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正殿) 덕수궁 석조전'''[1]

1. 개요
2. 행정 부문
3. 교육 부문
4. 토지 개혁
4.1. 양전사업
4.2. 지계발급사업
4.3. 역‧둔토 정리사업
4.4. 광무양전 연구와 근대성 논쟁
4.4.2. 토지대장연구반
4.4.3. 그 외
5. 경제 부문
5.1. 금융과 화폐
5.2. 상공업 진흥
5.3. 수출과 부설 채굴권
6. 국방 부문
6.1. 육군
6.2. 해군
6.3. 간도 영유권 분쟁
7. 실패와 한계
7.1. 부족한 재정
7.2. 인재의 한계
7.3. 시간의 부족
8. 관련 문서


1. 개요


1897년 대한제국을 건국한 고종 황제가 시행한 근대화 개혁을 말한다. 고종의 연호를 사용한 광무 시기는 고종이 퇴위한 1907년까지의 기간이지만 1905년 을사조약 때부터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제약을 받았다. 광무개혁으로 한성부였던 서울의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였고 지방은 13로 개편되었다.[2] 대한제국군이 창설되었고 12개의 신문발행과 시가지의 정비와 근대건축, 전기 ‧ 전신 ‧ 전차 도입과 같은 기간산업을 도입하였다. 공문서를 국문화 ‧ 국한문화하였고 근대 관립 ‧ 사립 ‧ 기술 ‧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산은행을 설치하고 국산기업의 설립을 장려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등 빠르게 근대화하였다.
광무 개혁의 이념은 동도서기론이나 중체서용론에 기반한 '''구본신참'''[3]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갑오 개혁 이전 옛 제도로 복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 철폐를 뒷받침하는 법적 조치나, 조세 및 토지 제도의 개혁, 아울러 탁지부를 중심으로 한 재정 운영 체계는 광무 개혁이 갑오개혁의 일정 부분은 그대로 계승하였다. 여기에 을미개혁 때 실패했던 단발령을 재개하고 복식을 개편하였다.[4]
광무개혁은 근대 개혁 중 다양한 측면에서 나름대로 효과를 본 유일한 개혁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고 평가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내정에 개입함으로써 광무개혁은 끝을 맺었다.

2. 행정 부문


이 시기 대한제국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1896년 9월 28일 내부령 제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발령하고 주미 공사를 2년간 지냈던 이채연이[5] 한성부판윤을 맡아 추진하였다. 그는 워싱턴 D.C.를 모델로 하여 지금의 서울시청 일대를 방사형 도로로 만들고 간선도로를 연결시킨다. 현재의 광화문 광장과 시청 앞 광장의 모습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황토현(현재 광화문 부근) ~ 흥인문, 광통교(광교) ~ 남대문의 도로 폭을 50척으로 하였고 기존의 도로를 침범하는 무허가 가옥을 철거시키고 도로에서 상거래를 하는 행위들을 철저히 금지했다. 오수를 처리할 배수시설과 수도도 정비하였다. 고종에 반대하던 독립협회조차 서울개조사업에 관해서 칭찬하는 기고를 신문에 실었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경복궁건청궁에 가설한 전등은 그 시점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것이었는데 1900년 4월 10일부터는 종로 거리를 시발로 서울의 모든 대로에 전기 가로등까지 켜지기 시작했다. 1896년 10월 2일에는 덕수궁~인천 사이에 시외 전화가 개통됐고, 서울시는 곧 100회선의 전화를 개설했다. 서울의 전화 개설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76년 전화를 발명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고, 도쿄의 전화 설치와 거의 동시였다.

1899년 5월엔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윅(H. R. Bostwick)[6]가 계획하고 일본인 기술자와 운전수를 초빙하여 노면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1894년), 방콕(1894년), 바타비아(1899년)를 제외하고 도쿄(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하이(1908년 개통), 베이징(1924년 개통) 등 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7].

1899년 9월엔 대한제국으로부터 철도부설권을 부여받은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 의해 인천~노량진 간 철도(경인선)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이 엄청난 변화를 당시 서울에 방문한 외국인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오스트리아 작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본 ‘1894년 여름 서울’의 풍경은 참담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오물과 똥이 천지인 도시.

서울에 밤이 찾아오면 온 천지가 깜깜하고 여기저기 겨우 희미한 불빛만 깜박거릴 뿐.

(Ernst von Hesse-Wartegg, Korea 1894, 54쪽, 131~132쪽) #

그러나 이로부터 7년 뒤 서울 시가지는 넓은 방사형 도로망과 근대식 건물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가로등이 밤길을 환하게 밝혔다. 짧은머리에 서양식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전차를 타고 전화와 전신을 이용하게 된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베이징·도쿄·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훨씬 순수하다.#

지방행정구역도 개편하였다. 을미개혁 때 추진한 23부제를 없애고 기존의 8도 중 삼남의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누어 13도로 개편하였다. 제주는 유일하게 목으로 두어 13도 7부 1목 331군 체제를 갖추었다.
13도 :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도,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7부 : 광주부,[8] 개성부, 강화부, 인천부, 동래부, 덕원부, 경흥부
1목 : 제주목
오늘날 대부분의 도와 시군의 구역과 명칭이 이 때 만들어졌다.

3. 교육 부문


교육근대화가 시작된 것도 대한제국 시기였다. 정부 공문서의 국문화 혹은 국한문화가 시행됐다.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은 ‘국문 생활’의 막을 열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한글의 기본 형태는 이 시기에 거의 완성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면 고종은 국문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선포한 데 이어 애국가와 무궁화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지정됐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붐을 이루며 신설됐다. 1909년 11월 당시 대한제국의 국공립과 사립학교는 모두 2236개였다.[9] 그러나 학교 설립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급격히 줄었고, 이후 조선교육령에 따라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는 학교가 세워졌으며 서당이 늘었다.[10]

4. 토지 개혁


숙종 이래 180년 간 양전(토지조사)이 없어 기록에 따른 토지와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고 조세 조세 수취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외국의 공사관들은 근대화에 관한 여러 조언을 하면서[11] 근대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선 세금제도 개선과 세율을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토지는 조세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만큼 필수적이어서 이에 대한 논의로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전 국토를 대상으로 양전사업과 지계발급사업, 역·둔토 정리사업을 실시하였다.

4.1. 양전사업


1898년 6월 23일 내부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는 토지측량을 건의하면서 양전사업의 찬반이 대립하였다. 의정부 회의에서는 박정양을 포함한 4명이 찬성한 반면 시행이 힘들다는 6인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최종 검토한 고종은 직권으로 결정하여 양전아문과 관련규정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대한제국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광무양전이라 한다.
이 때부터 집세 개념이 등장하여 서울은 가옥세가 부과되었다. 또 당시 외국인들은 땅주인이 불분명한 국내의 땅을 사들여 분쟁이 잦았는데 이에 외국인이 소유한 나대지는 원천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여 통제를 강화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다만 외국인이 현재 거주 중인 집에는 소유권을 허용하였다.
1899년 4월 1일 남대문을 시작으로 서울 측량이 진행되었다. 이어 청계천에 이르는 도로 인근과 외국 공관, 교회, 상점 등 외국인 거주지도 측량하였다. 측량이 진행되면서 각국 공사관과 외국인들은 이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 공사관에서는 외국인 토지 소유에 대해 합법화를 요구했다. 1899년 6월 20일에는 아산군에서 3개월동안 시범양전사업을 하였고 이후 전국에서 양전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124개 군에서 양전이 완료되었고 양전아문 이후 설치된 지계아문은 94개의 양전을 완료하여 1903년까지 218개 군에서 양전을 완료하였다. 이 광무양전으로 종래의 토지보다 훨씬 많은 토지를 찾아냈으며, 호구와 가옥조사도 병행해서 진행되었다.

