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보
1. 개요
고려의 관료. 출신은 베일에 싸여있으나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왕국모 등과 함께 숙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배향공신에까지 이른다.
2. 생애
한국에 드문 소(邵)씨로 가계를 알 수 없고, 처음 관리로 등용된 배경도 알 수 없다. 문종(재위 1046~1083) 말에 호부시랑에 임명된 뒤 선종 초에 형부상서, 서북면병마사, 이부상서, 좌복야 등 관직이 여러 번 바뀐다. 선종 9년(1092)에 참지정사, 곧이어 권판서북면병마사 겸 중군병마사로 임명되고 이듬해에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병부사로 승진한다.
헌종 즉위년(1094)에 이자위와 함께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에 임명되고, 헌종 원년(1095) 7월 반란을 모의한 이자의의 진압에 가담한다. 소태보는 계림공에게서 직접 이자의를 저지할 것을 전달받았고, 왕국모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게 한다. 같은 해 9월 소태보는 특진 수사도 판이부사에 임명되어 이자의의 난을 진압한 관료 중 가장 먼저 삼공#s-1.2.1에 올랐고, 또 10월에는 수태위 문하시중으로 수사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김상기, 수사공 유석보다 높은 명예직에 임명된다.
숙종 원년(1096)에 연덕궁주 유씨, 원자 왕우 등 숙종 가족이 베푼 연회에 참석하는 등 측근으로서의 행보를 보인다. 숙종 3년(1098) 태자를 세우고 첨사부를 정비하면서 태사에 임명되어 태부 김상기, 태보 최사추와 함께 삼사#s-2.2.2에 오른다.
숙종 7년(1102) 국자감 폐지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폐지의 근거로는 국자감에 드는 비용이 막대해 민간에 폐해를 끼지고, 중국 왕조에서 시행하는 법을 고려에서 그대로 따르기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제시했으나, 숙종은 답하지 않았다. 고려시기 사학이 문벌귀족(또는 사대부)과 연결되어 인재 선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소태보는 문벌귀족의 입장에서 국학의 발전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과 충돌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듬해인 숙종 8년(1103)에 70세가 됐음을 이유로 사임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수태부 판호부사 서경유수사에 임명됐다. 결국 다시 문하시중으로 물러났으며 이듬해인 숙종 9년(1104) 수태사를 더하고 협모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시호는 충겸(忠謙)으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