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리

 


'''조선 왕실 3대조'''
'''翼祖 | 익조'''

[image]
익조의 능 지릉(智陵)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익조(翼祖)'''
'''시호'''
익왕(翼王) →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
'''본관'''
전주(全州)
'''휘'''
행리(行里)
'''출생'''
미상
'''사망'''
연도 미상 9월 10일
'''능호'''
지릉(智陵)
'''왕비'''
정숙왕후(貞淑王后)
'''부왕'''
목조 인문성목대왕
'''모후'''
효공왕후(孝恭王后)
1. 개요
2. 생애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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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증조부.
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익왕(翼王)만 올렸다가 현손자 태종이 1411년에 묘호 '''익조(翼祖)'''를 올리고 시호를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으로 바꿨다.#

2. 생애


목조 이안사와 효공왕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네번째 아들로 목조가 죽은 다음 해인 1275년 3월에 천호 벼슬을 물려받았고 이후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았다.
하지만 여진족 천호들에게 쫓겨나는데 당시 두만강 주변의 천호들은 모두 여진족이었지만 이행리만 유일하게 고려 출신이었다. 그래서 두만강 북쪽에 있던 동족들과 이행리를 습격해 죽이기로 하고 이를 모르는 이행리에게 사냥간다는 핑계로 거사를 하면 도망갈 도주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이행리는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를 만났는데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두만강 하류에 있는 적도라는 섬에서 가솔들과 만나기로 하고 도주로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여진족으로 가득차 있었고 겨우 적도 기슭에 다다랐지만 두만강 물이 깊고 강폭이 넓어 건널 수가 없었다. 추격병까지 쫓아왔지만 그 때 갑자기 썰물 덕분에 물이 빠져 물이 얕아졌고 건널 수가 있었다. 나중에 추격병들이 왔을 때는 밀물이 밀려와 다시 수심이 깊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행리는 적도에서 움집을 짓고 잠시 살다가 배를 10척 정도 만들어 가솔과 남아 있던 고려인들과 함께 의주, 즉 원산으로 향했다. 의주는 아버지 목조가 병마사로 선정을 베풀던 곳이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고 경흥에 살던 고려인들도 대거 오는 바람에 쉽게 세력이 다시 커졌다.
이행리는 얼마 후에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참가했는데 이 때 충렬왕을 만났다. 충렬왕은 접견 자리에서

그대는 본국(고려) 벼슬을 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음을 알겠다.

라고 말했다.[1]
이행리는 9월 10일에 죽었지만 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익왕(翼王)으로 추존했고, 태종이 익조로 재추존했다. 능은 광복 당시 기준으로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는 지릉(智陵)이다.

3. 가계


  • 아버지: 조선 추존국왕 목조 이안사
  • 어머니: 효공왕후 이씨
    • 익조 이행리
    • 정실: 손씨
      • 함녕대군(咸寧大君) 이안(李安) 또는 이규수(李嬀水)
      • 함창대군(咸昌大君) 이장(李長) 또는 이복(李福)
    • 왕비: 정숙왕후 최씨
      • 함원대군(咸原大君) 이송(李松)
      • 도조(度祖) 이춘(李椿)
      • 함천대군(咸川大君) 이원(李源)
      • 함릉대군(咸陵大君) 이고태(李古泰)
      • 함양대군(咸陽大君) 이전(李腆)
      • 함성대군(咸城大君) 이응거(李應巨)
      • 안의공주(安懿公主) 이씨
익조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손씨, 두 번째 부인은 등주(안변)의 호장 최기열의 딸 최씨였다. 원래 첫 번째 부인인 손씨가 정비로 추존받아야 했지만 익조의 뒤를 이은 것은 최씨가 낳은 서자 이춘이었기에[2] 이춘의 손자였던 이성계는 최씨를 정비(貞妃)로 추존했다(나중에 태종이 정숙왕후로 재추존 했다.).

[1] 사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원에 반(半)복속되고 충렬왕 본인도 원에 대고 뭐라 끽소리도 못하는 상황인데 그 원에 항복한 고려인 관리에 대해 뭔 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충혜왕은 원나라 사신에게 발로 마구 차이며 맞기까지 한 판인데.[2] 이때까지는 적자, 서자 구별이 없었다. 나중에 태종 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