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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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泰鎭
1943년 10월 14일 ~
1. 개요
2. 상세


1. 개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전직 교수.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 기간(2010.09.27~ 2013.09.2)에 11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였다.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3리 출신.[1]#

2. 상세


서울 성동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학과 학사,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1977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에 임용되었다. 당시 이태진 교수의 세대에서는 석사학위만 받고 교수 임용이 가능했고, 특정 분야에서는 학사 출신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이 당시는 한국 사학계의 태동기로, 교수진은 매우 많이 필요했지만 학위 소지자는 적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태진 교수와 동시기에 활동했던 역사학자의 경우 최승희, 최병헌, 이기동, 김두진, 정만조 교수 등이 박사학위 없이 정년퇴임을 했다. 이후 2005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기 시작하고 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정확히는 교수 채용시 박사학위가 필수가 되는(음악, 미술계 등은 제외) 경향은 보다 뒷세대에서 나타난다.
특정 시대를 전공한다기보다는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내는 편이다. 특히 2000년에 낸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반박과 재반박이 이어지고 토론회가 열리면서 크게 주목 받았다.# 그는 개화파와 독립협회 위주의 시각으로만 그 당시를 평가하고 고종대한제국 연구는 미진한 점을 지적하였다.[2] 이는 대한제국광무개혁을 폄하하는 일본의 학설과 맥락을 같이하는 기존의 통설을 깨는 학설이었다. 그의 학설은 다른 국사학 교수들 및 여러 분야에서 대한제국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학설에 힘입어[3] 대한제국 건국 120주년인 2017년에 중앙일보에서 연속 특집으로 대한제국 기고를 실었고 현재도 꾸준히 연구 중이다.# #
2004년 정년퇴임 직전까지는 대표적으로 광무개혁 재평가나, 소빙하기 등의 조선사 관련 학설을 제기하였으며, 근래에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 비판하였다.
원래 조선시대 정치사·사회사 전공이었다. 그러다 서울대 규장각도서관리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88년부터 근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1992년에 규장각 장서 속에 포함된 대한제국 시기 정부 문서들을 영인해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다 고종·순종 두 황제의 명령서인 조칙, 칙령 묶음에서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위조된 문건 수십 점을 발견한다. 이 문건은 일본의 통감부가 정미조약(1907)을 강제하면서 제정한 법령들인데 최종 결재 과정에서 황제 서명을 위조해 처리한 것으로 이 때서야 밝혀진 것이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사 전반을 다시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종에 대해 옹호 일변도의 시각을 보이고 있어서 비판받고 있다.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이던 당시 박병선 박사와 연대하여 조선왕조의궤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후 외규장각 도서가 국내로 반환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 김정행대한체육회 회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2] 80년대까지만 해도 반정부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요구가 높았고 당시 국사학계도 이 같은 맥락을 같이하여 갑신정변, 독립협회, 동학농민운동 등의 연구에 집중하였고 고종과 대한제국 연구는 복벽론자나 왕조사관으로 몰려 기피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적으로도 좌우 전부 망국책임론과 근대 왕조에 대한 혐오가 팽배했었고 그러다보니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채 일제강점기 때의 연구에 머물러 기존의 통설이 반복되었다.[3]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