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한자: 外奎章閣
한국어: 외규장각
강화행궁내부에 위치하였던 외규장각과 그 안에서 보관되던 의궤를 다루는 문서다.
1. 외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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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 전경. 내부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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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궁전도의 모습. 정확히는 중간의 외규장각 영역만 복원되었다. 본래 외규장각은 강화부 행궁, 장녕전과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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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행궁이 건재하던 시절의 복원도. 중앙의 3칸짜리 건물이 외규장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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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궁전도의 '''외규장각도'''
규장각의 분관쯤 되는 곳. 원래는 강화도에 있었다. 당시의 상식으로 보면 강화도는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우선적으로 대피할 정도로 안전한 후방으로 여겨지는 곳이었으므로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를 강화도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19세기 들어 서양의 전함이 한반도 연안 각지를 제 집 드나들듯 돌아다니더니 병인양요때 프랑스 해군이 쳐들어 왔을때 약탈당해 건물은 불타고 안에 있던 책들을 빼앗겼다. 본래 조선왕실의궤 297권을 포함한 5천여 점의 문서들이 있었는데, '''의궤 29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전부 불태워졌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던 수병들이 보기에 글만 있는 책은 별 가치가 없어 보여서 화려하게 채색된 의궤만 들고 갔다고 한다. 이후 이 책들은 프랑스에서 계속 보관해왔었는데...
2. 외규장각 의궤
2.1. 박병선의 발견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사범대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가면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1967년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가 되어 의궤를 찾아나섰다. 그러다 1972년 발견한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이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다니는데, 프랑스인 동료로부터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에 한자로 된 책이 무더기로 있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가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1] 297권을 비롯한 관련 도서들을 발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분상용" 의궤 밖에 없어 "어람용" 의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몰랐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약탈행위를 까발린 박병선 박사가 눈엣가시였고 그녀를 권고사직시켰다. 프랑스 국적이었던 그녀는 프랑스인들로부터 "반역자", "한국의 스파이"라는 멸시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인 자격으로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매일 같이 출석하며 외규장각을 연구하여 "조선조의 의궤"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받는데 가장 앞장서게 된다.
2.2. 도서 환수 문제
'''TGV 구입의 대가로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협상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1993년부터 20년 가까이 사실인 것처럼 세간을 떠돌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1993년 미테랑-김영삼 정상회담 이후, 회담의제들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두 가지가 섞여서 과장된 측면이 있다.[2]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둘 사이에는 어떤 거래 관계도 없었다'이며, 이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 입장과도 다르지 않다.
1985년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도서 191종 297책의 목록을 소개하는 '조선조의 의궤'를 발간하였고,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이었던 이태진 교수가 그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서울대 측은 외무부에 반환 외교교섭을 요청하게되며, 92년 7월 25일 유종하 당시 외무차관이 프랑스 외무차관에게 서한으로 정식반환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 요청에 대하여 프랑스는 92년 3월 17일 자국의 공공재산이라는 이유로 반환요청을 거부하였다.
