사를 찍는데 성공했다.[14]
왕국모의 기록은 꽤 오래 깨지지 않다가 정8품 천우위 녹사 출신인 척준경이 평장사를 받으며 갱신한다. 후엔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관이 문하시중을 먹는 건 당연해져 의미가 없어지긴 했다.

4.3. 가족관계


왕국모의 출신, 부모 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내는 해주 왕씨로, 왕자지의 누나다. 자식은 어린 아들이 있었다고 하며 '정항 묘지명' 기록으로 딸 한 명이 있었다고 한다. 딸의 작호는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으로 정항과 결혼해 아들 4명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왕국모의 외손자인 정서(鄭敍)는 '''후 가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제작하게 되어 현 대한민국까지 이름을 알린다.'''
친딸의 작호 강릉군부인의 뜻은 '강릉군을 봉지로 받은 부인'이다. 고려는 보통 이성제후의 봉지를 본관에 따라서 줬는데 이를 바탕으로 왕국모는 강릉 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왕국모는 강릉 왕씨 가문일 가능성이 높다.[15]
[1] 삼공 직 중 하나. 사후 추증.[2] 鷄林公. 계림을 봉국으로 받은 공작. 계림신라의 별칭이다.[3] 중추원의 장관.[4] 漢山侯. 한산을 봉지로 받은 후작. 한산은 지금의 서울특별시다.[5] 당시 소태보는 중서문하성 평장사, 왕국모는 상장군 겸 상서성 판이부사였다. 즉 소태보는 문(文)으로, 왕국모는 무(武)로 계림공을 지키고 있던 셈.[6] 계림공의 아내는 명복궁을 하사 받은 명복궁주였다. 그래서 잠시 계림부를 떠나 명복궁에 있었던 모양이다.[7] 만월대 궁궐 내, 황성, 나성 중 궁궐 내의 대문으로 추정된다. 황성과 나성엔 동명의 문이 없고 궁궐 내에 선정전이 있어 선정전의 정문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8] 이들 중 한 명은 흥왕사 주지였다.[9] 고려는 문벌귀족, 중간층, 일반 양민, 노예로 구분되는 신분제 국가였다.[10] 병부의 장관.[11] 중서문하성 서열 3위 직위. 종2품[12] 2등급 훈위.[13] 소태보는 숙종 즉위 후 문하시중이 됐다.[14] 인천 이씨 가문이자 예종 ~ 인종 대 신하인 이자량도 음서제를 통해 좌우위 소속 정8품 무관직을 시작으로 평장사까지 가 왕국모보다 높긴 한데, 이자량은 이자의와 연루돼 남부로 귀양간 50여명 중 한 명인데도 살아 돌아와 다시 조정에 나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문벌귀족이나 마찬가지다. 출신도 이자의와 같은 인천 이씨고.[15] 강릉 왕씨의 시조는 '왕예'로 본디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인 강릉 김씨의 '김예'였지만 태조의 사성정책으로 왕씨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