4.2. 지계발급사업


양전 사업이 소유주와 경작자 파악이라면 지계발급은 그 소유권을 국가가 공인하는 사업이었다. 각 군마다 양전이 완료됨에 따라 1902년 1월에 지계아문이 출범하였고 곧 양지아문과 통합하여 양전사업과 지계발급사업을 같이 담당하였다. 지계아문의 양전사업에서는 양전척을 미터법의 길이에 맞추어 1부=1아르,1결=1헥타르로 일치시켰고 1903년까지 양지아문에서 실시한 양전과 합쳐 218개 군에서 양전을 완료하였다. 지계발급은 1902년 말부터 강원도 전 지역에 시행되었고 1903년 11월 직산을 시작으로 충남에서도 시행하여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계발급사업의 조항에는 외국인의 토지거래를 막고 토지를 환수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을 통해 외래자본의 토지잠식을 국가가 막고자 했으나 외국인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1904년 1월 러일전쟁의 기운이 감돌면서 지계발급사업은 중단된다. 그리고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지계사업은 아예 폐지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중에도 일본의 개입 아래 양전은 그대로 실시하였는데, 이후 대한제국이 병합되고 나서 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 때 활용되었다.

4.3. 역‧둔토 정리사업


갑오개혁 때 을미사판이라 부른 역·둔토 정리사업이 있었다.[12] 이 역‧둔토를 탁지아문과 공무아문이 관리하게 하고 실제면적과 경작자 및 도조를[13] 파악하고 책정했다. 소작지도 경작자 한사람 당 10두락으로 평준화하였다.
광무개혁에선 을미사판의 연장선으로 역·둔토 관리를 내장원에 이속시켜 광무사검을 실시하였다. 역·둔토는 역참과 병영 근처에서 일하는 대가로 도조율이 민전에 비해 월등히 낮은 혜택을 받았으나 갑오개혁 이후 종래의 역참과 병영이 폐지되고 유명무실해 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역·둔토에 해당하는 사유지 중 사유 입증이 어려운 곳을 국유지에 포함시키고 도조를 종래의 2∼3할에서 3∼4할로 인상하려 했으나 경작인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에 국유지였던 아문둔전(衙門屯田 : 관아의 토지)과 궁방전(宮房田 : 궁방이 소유한 토지 즉, 왕실이 소유한 토지) 등은 실질적으로 관이나 궁에 의해 소작료만 거둬지거나, 아니면 관리가 되지 않은체 인접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어, 문서상으로만 국유지이지, 실질적으로는 경작 중인 농민 소유에 가까워 소유권이 복잡하게 얽힌 중층적 혹은 다층적인 소유 상태였다. 국유 분쟁지는 크게 무토(無土)와 유토(有土)로 나뉘었는데 무토(無土)는 토지의 세금 수입만 궁방과 아문둔전이 가지고 있는 사실상의 민유지였고, 유토(有土)는 궁방과 아문이 직접 매입하거나 관리하는 토지였다. 유토 중에서도 궁방이 매입과 관리를 다하고 있는 제1종유토와, 실질적인 관리와 개간이 농민에 의해 전담되어 민유지화된 제2종유토로 나뉘었다. 그리고 갑오 개혁당시 사실상의 민유지인 제2종유토가 전체 유토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광무양전 이전 갑오 개혁으로 이러한 토지를 구분하지 않고 국유지로 편입하여 분쟁 소요가 잇따랐는데, 이 광무사검 때도 마찬가지였다.[14]
그러다 1904년에 민전과 동일하게 5할로 인상하는 분반타작제를 규정은 하였으나 역시 큰 반발을 겪어 시행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1907년 일제의 통감부는 내장원에서 탁지부로 이속시켜 도조율을 4~5할로 인상하였고 1908년부터 모든 역둔토를 국유화하였다. 1912년 3월부터 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에 불하하고 일본인 소농민을 대량 이주시켜 자작농으로 육성한다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인 이주자는 1927년까지 5,908호에 불과할 정도로 적어 동척농업이민계획은 실패하고 지주형 이민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기존 역둔토의 경작인들의 반발이 거세어 문화통치로 전환한 1920년부터 기존 역둔토의 경작인들에게 10년간 완납조건으로 토지를 불하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까지 불하대상 토지의 96%가 계약이 되었다. 이렇게 소작농들에게 불하된 역둔토는 가혹한 불하조건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이 소작농민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전되지 않은 역둔토는 동척과 대지주가 매입하였다.# # #

4.4. 광무양전 연구와 근대성 논쟁



광무양전으로 작성된 양안에는 전답주를 가리키는 '시주'와 경작자를 나타내는 '시작'이 등장한다. 1970 ~ 1980년대에는 김용섭의 주도 하에, 광무양전의 사업을 '근대적인 지계 사업과 근대적 소유권을 확보한 근대적 개혁 정책'으로 평가하는 학설이 있었다. 당시 연구는 양안의 성격이 일제강점기의 토지대장과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었고 양안에 '主'(주)로 등재된 사람은 모두 소유주의 실명인 것으로 보았다.

4.4.1. 식민지 근대화론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조석곤, 배영순, 이영훈 등의 학자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었다.[15] 양안 상에 기재된 이름 대부분이 호명·자·조상의 이름 등으로 대록되었고 일부만이 실명이라는 점을 들어, 소유관계가 실제보다 영세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토지 사유권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광무양전에서의 시주(時主)는 한시적으로만 토지 점유권이 인정될 뿐이므로 궁극적인 토지의 주인은 (조선의 정치적 전통으로 볼 때) 국가 즉 '왕'이므로, 왕토사상 내지는 국가적 토지 소유가 대한제국기에 더 강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근대적인 토지 사유권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확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토지대장을 기준으로 광무양안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4.4.2. 토지대장연구반