92년 한국 고속철도 사업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의 ALSTOM, 일본의 컨소시엄, 독일의 ICE 고속철도가 경합하게 된다. 이 때 각종 유리한 조건을 기반으로 프랑스의 ALSTOM이 우선사업자로 선정되었다. 당시 TGV가 비서구권으로 수출된것은 한국이 유일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는 아시아권과 같은 비서구권으로 수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ALSTOM의 TGV가 선정되자 한-불간 우대관계 구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방한전 기자회견에서 "개인적으로 의궤들이 한국에 반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본 외교부는 의궤 1-2권을 정상회담 시 볼 수 있도록 희망한다고 요청하였으며 미테랑 대통령은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 2책을 가져와 그 중 1책을 직접 회담 시 반환하는 적극적인 제스처를 보여주었다.[3]
2014년에 나온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에두아르 발라뒤르 외무부장관과 알랭 쥐페 등 프랑스 정치인들은 TGV를 확실하게 한국이 구입하도록 온갖 힘을 쏟고 있었는데, 미테랑의 이 적극적인 제스처도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었다.La rocambolesque histoire des manuscrits coréens
한국 시민단체가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소문은 사실이다. 다만 문화재를 약탈해 간 모든 국가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미/영/프/독 등의 서구 열강들은 하나같이 제국주의 시절 약탈해 반입한 문화재의 반출을 막기 위해 반출금지법을 제정해 두고 있기에, 이 법이 폐기되거나 또는 특례로 예외를 적용받지 않는 한 소송에서 이길 도리가 없다.[4]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된 병인양요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신미양요 때 미군이 약탈해 간 어재연 장군기는 겨우 '2년 임대+5회 연장' 조건으로 2007년에야 돌아왔다. 그나마도 오랜 반환 요청과 설득 작업 끝에 따낸 조건이다. 실제로 어재연 장군기 반환 요청은 현 관리주체인 (미 연방 정부가 아닌)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절당했다. 이후, 2014년에 어재연 장군 수자기 대여는 2020년 까지 연장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한국 정부의 공식 반환 요청이 있자, 처음부터 '영구대여'[5] 를 한국 측에 먼저 제시해 왔는데, 1990년대 초반인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에게 약탈국 정부가 영구대여 혹은 그 이상가는 조건을 제시했던 사례 자체가 없었다.[6]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이 조건을 수락했으며, 따라서 '본디 반환이었는데 프랑스가 영구대여로 말을 바꿨다'는 소리는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는 약탈문화재 반환에 있어서 다른 약탈국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한국에 우호적으로 나오고 있는 나라임이 현실이다.
실제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할 것임을 최초로 선언한 미테랑 대통령 이래 지금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해온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규장각 도서반환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반환협상과정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2.3. 역대 프랑스 정부의 움직임
2.3.1. 미테랑 정부
재임기간 1981~1995년
1999년에 최초로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천명한 장본인이다. 반환 계획이 미리 알려질 경우 국립도서관 사서들을 비롯한 반대파가 격하게 반발할 것을 우려한 미테랑은 한국에서 단기간만 전시할 것이라면서 우선 2권 정도만 준비할 것을 요구했고, 사서들은 별다른 생각없이 이에 응했다. 하지만 9월 14일 방한 당일 김영삼 대통령과 첫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당장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해버렸으며[7] 다음날 저녁 청와대에 가서 전격적으로 한 권을 반환한다. 반대파가 결집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반환을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전략을 구사한 것.
당시의 상황은 한국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었다. 미테랑의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 데다 실제로 한국에 도착한 직후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의 피곤한 모습을 보여서 청와대 측에서는 일단 첫 날은 만찬 일정만 진행한 뒤 다음날 정상회담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미테랑 본인이 괜찮다면서 바로 저녁에 정상회담부터 하자고 제의하여 김영삼을 만나 외규장각 반환을 약속한 것.''' 그것도 차후 진행하는게 아니라 '''바로 다음날인 9월 15일 오후에 서울로 도착하도록 조치했다는 확실한 통보였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미테랑이 또 청와대를 찾아가 김영삼에게 직접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을 전달한건데, 이것도 미테랑의 일정에 전혀 없던 것이라 청와대에서도 당일 오후에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준비했을 정도.
미테랑이 독단적으로 도서 2권을 김영삼에게 전달하자 미테랑을 수행하여 한국에 왔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2명(Jacqueline Samson, monique coen)은 사표를 내는 등의 반발이 거셌는데[8] , 이들은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숙소인 롯데호텔 객실에 들어가서 농성했으며 프랑스 문화부 장관인 자크 투봉에게 전화해 지원을 호소하는 등 책을 껴안고 울며 항의했다. 프랑스 정부 측은 주한 프랑스 대사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설득하였고 이들은 눈물 범벅이 되어 전달식을 고작 몇분 남기고 책을 내놓았다. 이게 와전되어 프랑스가 사서들의 반대를 핑계삼아 약속을 깼다는 헛소문이 현재까지도 떠돌고 있다. 성명서에서 두 사람은 "우리는 프랑스의 이익, 법과 직업윤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당했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를 지지하는 사서 및 큐레이터들은 "국립도서관과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은 대통령의 선물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국 언론에선 이 사서들을 책을 사랑한 여인들,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서들 정도로 보도하였고, 프랑스의 반환이 옳다고 보는 측에서는 침략자들의 천박한 역사 의식이라고 비난하였다.
