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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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協雨
1921년[1] ~ 1987년 8월 11일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 학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1921년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2] 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와 대구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농회(朝鮮農會)에 들어가 기수(技手)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직후에는 농림부 곡물검사소 검사원, 경주출판소 검사원, 경주군 농업의원 등으로서 활동하다가, 우익 정치인에 입문하여 대한청년단 내남면 5단 부단장, 내남면 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경 내남면 민보단장으로서 내남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3]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혁명재판에서 이협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진행하여 감형되고, 결국 1963년 이협우는 석방되었다. 당시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으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범죄를 저지른 극우파들을 다수 석방하고, 역으로 이들을 고소한 피해자들을 빨갱이라고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일이 많았다.[4]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시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고향 경주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7년 8월 11일 성건동 장미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李協雨
1921년[1] ~ 1987년 8월 1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 학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2. 생애
1921년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2] 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와 대구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농회(朝鮮農會)에 들어가 기수(技手)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고등계 형사#, 내남면 서기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직후에는 농림부 곡물검사소 검사원, 경주출판소 검사원, 경주군 농업의원 등으로서 활동하다가, 우익 정치인에 입문하여 대한청년단 내남면 5단 부단장, 내남면 수리조합장을 지냈다. 1949년경 내남면 민보단장으로서 내남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3]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당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끝에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 농림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협우는 역시 극우 활동을 주도해나갔으며, 보도연맹 사건에도 가담하여 역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월성군당 위원장 및 자유당 조직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월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온갖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당선되었다.선거구 기반을 탄탄히 닦아 월성군은 '''이협우 왕국'''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정작 국회 원내활동은 별로 없음
한국전쟁 당시 무수한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한 장본인이라 각 신문에 보도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함
- 《사진으로 본 국회20년》(1968)에 수록된 이협우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인물평.
1960년 4.19 혁명 이후 주민 학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혁명재판에서 이협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진행하여 감형되고, 결국 1963년 이협우는 석방되었다. 당시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으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범죄를 저지른 극우파들을 다수 석방하고, 역으로 이들을 고소한 피해자들을 빨갱이라고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일이 많았다.[4]
1975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 경주시지부 상임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고향 경주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7년 8월 11일 성건동 장미아파트 자택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1] 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2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3] 당시 이협우는 내남경찰서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면서 주민들을 갈취, 학살하였다. 소를 팔고 집에 돌아가던 주민의 돈을 갈취 후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산으로 끌고가 죽여버리거나, 살인행위를 항의한 일가족 전체를 불태워 죽여버리는 등 이협우의 살인행위는 무차별적이었으며, 1949년에서부터 1950년까지 약 2년동안에만 140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당시 이협우의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않았으며, 10세이하 어린이도 35명이나 포함되어있었다.[4]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극우단체들의 학살활동을 비판하며 만들어진 피해자유족단체들은 5.16 군사정변 이후 들어선 정부에의해 줄줄이 간부들이 감옥에 잡혀들어가면서 사실상 와해되다시피 했다. 이들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안기부의 감시를 받았으며, 북한관련 사건이 터질때마다 수시로 잡혀가 고문을 받는 고초를 받았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