시주가 토지소유주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이들의 반론으로, 1990년대에는 왕현종과 최윤오 등의 사학자를 중심으로 토지 대장 연구반이 결성되어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은 바 있다.[16] 이들은 광무양전 이전에 작성된 토지 문서인 '양안'에서 토지의 주인(지주)인 기주 외에도 시주를 양전조사 당시의 시점에서의 토지소유자로 규정하고, 광무양안에서는 다양하게 쓰던 주(主) 용어를 시주로 통일시킨 것에 주목한다. 광무양전은 특별히 민(民)의 토지 사유권을 제한하여 시주 규정을 두었다기보다는, 이 사용 사례를 계승하여서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시주'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종기록인 양안 뿐 아니라 야초와 중초책[17]을 통해 조사과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에서 작성한 '중초책'에는 땅 주인이 직접 신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야초에 기록된 과정을 보면 지주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경작자나 마을 어르신들이 대신 신고하였다. 또 본인의 실명 대신 호명 또는 가명을 쓰거나 땅을 두고 조상과 형제들의 이름을 나누어 적어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양안과 호적 간에 이름이 다른 경우가 빈번했는데, 그 당시 향촌에서는 실명이 아니어도 땅 주인이 누군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당시 철도 사업으로 정부가 부지 매입을 하면서 지급한 명세서에서 나타나듯, 신고된 이름과는 상관 없이 실제 땅 주인에게 보상이 이뤄졌기에 정부가 토지의 실소유주를 파악하고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들의 주장은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부정하는 학론과 대립하고 있다. 5년의 시간을 두고 '지계'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근대사 토지대장연구반과 이영훈의 논쟁은 2000년 초까지 이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지계논쟁'으로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4.4.3. 그 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신편한국사 44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에는 토지대장연구반의 연구자 왕현종이 작성에 참여하여 그의 학론이 반영되어 있다. #
더불어 이들과 달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토지대장연구반이나 식민지 근대화론과 다른 담론으로 광무양전에 대해서 접근하는데, 양안 자료를 대조·분석한 뒤 광무양안이 소유권 유무와 상관없이 당시 실재하는 농토의 면적과 상태를 비교적 정확히 기재하였고, 전통적 측량단위인 1결을 1헥타르와 일치시키는 면에서 그 이전의 양전과는 차별화되는 정책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위의 두 집단의 연구에 대해서는 각각 서울대 국사학과의 김인걸이 2007년에 #,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의 김건태가 2013년에 # 평가한 바 있다. 김인걸은 "토지대장연구반이 실증적으로 이전 연구를 한 단계 뛰어넘었고 양안상의 기재방식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장부에 실명이 기재되지 않더라도 소유권이 어떻게 구사되었는지를 밝히며 연구지평을 넓혔다. 그러나 근대적 성격 규명에 집착하여 충분한 근거 없이 시작의 기재 이유를 경작권 보호라거나 일제의 수탈성과 대비시켰다"며, "목적의식에 과도하게 구속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토지대장연구반의 연구 이후에도 경제사학계의 주장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이론적으로 평행선을 달린다"고 평가하였다.
김건태는 토지대장연구반 측이 광무양안에서 논밭의 모양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면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토지대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명·청 시기의 어린도책(魚鱗圖冊)과 1594년에 작성된 일본의 태합검지장(太合檢地帳)에도 전답도형과 절대면적이 함께 실려 있지만, 이들을 근대적 장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관계(官契[18])와 조선시대 입안(立案) 모두 호적과 연계되지 않은 서류라는 점을 감안할 때, 두 문서의 근본적 차이가 무엇인지도 애매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대로 이영훈에 대해서는 "일제시기에 작성된 토지대장과 비슷한 것은 선진적이고 다른 것은 후진적인 것으로 보는 근대지상주의적 발상으로 연구에 임한다"며 비판하고, "전근대시대에 작성된 장부는 근대성담론을 벗어나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평가하였다.
김건태가 「광무양전의 토지파악 방식과 그 의미」 (2013.) 논문에서 내놓은 견해에 따르면, 광무양안은 전답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실상에 가깝게 파악하려던 장부가 아니라, 균세를 실현해 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토지문서라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의 토지파악 목적은 상이했고, 광무양안과 토지대장(지적도 포함)은 계통이 다른 문서가 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조선과 같이 전국을 대상으로 아주 정교한 양안(토지문서)을 작성한 국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양전 지역의 전국성과 양안 작성의 정교함을 보건대, 대한제국은 다른 계통의 토지문서도 충분히 작성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진다. 단지 그러한 문서를 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해당 논문에 소개된 김소라는「광무양안과 토지대장 비교연구」 (2013.)에서, 광무양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을 찾기보다 양안의 성격 그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윷판과 윷말 없이 윳놀이를 하던 할머니들처럼 1차원적 자료를 활용하여 2차원적 세계를 구현해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와 같이 전세 수취업무를 담당하던 서원배들은 양전방향과 사표만 적힌 양안만 가지고도 머릿속에서 지적도를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방위체계를 따르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았다'라고 하며, 양전 방향과 사표의 주된 역할은 토지의 객관적 위치를 전달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토지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았다.

5. 경제 부문



5.1. 금융과 화폐


[image]
2013년 9월에야 겨우 공식 반환된 호조태환권의 원판[19]
금융과 화폐 개혁은 갑오개혁 이전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1882년 마제은을 수입해서 최초의 서양식 화폐[20]이자 은화인 대동전(大東錢)을 만들었으나, 이 돈들은 모두 부유한 이들의 창고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유출되었고, 원료인 마제은의 가격 상승으로 1883년 생산이 중단된다.
이후 고종은 당오전을 만드는 한편, 1885년 차관을 도입해서 독일에서 근대 화폐 제조 기계(압인기)를 수입[21]하고 전환국을 설치했다. 전환국 총판에 독일인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앉히고 1887년부터 전환국에서 화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금화, 은화, 적동화 체계였으나 소량 생산으로 그친다. 금본위제에 필요한 금이 부족했고[22], 조러 밀약이 들통나자 묄렌도르프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면서 주도할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892년부터 은본위제도 하의 화폐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당시 전환국 통판 안경수가 일본에 건너가서 차관을 도입[23]하고 일본 기술자들을 끌어들여서 근대 화폐가 제조된다. 워낙에 근대 화폐 기술이 일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은화의 기준 가치가 일본돈 1원이 된다. 거기에 맞춘 것이 조선 은화 5원. 그리고 5원과 1원은 은화로 제조되었다. 1원의 1/10의 가치가 전, 전의 1/10이 푼으로 정해진다. 그래서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가 된다. 이 때 기존 화폐를 근대 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쓰려고 했던 것이 호조태환권이다. 문제는 여기서 기존 화폐 제조 이익을 가진 집단들의 이익이 꼬이고, 무엇보다 1894년부터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당오전이 없어지고 신식 화폐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게 된다.
문제는 갑오개혁을 포함한 이 시기가 워낙에 일본에 종속되어 있었고, 조선의 역량으로는 은을 통제해서 대량의 은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정부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백동화뿐이었다. 실제로 이게 가장 주조 이익이 많기도 했고 말이다. 여기에 기존 화폐 발매 권한을 가졌던 이들이 백동화에 달라 붙으면서, 정식으로 화폐를 만들 권한을 가진 경성과 인천의 전환국 외에도 주조의 특권을 얻어 행하는 특주(特鑄)나 환관이나 관리가 행한 묵주(默鑄)가 등장했다. 문제는 사주전이다. 사실 조선은 사주전을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화폐는 밀조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전환국의 기술은 일본에서 왔으니, 일본에서는 밀조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에서 밀조된 백동화와 제조 기계가 조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밀조 기계만 적어도 150대가 한반도로 밀수되었고, 수입된 백동화의 양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백동화 밀조는 국제적 문제로까지 불거져서, 1902년 일본에는 '한국의 백동화 위변 조범 처벌령'까지 제정 된다. 실제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광무 2년(1898년) 이전 오푼 백동화인데, 이 시기 즈음에는 일본과 대한 제국의 사이가 끝장나게 안 좋았기 때문에 백동화 위조를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 당시 통계를 보면, 서울 내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25%가량, 그리고 제2 도시였던 평양에서는 80% 가량이 불량 혹은 위조된 백동화였다. 백동화가 워낙에 풀려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은본위제를 포기, 1901년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한다. 이때 1899년부터 1903년에 걸쳐 20원(1900년, 1902년 발행 이중 1902년 20원 금도금화는 한국은행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0원(1901년, 1903년 발행), 5원(1902년, 1903년 발행되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5원 금도금화는 실물이 존재한다면 수십억은 족히 할것이다.)은 금도금금화로 제작되었고,[24] 반원(1899년, 1901년 발행)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5전, 1전 모두 1902년 단년도 발행)이 청동화로 발행되었다. 이 때의 본위화폐는 금화였다. 잘못 알려져 있는 메가타가 금본위제를 처음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다시 나온다. 조선에는 금이 부족했다. 금화의 생산량은 적었고, 기존의 백동화를 포함한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사실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러시아와 합작해서 한러 은행을 설치하거나 이후에 중앙 은행 설치 등이 따라야 했으나, 독립 협회가 크게 반대했고 러시아의 의욕도 부족해서 엎어진다. 교과서에서는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막아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일본 국립 제일 은행이 제일 이득을 봤다. 당시 대한 제국은 국립 중앙 은행이 존재하지 않아서, 중앙 정부의 자금 상당수를 일본 제일 은행의 한양 지점에 예금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 상인들에게 대출되고 있었다. 때문에 한러 은행 설치는 일본 제일 은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독립협회가 이 한러 은행의 설치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어 버렸다.
결국 금본위제도 하의 신식 화폐는 기존 화폐를 대체하지 못했고, 위조 백동화는 여전히 찍혀나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폐를 한번은 손 볼 필요는 있었다. 금본위제에 의한 화폐발행은 준비금 부족과 외세의 차관 도입 방해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전환국이 황제 직속기관이 되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백동화가 남발됨으로써 인플레가 발생하고 화폐통용지역이 분단됨으로써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전환국을 폐지하고 대한 제국의 화폐 발행권을 박탈하였으며, 재정 분야를 일본인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거머쥐게 만든다. 이후 위에 언급된 제일 은행은 대한제국의 공식 화폐 발행 은행이 되었으며, 일본 엔화가 조선 엔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화폐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 화폐 소유자들이 대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화폐정리사업이다.