이후 자클린 상송은 프랑스로 돌아와 국립도서관 총파업을 주도하였으며, 반환 반대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2.3.2. 시라크 정부
재임기간 1995~2007
전임 미테랑이 좌파의 대부였던데 반해 시라크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우파였지만 정작 외규장각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미테랑과 똑같은 행보를 보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이 '등가교환' 논리를 내세우며 반환 저지를 시도하자 '''그걸 힘으로 제압하고 한국 측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한국 협상 대표단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NO'로 일관하던 프랑스 사서들은 시라크에게 단번에 함락당했으며, 단장인 자크 살루아는 한국 측 협상단장이었던 한상진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야만 했다.
다만 다른 문화재를 내놓으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 이에 한국은 대신 프랑스에 대여해 줄 문화재 목록을 작성해 프랑스에 보냈으나 프랑스 측에선 문화재의 가치의 격이 맞지 않다고 거부하고 분상용 의궤를 요구했는데. 이에 한국 내부에서 인질이 된 장남을 찾아오기 위해 차남을 인질로 보내는 격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2000년 협상 때는 프랑스 감사원 대표인 자크 살루아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고 협상장을 나가버리는 태도를 보였다. 반환 협상이 난항을 겪자 TGV 음모론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2.3.3. 사르코지 정부
재임기간 2007~2012년
"한국의 정체성에 속하며 보편적 세계 문화재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직접 내세워가며[9] 한국으로의 외규장각 반환에 전례 없는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덕분에 반환 절차는 속전속결로 진행 중이다.
2011년 2월 7일, 박흥신 주프랑스 한국 대사와 폴 장-오르티즈 프랑스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이 소장 중인 외규장각 도서 297권의 한국 반환을 위한 정부 간 합의문에 서명했으며, 이 합의문에는 5월 31일 이전에 297권의 도서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사서들은 반환에 반대하며 2010년 11월 18일, 도서 반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서명 운동도 벌였으나, 서명한 인원은 동년 11월 24일 기준으로 '''284명.''' 망했어요. 반면 반환 찬성파에는 전현직 대통령을 필두로 전직 장관,[10] 국회의원, 대학 총장들이 즐비하다.
2011년 4월 14일에는 1차분이 한국에 도착하였고, 5월 27일 4회에 걸쳐 전권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사르코지-이명박 합의가 있은 지 '''불과 5개월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자클린 생송은 2011년 3월 17일 '한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프랑스국립도서관 간 외규장각 의궤 한국 이관에 관한 약정' 서명식에서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는데, 이관 작업에 한국이 참여하려는 데 대해서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우리 도서관의 학예연구사들은 책을 지키고 관리하는 업무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직업의식을 공유하며 평생 같은 길을 걸어온 동료들에게 다른 나라에 책을 내주는 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비통해하는 모습까지 여러분에게 보여 주라는 비인간적인 지시를 절대로 내릴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4. 대여 갱신 떡밥
국내 일부에서 '''외규장각 도서는 5년마다 대여를 갱신하는 시스템이므로, 2015년 프랑스 전시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문화재 관련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5년마다 갱신' 이라는 말만 들으면 마치 언제라도 대여 갱신이 중단되고 다시 프랑스로 반납해야 할 것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이것은 약탈 문화재 환수 협상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약탈 문화재 환수라는 결과물은, 이상과 현실의 끝없는 충돌 끝에 맺어진 '''적당한 타협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약탈국민 누구나 '''침략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영구적인 반환'''을 원한다. 그러나 약탈국의 현행 법률을 무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국내의 반대파와 피약탈국의 요구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감수해야 하는 약탈국 정부의 사정, 약탈국의 국민이지만 약탈된 문화재가 한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추진중인 지한파 인사들의 정치적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뉴스
한국이 강경한 자세로 나서면 프랑스는 바로 굴복할 것이고 우리 뜻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은, 외교라는 냉혹한 세계에서는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한국으로부터는 조건이 부족하다고 욕먹고, 프랑스 국내 반대파로부터도 뭐하는 짓이냐고 양쪽에서 공격받는 것을 감수해가면서 협상에 나섰는데 한국이 '침략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영구적인 반환' 을 요구하며 초강경으로 돌아선다면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는 '어머 뜨거라' 하며 이 뜨거운 감자에 관심을 끊어버릴 가능성이 높고, 욕먹어가며 문화재의 한국행을 위해 뛰던 지한파들의 입지는 강경파에 밀려 사라진다.