5.2. 상공업 진흥


한양의 근대적 변모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제국 초기에 농상공부가 주관해 심혈을 기울인 업무는 제언(堤堰·둑) 수축을 통한 농업용 저수지 건설과 황무지 개간이었다. 동시에 양잠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농업·양잠업 진흥정책에 힘입어 농림회사들이 잇따라 창설됐다. 농림업 부문 최초의 회사는 1899년 정부 관리와 유학생 출신들이 함께 세운 ‘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였다. 합자회사라는 명칭도 이 회사가 최초다.(황성신문 1900.11.21) 이후 개간회사·목양사·양잠회사(1900), 농업회사(1901), 농광(農鑛)회사·인공잠농회사(1904) 등이 속속 등장했다. 활발하게 근대적 농업회사들이 설립됐다. 그러나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간섭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없게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농업·양잠업과 함께 상공업 진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상공업 교육과 기술을 보급하면서 회사 설립을 장려하고 외세 침투로부터 상공인들을 보호했다. 1896년 아관파천부터 1904년까지 9년 동안 무려 205개의 회사가 창설됐다. 금융업 11개, 농림업 16개, 제조업 18개, 광업 9개, 상업 67개, 운수업 27개, 수산업 3개, 청부토건업 14개, 기타(인쇄·출판·제약·매약·유흥업·용역업 등) 분야에서 40개였다.[25]
  
1910년 당시 납세를 하는 공식 부문의 근대적 대기업(당시 종업원 100명 기준)은 도합 703개로 추산되고 있다. 상업·금융·공업·운수교통·토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비공식 부문의 무허가 중소기업들까지 합하면 대한제국기에 이미 수많은 기업이 거의 매일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대한제국 정부는 외세 자본의 침투로부터 국내 상업을 보호하면서 조세를 거둬 세수를 늘렸다. 내장원과 관료들은 이렇게 축적된 세수를 ‘관료자본’으로 전환시켜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신속한 자본주의화’를 열어 가고자 했다. 관료자본의 투자 활동은 은행 설립(1898년 특립제일대한은행, 1899년 대한천일은행), 철도 건설, 전기회사 설립, 연초제조회사 설립 등으로 나타났다.[26]
대한제국 정부는 후발자본주의 국가 독일처럼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독일처럼 보호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은 외국 영사관들의 압박으로 인해 채택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기존의 상업단체들인 도고·수세회사·상무사 등의 독점권을 인가함으로써 외국자본의 시장 잠식으로부터 국내 상공업을 보호했다.
당시 한국인이 설립한 주요 회사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두산그룹 - 1896년 8월에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박승직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40년대 박승직의 아들인 박두병이 경영권을 넘겨받으면서 '두산'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 한성은행 - 1897년 2월에 설립되었다. 이후 1943년에 조흥은행으로 개명하였다가 2006년 4월 신한은행과 합병하였다.
  • 동화약품 - 1897년 9월 25일에 설립되었다. 까스활명수의 제조사로, '부채표'는 한국 최초의 등록상표이다.
  • 한성전기회사 - 1898년 1월 26일에 대표적인 친미파 인사였던 이채연(李采淵)·이윤용(李允用)를 사장으로 설립되었다. 이 회사의 모든 사업은 미국인 콜브란(Collbran)·보스트윅(Bostwick)과 맺은 도급계약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회사는 한성전차, 가로등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전화사업독점권도 가지고 있었다. 1904년 7월 회사의 명칭이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변경되면서는 회사 소유권이 콜브란과 보스트윅에게 완전히 넘어갔으며 1909년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에 매도되면서 소멸하였다. #현재의 한국전력공사이다.
  • 대한천일은행 - 1899년에 설립되었다. 현재의 우리은행이다.


5.3. 수출과 부설 채굴권


영국 출신 고위 인사였던 이사벨라 비숍이 쓴 '한국과 한국인들'이란 책에서 대한 제국 직전 경제력을 서술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1896년 조선에 입항한 화물선 자료. 1886년 ~ 1896년간 조선의 전체 수출 / 수입량. 1895년 ~ 1896년간 조선의 총 수출량과 종류. 1895년 ~ 1896년간 조선의 총 수입량과 종류.
인삼을 전매 수출하고, 그 외에 목재, [27], 소가죽[28], 면화, 금광의 을 수출했다. 독자적으로 채굴이 힘들 경우에는 채굴권, 벌목권을 넘겨줘서 수출한 부분도 제법 되었다.
하여간 이 덕분에 수치상으로는 1898년에 나라의 빚을 대다수 갚았다는 말도 나온다.
더불어 원래 위에 언급한 두 사업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엄청났으나 고종이 직권으로 궁내부 재원을 동원해서 진행해버렸다. 이런 점이 광무 개혁이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며, 이태진 교수 등이 광무 개혁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에 일제에 대해 1300만원의 빚을 강제로 졌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십 만 원 수준에서 운동은 중단된다. 사실 국채 보상 운동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국채 배상 운동을 하는 것 자체를 일제에서 방해하였고, 국채 배상 운동을 알게 된 일제가 이전보다 더 많은 빚을 조선 정부에 떠넘겼던 것이다. 애초에 처음 생긴 빚도 조선 정부가 필요해서 빌린 돈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필요하면 빚을 더 늘리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얼마를 모으든 무의미했다.
고종이 이러한 부설권과 채굴권 등을 각국의 열강에게 판매한건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지 못하게끔 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 병탄되고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열강이 가졌던 부설권과 채굴권의 대부분은 일제가 가져가게 된다.

6. 국방 부문



6.1. 육군



1895년 5월 을미개혁에 기존군대를 개편하여 시위대진위대가 창설되었다. 시위대는 을미사변 당시에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후 해체, 대한제국군 친위대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이후 다시 시위대로 환원되었다.
청일전쟁을미사변 때 일본군이 난입하고 두차례나 경복궁을 점령하자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최우선으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를 기울였다. 대한제국 한해 예산의 20~40%를 국방비에 쏟을 정도. 러시아 고문의 자문을 받아 시위대와 진위대를 개편해나갔고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탄생하였다. 1898년에는 시위대 1대대와 2대대를 합치고 포병 중대(포대)를 설치하여 연대로 개편하였다. 1900년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기병 대대를 설치하여 보병 대대 2개에 포병 1개 대대, 기병 1개 대대 등 제대로 된 4각 편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군악대(소대급)도 2대를 설치하였고 1902년에는 보병 연대가 2개로 늘어나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의 총 병력이 5천에 이른다.
지방군의 경우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5월 30일 각 지방의 구식 군졸들을 재편성하면서 명칭을 지방대로 바꾸었다. 통영과 북청, 대구와 강화, 청주, 공주, 해주, 춘천, 강계 등지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1897년 6월에는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원, 청주, 공주, 안동, 광주, 황주, 안주, 종성, 원주 등 9개 지방대가 더 설치되었다. 1898년 12월에는 전국적으로 14개 지방대대 병력을 대대본부, 중대부(2개 중대), 곡호대(曲號隊. 군악대를 뜻한다.) 등으로 통일하였고 전체 병력은 5,600명이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가 설치되었으나 아관파천으로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육군무관학교는 1909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282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1899년(광무 3년) 6월에는 촤고 통수 기구인 원수부와 참모 본부인 참모부가 개설되었다. 군무국, 검사국, 기록국, 회계국이 설치되었으며 1900년 6월에는 육군헌병사령부와 호위대가 창설되어 원수부 직속에 편제되었다. 진위대와 지방대 또한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되었다.
1900년 6월 30일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의 4개 지역에 1개 대대 규모의 진위대를 새로 편성한 것을 계기로 지방대와 진위대의 명칭 통합이 요청되었다.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진위대와 지방대로 양분되어 있던 지방군 조직을 진위대로 통일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같은 달 25일 칙령 26호로 진위대를 연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각 지역의 진위대를 연대 단위로 통합하여 진위 제1연대는 경기도 강화, 제2연대는 경기도 수원, 제3연대는 경상북도 대구, 제4연대는 평안남도 평양, 제5연대는 함경남도 북청에 두었다. 1901년 8월 이후에는 평양 진위대가 확대되는 등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확장되었으며, 총병력 18,000명과 378명의 곡호대(군악대)를 가졌다.
1904년 무렵에 대한제국군의 최대병력은 2만7000명까지 확대됐으나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과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의 요구로 1905년 4월부터 지속적으로 군축되어 숫자가 줄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시점에서 티오상의 정원은 9천명 규모였으며 실제로는 8천명 정도가 있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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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이 구매했던 기관총의 조작을 교육받는 대한제국군
대한제국군 사진이 담긴 블로그#

6.2.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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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대한제국군이 첫번째로 도입한 양무호. 그다음이 두 번째로 도입한 군함 광제호와 승조원들.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초대 함장 신순성이다.
일단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성립하기 전, 조선군에서의 수군 체제 및 개혁 시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관련 블로그
기존의 진관 체제에선 통제영을 최고 기구로 하는 수군이 존재했다. 수군 기지는 주로 해안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3년 12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이 설치되고 민영목이 기연해방사무(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기연해방영은 1888년 4월 통위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선 조정은 해군 양성을 위해 1892년 영국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1893년 3월 통제영학당(總制營學堂)을 설치하였다. 통제영학당에서는 1893년 9월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894년 4월 영국에서 콜웰(W. H. Callwell) 예비역 해군 항해 대위와 커티스(J. W. Curtis) 하사가 파견되어 왔으나, 일본을 비롯한 대외의 압박으로 1894년 11월 통제영학당은 폐교된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수군을 혁파하면서 한반도에는 해상 방위 전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대한제국성립 이후에 해군이 창설된다.
원래 고종은 영국의 최신기선 전함을 구입하길 원했는데 일본의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이 제시한 1903년에 중고상선 (석탄운반선)을 한 척 구입하여 갑판대포를 얹어 군함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이다. 결국 양무호 구입은 강매당한 것인데, 그 과정은 양무호 항목 참조. 양무호는 4문의 80㎜ 포와 5cm 포 2문을 장착하여 화력도 빈약했다. 참고로 동시기 일본 해군연합함대 기함으로 쓰였던 전함 미카사의 무장은 305㎜ 주포에 부포로 152㎜를 달았다. 안습. 양무호는 1904년엔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이 징발해 사용하였고,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에는 부산에서 견습 선원들을 위한 실습선으로 쓰이다가 1909년 일본 해운회사에 매각되었다.
1904년에는 1,056t급 광제호(光濟號)를 구입한다. 3인치 포를 3문 장착하고 있는 광제호는 배 자체도 일본 가와사키 조선소에 발주하여 건조한 새 배로, 양무호와 비교하면 훨씬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광제호는 해군 함정이 아니라 세관의 연안 감시선 역할을 맡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석탄 운반에 쓰이다가 8.15 광복 후 귀국 일본인들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6.3. 간도 영유권 분쟁


간도 영유권을 두고 1885년과 1887년에 두차례의 회담이 결렬되자 조선과 청은 간도에 적극적으로 자국민 이주를 장려하고 영향력을 행세하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을 건국하며 고종은 국방비를 대폭 늘리며 군사력을 강화한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열강 8개국이 참전하였다. 여기서 러시아 제국이 대한제국도 참전할 것을 제의를 했지만 군사적 문제들로 인해 고종은 참전을 거절한다.
이 과정에서 의화단 일부[29]는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들어와 약탈한다. 이에 고종은 진위대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 간도와 요동에 파병한다.
청은 이에 반발하여 15000명의 청군을 만주에 보내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 청과 대립하던 러시아는 대한제국군을 지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군사충돌은 끝났고 1909년 간도협약으로 마무리되었다.#