실제로 외규장각 도서의 한국행을 위해 힘써 온 자크 랑 의원은 르몽드 기자로부터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을 떠맡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기자가 랑 의원을 비꼰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어렵고 욕만 먹는 고난의 길을 어쩌다가 자처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
지미 카터 前 미국 대통령 역시 헝가리에 '성 이슈트반 왕관'[11] 을 돌려주는 결단을 내리고 성사시켰지만, 미국 내에서도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고[12] 지지층들까지 이탈하는 결과을 일으켜 카터의 재선 실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영구 반환은 어렵다.''' 프랑스는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서양 강대국들은 하나같이 법률로 문화재의 국외 증여 및 영구 대여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사키 바트만의 박제된 시신과 표본이 프랑스에 있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는 그녀의 시신을 인권을 가진 한 여성의 신체로 대하지 않고 '''프랑스의 적법한 소유물''' 개념으로 봐서 '''20세기가 끝나도록 반환을 거부'''했다가 인권단체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버티지 못하고 '''2002년'''에서야 그녀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따라서 5년이라는 '한시적 대여'의 모양을 빌리되, 여기에 '자동 갱신, 갱신 횟수 무제한'이라는 옵션을 붙여서 법률적으로는 한시적 대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구 대여인 결과물을 사르코지는[13] 만들어 준 것이며, 이는 세계적 기준으로 보아도 호의적인 조건이다. 이것을 가지고 '언제라도 다시 빼갈 속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프랑스 측에서 대놓고 "대여는 포장일 뿐이고 사실상 반환이라는 점을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 때 분명히 이야기 하겠다는 데도 믿지 못한다는 거냐"고 말했다. #
중간에 다시 가져갈 생각이라면 '영구 대여'는 고사하고 '대여' 자체를 해 주지 않는다. 약탈 문화재 환수라는 개념 자체가 양국 간 장기간에 걸친 대화와 깊은 신뢰가 구축되지 않고서는 성사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제발 3개월만 빌려달라'는 이집트 측의 요청을 간단히 거절한 독일의 사례만 봐도 그렇고, 어재연 장군기는 2년씩 연장하는 시스템으로 한국에 돌아와 있지만 누구도 이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2.4.1. 유사 사례들
어재연 장군기는 임대 반환 상태이다.
미국 법률상 문화재는 외국에 2년을 초과해 대여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대여기간 연장도 10년을 초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에 기본적으로 '2년 대여'를 하되 2년씩 총 4번의 추가연장이 가능하도록 하여 2+2+2+2+2=10년 대여가 된 것이다. 2007년에 대여하였으니 2017년에는 미국으로 반환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상호합의를 통해 2020년까지 대여기간을 연장하였다.
미국 법률상 문화재는 외국에 2년을 초과해 대여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대여기간 연장도 10년을 초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에 기본적으로 '2년 대여'를 하되 2년씩 총 4번의 추가연장이 가능하도록 하여 2+2+2+2+2=10년 대여가 된 것이다. 2007년에 대여하였으니 2017년에는 미국으로 반환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상호합의를 통해 2020년까지 대여기간을 연장하였다.
2.5. 반환 당시의 기타 논란들
외규장각 도서의 운송비를 한국이 전액 부담한 것이 논란이 된 바 있다.[15] 당시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담당했던 주프랑스 대사인 박흥신의 책에 따르면 만일 반환 비용을 분담하면 프랑스 국회에서 예산 문제로 논란을 다시 불지필 수 있기 때문에 나온 결정이라고 한다.