7. 실패와 한계



7.1. 부족한 재정


개혁을 위한 예산이 탁지부가 관할한 예산이 아닌, 내장원이 관할한 황실 자금인 내탕금의 비중이 컸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예산이 아니라 대통령 비자금으로 정책을 시행한 것인데 이 내탕금은 대한 제국 선포 이전부터 벼슬을 돈주고 팔거나, 화폐 주조를 남발하거나, 원납전을 걷어들이면서 마련하거나, 국유 토지의 소작료 등으로 이뤄졌다. 당시 고종의 공식적 비자금 창고인 궁내부와 궁내부 산하 내장원 내탕금은 기존의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탁지부 예산보다 내탕금이 훨씬 컸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 제국 시기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굳이 조세를 쓰지 않고 내탕금을 사용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해관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 때문이다. 갑오개혁 이후로는 해관이 독립적인 기관으로 변하고, 이 과정에서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받아낸 기관이 되었다. 원래대로면 탁지부가 해관의 위에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해관이 탁지부의 위에 있었고, 이 때문에 실제예산의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못하여 맥리비 브라운이 원하는대로 자금이 융통되거나 혹은 지출이 잠겨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맥리비 브라운이 장악하고 있는 탁지부 예산이 아닌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는 내탕금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30]
탁지부가 관할한 대한제국 세출 세입 지표를 살펴보면, 1895년부터 1905년까지 11년간 대한 제국의 총 세입은 87,318,941원으로, 1년 평균 세입은 793만 8천 원 가량이다[31]. 당시 대한 제국의 화폐 단위인 원은 각각 달러와의 교환 비율이 2:1, 엔과의 교환 비율이 거의 1대 1[32][33]로 조선 정부의 세입 값은 각각 400만 달러, 800만 엔 이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금액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비교해자면, '''미국에 이권을 이양한 운산 금광의 초기 개발 비용이 500만 달러로, 미국의 일개 기업이 낼 수 있는 투자금의 규모가 대한 제국 1년평균 재정 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세출 금액을 제하면 실제 대한 제국의 여유돈은 이보다 훨씬 처참한 수준[34]이다. 또한, 러일 전쟁 당시 인구 3천만 명을 지닌 일본의 1년 세입이 약 2억 엔이었는데, 이는 800만 엔 이하의 대한 제국 평균 세입액의 약 25배, 11년간 총 세입의 2배를 넘기는 규모였다. 한반도의 거주 인구는 대한제국이 멸망 이후 1910년 1,300만 명이었는데, 인구차를 감안하더라도 조세의 수취 실적은 열 배 가량 차이를 보인다. 러일 전쟁 직후 국채보상운동 시기 대한 제국의 1년 예산이 600만원이고, 일본이 러일 전쟁 이후 차관으로 억지로 떠넘긴게 그 2배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한 제국이 구체적인 세수 파악과, 세수내에서도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취율이 불량했기 때문이었다. 지방관과 서리의 세금 징수를 중앙 정부에서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고 더욱이 외획(外劃)으로 인해 민간인인 상인도 조세 수취에 개입하게 되면서 재정 운영은 점점 더 비효율적으로 굴러갔다.
그렇다고 내탕금[35]을 바탕으로 마련된 고종의 비자금이 많았냐면, 이조차 생각보다 규모가 적었는데, 헐버트를 통하여 맡겼다는 고종의 비자금은 25만엔, 미화로 불과 12만 5천 달러에 불과했다. 다른 비자금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잘해도 정상적으로 세금을 거둬서 운영되는 정부 재정에 비해 규모가 적을 수 밖에 없고, 이런 소규모 내탕금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렇게 적은 예산으로는 2차 산업인 제조업을 위한 자금 투자나 공장 설립은 커녕 일개 한 지역의 천연 자원조차 제대로 채굴할 자금을 대기도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산업이나 군사 정책에서도 청나라나 일본처럼 근본적으로 제조업을 육성하여 통일된 규격의 무기나 의류 및 군복도 자체 생산하고, 외화 낭비를 줄이는 등의 본격적인 근대적 개편이 아니라, (산업 유치할 만큼의 돈은 없으니) 외화 유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미 완성된 무기나 군복들을 사들이는데나 치중하는 등 무늬만 근대를 표방하는 수박 겉핥기식 혹은 보여주기식 정책밖에 시행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마련한 내탕금은 일제가 소모 내역을 알 수없었기 때문에 을사조약 이후 일어난 을사의병 때 밀지와 함께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나누어져 의병 활동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됐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헤이그 특사 파견도 내탕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대한인국민회, 대한독립의군부, 대한광복군정부의 지원 자금으로도 쓰였다. 하지만 이런 간접적 방식은 고종이 직접 나서서 싸우느니만 못하게 효과가 떨어졌고, 이 내탕금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효과를 발휘해 고종의 망명 자금으로 쓰일 계획도 있었던 걸로 보이나, 고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대한제국 건국 전과 비교하면 세수가 상당히 많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는데 징세 기구와 관련 제도 정비가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러일 전쟁기때의 일본에서 정부 재정 중 가장 큰 90%가량의 비중을 차지하던 것은 토지 소유자에게 무는 지세(地稅)였다. 일본에서는 지조개정(地租改正 1873년 ~ 1881년)을 통해 전국 각지에 있는 토지의 면적과 소유권을 철저히 조사하여, 확실하게 세수 파악을 할 수 있었고, 관련 기구 정비를 통해 관료와 공무원 등을 육성하고 체계적으로 세무와 회계를 처리했다. 그러나 반대로 대한 제국에서는 광무양전의 성과가 좋지 않아 전국에 있는 토지의 면적과 소유권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즉 토지세를 거둘 구체적인 세수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체계적인 징세원과, 징세 기구가 없고, 기존의 징세 기구가 비효율적이고 부패했던 것이 큰 문제였다. 문제점을 세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전통적인 조선의 징세원은 지방의 이서배 즉 서리였는데, 서리는 세금의 징수와, 세수 파악 등을 하는 실질적인 공무원 내지는 관료였으나, 공식적으로 녹봉을 받는 관료는 아니었다. 앞서 광무양전의 사실상의 실패로 실제 세수와 세액을 거의 독점하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이 서리였는데, 토지의 1결당 얼마식으로 결가(토지 1결의 값)를 책정하여 세금을 수취하되, (정보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지방관에게는 자신이 거둬들인 실제 세액보다 적게 보고 및 납부하여 그 차액은 자신들의 경비로 유용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있었고 대한 제국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과 지방 정부에서 세수와 세액을 파악하지 못하니, 여기서 얼마를 횡령하던 서리들 마음대로였다. 이를 위해 자신들이 사용하는 장부를 자기들만 알아보게 암호문처럼 적어놓는 것은 덤이다.
  • 갑오개혁을 거쳐 조세를 금납화하고, 현물을 납부하는 공납제를 계약제로 변경하였으며, 지방 재정을 중앙 재정 즉 탁지부 산하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실제 지방의 재정 운영은 중앙 정부에게 지시 및 간섭을 받지 않고 철저히 독자적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중앙 정부에 필요한 현물을 국가에서 지정한 거래 가격에 따라 구입, 교환하여 수취하는 형식으로 변경하였으나, 정부에서 지정한 가격과 시장의 가격이 다르고 또 시장의 가격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보니, 중앙 정부의 현물 보유량을 정확한 현금 세액으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현물 수취를 담당하는 지방 관리들이 현물 가격의 시세 차익을 이용하여 횡령을 하기도 쉬웠다. 예를 들어 갑오 개혁이나 광무 개혁 전인 1867년(고종 4년)의 서현현에서는 지방관이 쌀인 대동결작미(大同結作味) 633석을 1석에 18냥 3전으로 계산하여 화폐로 세금 징수를 한 다음, 이 화폐를 가지고 다른 곳에서 쌀을 1석당 13냥 3전에 사들여서, 중앙 정부에다가 쌀로 세금을 납부하여 3,800여 냥의 이익을 챙겼다.[36] 방납이나, 대동법 등의 제도는 이후에 폐지되었지만, 지방관들은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여, 차익만큼 그들이 이윤을 차지하고 반대로 정부나 백성이 손해를 보는 일은 매우 잦았다.
  • 갑오개혁 이후 세금 징수에 중앙이나 지방의 관료가 아닌 민간인인 제3자를 개입시켜 세금 수취를 원활하게끔 했는데, 이를 외획(外劃)이라고 한다. 오늘날 처럼 국고를 이용하거나, 지방 및 중앙 은행을 통해서 세액을 송금하는 일은 은행 제도가 잘 자리잡지 않아 할 수 없었으므로, 세금이나 물자를 운송할만한 민간인을 개입시킨 것이다. 주로 탁지부가 민간 상인에게 특정 지방의 세금 상납 영수증을 일정 금액으로 갖다 팔아서 재정 자금을 마련하고, 상인이 이 영수증을 토대로 그 지방에서 운송비나 기타 여비를 포함하여 되받는 식이었다. 문제는 상인들이 실제 탁지부에게 상납한 금액이나 실제 소요된 경비보다 월등히 높은 금액을 지방에다 청구해서 이윤 추구에 나서기 시작했고, 탁지부가 간혹 지방 고관들에게 무상으로 영수증을 발부해놓고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은 지방관대로 영수증을 통해 세금 대납이 가능하니, 탁지부의 세금 영수증을 바로 구입(?)하지 않고 내야될 세금을 연체 및 체납하여 이 금액을 자본금으로 삼아 두번째 처럼 물건 거래 등을 통해 차익 등을 얻거나, 사적으로 유용하면서 이윤추구에 나섰다. 게다가 영수증에 표기된 만큼만의 액수만 지불하면 세금 납부의 의무를 마치니, 지방관이나 현령이 영수증을 통해 상납할 액수보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여도 중앙 정부에서 통제할 방법이 부족했다. 자연히 백성들이 세금을 많이낸다 해도, 중앙 정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의 양은 극히 적은량에 불과하여 세금 징수는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충분한 재정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재산 조사, 이 경우 지적 조사를 통해 명확한 소득 조사와 세수, 세액 파악을 하고, 수취를 위해 징세 기구와 행정 기구를 나누며, 일정한 봉급을 받는 징세 조사원을 배치하였어야 된다. 또한 은행이나 국고 기구를 정비하여 세금 징수와 운송비를 절감 및 축소하여 민간인이 개입할 여지와, 관료가 세금을 사적으로 유용할 여지를 아예 주질 않았어야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재정 정비를 위한 이런 사전 작업을 단 하나도 실시하지 않았다. 그나마 행해졌던 징세제도 변화조치도 광무 개혁이 아니라 갑오 개혁기에 이루어졌던 것이었고, 대한제국은 이를 그저 유지 및 계승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엉망인 징세 제도는 일제시대 들어서야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7.2. 인재의 한계


  • 고종의 성향과 가장 비슷한 세력이라고 한다면 단연 온건 개화파가 되는데, 이들은 고종 재위 초기에 비해 점점 숫자가 줄어든다. 이것은 갑오 개혁 등 외세의 영향으로 전향해서 이기도 하지만, 갑신정변 등에서 떼로 죽어나간 것도 문제였다.[37] 단적으로 갑신정변 - 갑오 개혁 -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유력한 온건 개화파의 이름을 떠올리기 어려워진다.[38]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정동파니 춘생문 사건 관련자 등이고 여기에 포함되면서 부각된 인물이 바로 이완용이란 것에서 이 시기 인재풀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 개화파로서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소위 계몽된 지식인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너무 이상만 쫓았다.[39] 이들은 근대화에 대한 이상만 가지고 일본의 침탈야욕은 모른 체 근대화의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청과 러시아만 적대하였다.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민중들 역시 계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비단 일본 외에도 친러, 친청, 친미 등 다양한 선으로 자신들 중심의 판짜기와 자신들이 배운 이론의 현실화를 시도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독립 협회의 무관세 자유 무역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무관세 자유 무역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거야 자국 내 산업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때나 통하는 거고, 당시 조선에서 그걸 실행하면 조선의 상공업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수출품은 일본으로 나갈 , 면포 정도였는데 정작 상대국들은 그냥 관세 적용하고 있었다. (쌀은 일본에 비해 정말 너무 쌌다.) 강화도 조약 등이 불평등 조약으로 불리는 이유가 일방적인 무관세라는 것도 크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봐도 이건 그냥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을사조약과 강제 병합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보다 철저한 투쟁으로 가거나 일본에 철저히 협조하게 된다.
  • 광무 개혁을 통해서 성장시킨 이른바 국가 장학생들과 학생들이 있다. 광무 개혁에는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전문 기술 위주였지만 일본이나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보낸 경우도 존재했다. 문제는 이 사람들도 상당수가 유학 기간에 친일로 돌아서서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이용익[40], 홍종우같은 충직한 측근은 드물었고 함량 미달에 삽질이나 하는 측근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이 두 명도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은 받지 못했다. 홍종우는 결국 해보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고[41], 이용익은 대한제국군의 증강과 군비조달에 힘쓰다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 피살당한다.
외국인 측근도 마찬가지였다. 대한국 국제를 작성할 당시의 외국인 고문미국인 의정부 고문 로젠드르(Charles W. LeGendre)[42], 법부 고문 미국인 그레이트 하우스(Clarens R. Greathouse), 탁지부 고문 영국인 브라운(John M. Brown) 등이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거치면서 참여하고 있었다[43]. 이들은 법규 교정소 내에서 국제적 법 지식을 가진 소수의 인물들로 실무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도움은 대표적으로 1898년 4월, 로젠드르가 자문 위원회 설립을 병행한 절대주의 정책을 주장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민영화나 만국법에 근본적으로 호의적이었던 열강의 시각을 대변하는 인물들에 불과했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호러스 뉴턴 알렌[44]이다. 바로 앞서 경제적 개혁 분야에서 언급한 전기 회사가 문제였는데, 교과서에는 이걸 긍정적인 사례로만 보지만 사실상 황제랑 친하다는 이유[45]로 알렌이 소개한 이들의 미국 회사에 전기, 전차민영화해버렸다.[46] 또한 한성에 전철을 세울 때 실무진들(설계자 + 운전수) 면면을 보면 전부 일본에서 온 교토 전철 직원이었다.

7.3. 시간의 부족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또 다시 서울을 기습적으로 점령할 것이니 이를 대비하라는 내용이 담긴 친서를 보냈다. 또 1900년 3월 30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러시아가 마산포를 조차하도록 하여 대한해협과 블라디보스토크 간의 항해를 돕도록 하였다. 대한제국은 국방의 강화와 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대비를 했지만 재정이 부족해 대한제국군은 27000~28000명 정도에 그친 반면에 일본군은 30만에 이르렀다.[47] 또한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이라 러시아로서는 극동지방에 병력과 군수물자 투입이 원활하지 못하여 전쟁에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문제는 러일전쟁은 생각보다 미뤄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미뤄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엄청난 자금을 소모해 미국과 영국의 돈을 빌려 전쟁을 치르는 등 재정이 엉망이었다. 그 일본의 1년 세입이 약 2억엔이었다. 당시의 엔달러 환율은 1:2였기 때문에, 일본의 1년 세입은 대한 제국의 10배를 넘나들었다.[48]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덕인 것은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전비가 20억엔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대한 제국 재정으로 보면 100년치 예산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고, 이 시기 제국주의 정책 자체가 국력을 상당히 소진하는 정책이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이 실제 역사대로 터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개혁의 성과가 밖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흥선 대원군 실각 직후에는 변화가 있어야 했고, 일본 식민지가 안되기 위한 조건으로 따지면,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부터 계산해도 장담 못한다.[49][50]
광무개혁과 동시에 러시아와 공조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려했으나 일부 독립협회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에 지나치게 협조적이었고 한반도를 중립국이나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던 러시아에 과도하게 반대하였다.[51] 그리고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덕수궁을 점령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고 1904년 8월 22일 1차 한일협약을 맺어 고문정치가 시작되고 경술국치로 막을 내렸다.