2.6. 참고 자료
-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 반환 협상 당시 협상을 전담한 박흥신 주프랑스 대사가 직접 적은 책이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 반환 협상 당시 실무자들이 국제법을 검토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 Return Of Booty Protested In France (NYT)
- [한 장면] '145년 만의 귀환' 그 뒷얘기(부산일보)
- La rocambolesque histoire des manuscrits coréens (Le Monde)
3. 여담
포켓몬 GO의 체육관 중 하나로 지정되어있다. 또 근처의 강화동종이 포켓스탑이다.
[1]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과 신하들이 보는 "분상용"으로 나뉘어 제작하고 보관했다. 당연히 "어람용"이 표지도 더 화려하고 장정도 잘 되어 있었으며, 그림도 더 세밀하고 정성들여 그려 훨씬 가치가 높다.[2] 한국이 TGV를 구입하게 된 것은 차관 조건이 경쟁 컨소시엄에 비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경부고속철도 건설사[3] 출처:한-프랑스 외규장각 의궤 반환협상 사례 : 인사혁신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2017. 09[4] 가끔 반환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이는 반환하지 않을 경우 향후 해당 국가의 고고학 문화재 연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협박 정도. 이집트가 이런 요구로 프랑스에게 여러번 반환받았고 터키가 독일에게 반환받은 적이 있다. 다만 이런 경우는 그 나라 문화재 관련 연구에 약탈국 측이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양국 정치권 간에도 물밑합의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했다.[5] 통칭 영구대여. 법적으로는 5년 만기 + 자동갱신 + 갱신횟수 무제한이란 한시적 대여이다. 실질적으로는 영구대여라 할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좋은 조건.[6] 한국 정부 對 약탈국 개인 or 한국 정부 對 약탈국 민간단체 사례로는 반환이나 기증 사례도 있지만, 정부 대 정부로는 프랑스 수준을 따라오는 국가가 없었다.[7]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당시 KBS NEWS 9 보도[8] 2009년 당시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이 그녀를 만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행정국장이었던 자클린 상송은 국립도서관 사서부문 총국장으로 승진한 듯. 프랑스 국익과 보유 문화재를 관리하고 대변하는 공적인 자리의 입장에서인지 개인적인 신념과 입장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글에 따르면 한국에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자클린 상송은 귀국 후에 이 사건으로 인해 국립도서관 총파업까지 주동했었다.[9] 피약탈국으로의 문화재 반환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제일 자주 써먹는 논리가 '이것은 세계인의 유산이지, 특정 국가에 귀속된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으며, 굳이 피약탈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인데, 사르코지의 '한국의 정체성에 속한다'는 발언은 이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논리이다.[10] 자크 랑 前 문화부 장관. 오늘의 외규장각도서 반환을 성사되게끔 만든 산파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3년의 미테랑-김영삼 정상회담에서 반환이 천명된 이후 20여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외규장각도서의 한국행을 위해 노력했다.[11] 특유의 옆으로 기울어진 십자가 장식으로 유명한, 헝가리의 '''주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왕관이다. 왕국 시절 헝가리의 정식 국명이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의 영토'''였을 정도로 상징성이 크다. 그런 국보급 물건이 왜 미국에 가 있는고 하니, 1945년 2차대전 종전 직전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몰려오자 헝가리 정부가 미국에 이 왕관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헝가리가 공산화되면서 돌려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말 미국 카터 행정부가 돌려주겠다고 먼저 나선 것.[12] 이것은 한창 냉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연히 카터가 순진하게 헝가리의 입장을 생각해서 돌려주는 것은 아니고, 헝가리가 미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게 해서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려는 생각이었겠지만.[13] 미테랑 행정부의 최초 조건은 2년 대여+자동 갱신이었다. 사르코지는 조건을 크게 연장시켰다.[14] 2년 대여지만 연장이 무제한으로 가능해 사실상 반환이나 다름없다.[15] 일제시대 일본에서 약탈해간 조선왕실의궤가 같은 해에 반환되었는데 이 때는 일본이 운송비를 부담했다. [기고]조선왕실의궤의 초라한 귀국 이건 외규장각 도서와 달리 임대도 아니고 아예 소유권이 한국에 있고, 일본의 집권당이 상대적으로 한국에 온건한 민주당이어서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