8. 관련 문서



[1] 1897년 대한제국 건국 해에 짓기 시작하여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해에 완성된 궁전이다.[2] 정확히는 아관파천 이후 시기인 건양 원년(1896년 8월) '칙령 36호-지방제도개정'으로 개편하였고 이를 유지하였다.[3] 舊本新參 : 옛것을 기반으로 새것을 참고한다[4] 을미개혁 때의 단발령은 엄청난 반발로 인해 철회하였다가 1900년에 고종이 단발령을 재공포하고 관리들의 양복 착용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관공서에 근무하거나 신학교에 입학하는 조건이 단발이어야 한다는 조칙을 넣어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단발을 하였고 복식이 변화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버티는 사람은 있었다.[5] 서얼 출신으로 번역관으로 미국을 다녀온뒤 과거로 급제하고 각종 직급을 맡아 진급하다 아관파천 이후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다.[6] 이들은 전차 부설 및 전등 그리고 전화 가설과 그 운영에 관한 특허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7] 참고로 도쿄 등 다른 대도시의 노면전차 도입이 다소 늦게 된 것은 당시 성행하고 있던 철도마차가 이미 값싸고 빨랐기 때문에 노면전차를 빨리 도입할 필요성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8] 경기도 광주[9] (대한매일신보 1909.11.11. ‘잡보:학교 총수’)[10] 1910년 무렵 1만6500개였던 서당은 1919년께 2만3500개로, 서당 학생 수는 14만 명에서 26만8000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1922년 서당규칙 제정 이후로 서당은 급격히 줄었다.(박득준, 『조선근대교육사』 213~214쪽)[11] 주로 프랑스와 러시아 공사관[12] 역토는 역참에서 보유하던 땅으로 역에서 말을 기르던 민간인에게 보상으로 경작을 허락한 땅이고 둔토는 관아와 병영에 속한 땅으로 마찬가지로 주변의 민간인에게 경작을 허락한 땅[13]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대가로 내는 벼[14] 일부에서는 장장 5년간 투쟁해서 얻어낸 경우도 있었다.[15] 이들의 주장은 「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 문헌에 정리되어 있다.[16] 이들의 연구는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문헌에 정리되어 있다.[17] 양안은 초안인 '야초'를 3개월에 걸쳐 작성하고 이 야초를 모아 군에서 '중초책'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중초책'을 모아 양지아문에서 1년간 '정서책 양안'을 완성하였다.[18] 관청에서 증명한 문서.[19] 근대적 지폐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지급하려고 했던 공초이다.[20] 구멍이 없었다는 점 + 은화라는 부분에서 서양식이라는 이야기이다.[21] 이 기계들은 나중에 인천 전환국에서 계속 사용된다.[22] 금화와 은화라고 하지만, 저 화폐도 주석에 금과 은을 도금한 것이었다.[23] 주조 이익의 1/4을 주는 조건이었다.[24] 이전 문서에서는 이때 발행된 금화들이 금도금이 아니었고 20전, 10전, 반전이 이 당시에 발행되었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1901년 전후로 발행된 금화들 역시 금도금으로 발행되었고, 진짜 금도금이 아닌 금화로 발행된 것은 일본이 재정 분야를 장악한 1906년에 발행된 10원, 20원 금화와 1908년 발행된 5원 금화부터였다.(물론 이때라고 금이 부족했던건 다르지 않아 생산량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리고 20전,10전, 반전 역시 1901년에는 발행되지 않았고 20전은 1905년, 10전,반전은 1096년부터 발행되었다.[25] (전우용, 『한국 회사의 탄생』 130~137쪽)[26] (이영학, ‘대한제국의 경제정책’ 48~49쪽)[27] 쌀의 경우 대체로 일본으로 수출되는 편이었는데,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여 신흥 지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28] 하야미 아키라의 '근세 일본의 경제 발전과 근면 혁명'에서 나오는 내용을 통해 당시 정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개항기 ~ 대한 제국기 시기 일본은 적은 면적에 인력을 많이 투입하는 조밀 경작이 유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이 줄어듬에 따라 소를 키우는 농가가 점차로 줄어들어 개항기가 되면 조선으로부터 소 가죽 등을 수입하는데 적극적이었다.[29] 홍건적의 발생 성격과 비슷하다. 다만 홍건적과는 다르게 의화단은 친정부 성향이었고 청 정부도 이들을 지원하였다.[30] 출처[31] 연별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1905년의 수입은 1,500만 원에 가까워 1895년 약 455만 원이던 것의 3배 이상, 평균에 비해서는 2배에 가깝다.[32] 미국으로부터 운산 금광 채굴권 이양 당시 가격이나, 일본으로 부터 양무호 구입당시 가격 등을 감안하면[33] 당시 국제 환율에서 1달러는 2엔이었고, 조선 엔화폐정리사업의 결과로 일본엔과 정확하게 1대1이 되었다.[34] 1904년 기준으로 당해년도 세입 예산에서 세출 예산을 빼면 55만원 정도의 여윳돈이 나온다.[35] 사실 대한 제국 지출 전체 중에서 고종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1/20 정도로, 나머지 내장원 수익은 결국 국가의 지출로 나갔다.[36] 고동환,〈19세기 부세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 《1894 농민전쟁연구》1, 역사 비평사, p.97[37] 급진 개화파들은 1차적으로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온건 개화파의 제거에 힘을 쏟았다. 단적인 사건이 민영익이 칼을 맞은 것이다.[38] 그나마 있다는 것이 민영익, 김가진, 이용익, 홍종우 정도이다.[39] 그런데 이것도 좋게 봐준 것이고,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단순한 정치 투쟁으로 보기도 한다.[40] 보부상 출신으로 탁지부 대신에까지 올랐다.[41] 홍종우는 황국 협회의 보부상을 동원해 한국 최초의 백색테러를 일으키면서 만민 공동회를 물먹였다. 결국 두 단체간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원래는 독립 협회만 해산하였다가 만민 공동회가 재조직되어 황국 협회의 행태를 비난하고 독립 협회만 해체당한데 대한 반발이 생겨나자 고종은 그제서야 황국 협회를 함께 해산시킨다. 독립 협회의 입장에서는 황국 협회 해산 후에도 자신들이 어용 단체와 동급으로 해산되었다는 것에 기가 막혔지만, 팽당한 황국 협회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뭐 이 이후에도 홍종우는 대한 제국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이것저것을 하긴 하지만, 고종과의 시각 차이를 보이면서 결국 좌천된다. 자세한 것은 홍종우 문서 참고.[42] 이 사람이야말로 묄렌도르프와 함께 '''프로 외국인 고문'''이었다.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던 로젠드르는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서 미국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가지고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일본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을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정작 대한 제국에 참여해서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조언을 했다. 본문에도 있지만 프랑스계 미국인이면서 고종에게 전제 왕정을 제안한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프로페셔널한지 보여준다.[43] 재미있는 것은 아관파천을 거쳤고,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 출신 외국인 고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전제 왕정을 찬성한 인물들이 죄다 영국인, 미국인들이다. 외국인 고문이 전제 왕정 찬성했다는 이야기에 그럼 러시아나 프로이센 같은 왕정 국가겠거니 하던 이들은 이 부분에서 한 방씩 제대로 얻어맞게 된다.[44] 광혜원을 세운 그 알렌이다. 이 광혜원이 제중원을 거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변했다가 연세대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평가가 우호적으로 나오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인물은 절대 아니다.[45] 사실 이걸 단순히 친하다로 이야기하지만, 알렌은 당시 주조선 미국 공사였다. 운산 금광 건도 그렇고, 이 전기회사 건도 그렇고 고종이 알렌을 매수해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두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보고하게 약을 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러일 전쟁이 있기 이전까지 알렌은 이쪽 주장을 꽤 강하게 해서, 심지어 루즈벨트와 대립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뇌물에 약한 알렌은 러일 전쟁으로 대세가 기울고 고종이 자신에게 더이상 이권을 주지 못할 상황이 되자 친일로 갈아탔다. 물론 알렌은 미국 공사이므로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며 조선을 우선시할 이유는 없다. 진심으로 조선을 위해 뛰었다면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겠지만 미국 공사로서는 배임 행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웃긴 것은 미국을 일본편으로 끌고간 일등 공신인 당시 대통령 테어도어 루즈벨트는 자기가 친일 성향이 강해서 일본 편 들었다. 루즈벨트의 친구로 유명한 더럼 스티븐스도 그렇고 루즈벨트 주위 인물들은 이상할 정도로 일본 친화 성향이 강했다.[46] 다만 당시 재정을 고려하면 국가가 설립해서 운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만일 그걸 할 돈이 있었다면 철도를 부설했을 것인데, 철도도 외국 자본에 넘어가게 된다.[47] 일본 역시 재정이 부족한건 마찬가지였으나 영국으로부터 상당량의 차관을 지원받아 러일전쟁을 준비하였다.[48] 이것도 대한 제국의 재정 수익이 가장 잘 나오는 시기 기준이다. 평균 기준이면 20배도 넘는다.[49] 단적으로 쿠로후네 사건이 1853년인데,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시기가 1862년이다. 그리고 1867년에 대정봉환으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다. 메이지 유신 문서에도 있지만,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국력과 상황 차이는 엄청났는데, 일본의 성향 때문에 조선이 식민지화를 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본에 맞먹을 국력이 필요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어디까지 역사적 가정을 끌어올려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50] 사실 일본도 본격적인 근대적 민족주의 국가로 각성한 것을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보는 시각도 있는 만큼 당시 조선은 일본보다 정치적, 행정적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점에서 개항에서 더 유리한 점도 분명 있었으나 왕실을 비롯한 지배 계층의 자중자란으로 그것조차 살리지 못했다.[51] 사실 일본은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고 39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안했으나, 러시아는 청나라에게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은 대가로 뤼순다롄을 해군기지로 얻어냈고 조선을 중립국으로 둘 곳을 제안했으나 일본이 거절하였다. 니시 - 로젠 협정에서도 양국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합의하였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대한제국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