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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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베트남 대월 쩐 왕조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 휘는 진금(陳昑). 원사(元史)에서 이름이 진일존(陳日燇)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성종 진황의 장남. 인종은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자신을 죽림대사(竹林大士)로 칭하였고,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불황(佛皇)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베트남에 선종(禪宗)이 유입되었다.
내치뿐 아니라 원나라의 침략기에도 직접 항전하여 나라를 지킨 명장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재위 초기엔 아버지 성종의 섭정을 받았다. 당시 성종의 별호는 효황(孝皇)이였고 진왕조 전통적인 태상황의 개입으로 정사는 성종이 주관하였다.
1280년 정각밀(鄭角密)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종은 진일율(陳日燏)[1] 에게 명해 회유하게 하니 정각밀이 투항했고 인종과 만나자 정각밀의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
1282년 종실 진도애(陳遺愛)를 파견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진 왕조는 명목상으론 태종과 원나라가 군신관계를 맺어 원나라의 제후국이였고, 따라서 원나라는 태상황 성종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성종은 거부했고 노한 쿠빌라이 칸은 진도애를 강제로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한 뒤 병사를 붙여 안남 괴뢰화를 시도한다. 태상황 성종은 진도애 일파를 공격해 진도애와 그 병사들을 죽였고 이는 쿠빌라이의 화를 사 이전에 태종과 맺은 군신관계가 깨지고 다시 원나라와의 대전쟁의 계기가 된다.
2.2. 제2차 원월전쟁
그렇게 쿠빌라이는 이를 계기로 교지행성(交趾行省)의 사도(唆都)를 파견했고, 사도가 무려 50만 대군을 거느린채 양산(諒山)을 공격하자 인종은 태상황 성종, 진사만(陳舍灣)과 군대를 지휘해 직접 원나라의 대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한다. 진경여(陳慶餘)[2] 와 진국준 등 유능한 장수들이 어떻게든 원군을 격파하긴 했으나 몽골군은 참파까지 점령해 대월을 고립시킨 후 1284년 대월의 수도 탕롱마저 점령한다.
2.3. 살달의 의지
진 왕조는 멸망 위기에 처했고 태상황과 인종 역시 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인종은 항복을 고려했으나 항전 의지가 있던 진국준이란 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황제 인종에게 대답했다.
또한 진국준은 격장사라는 후대까지 전해지는 명문을 작성해 장수와 병사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여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항전을 계속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대월군들은 팔뚝에 '''살달(殺韃, 달단 놈들을 죽이자)'''이란 글자를 새기고 치열하게 저항했으며 대월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청야전술, 게릴라를 이용해 원군을 괴롭히자 결국 원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先斷臣首然後降」
항복하시려면 신의 목부터 베어주십시오.
이후 원나라는 1287년 다시 대월을 침공해 수도까지 점령했으나 진국준의 계략으로 원군은 무려 10만명이 전사하는 손해를 입고 철수한다. 그 후에도 원은 4차 침공을 준비했으나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내부 문제도 겹쳐 결국 대월 원정을 포기한다.
2.4. 원월전쟁 이후
이후 소수민족인 우후(牛吼)가 애뢰의 지지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하여 이를 정벌했고 1293년 태자 진전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특이하게 출가하여 불학을 연구해 불황(佛皇)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처럼 국정에 개입했다. 그 후 원나라의 사신이 인종에게 입조를 요구하자 인종은 병을 핑계로 따로 사신을 보내 직접 입조하지 않자 원이 베트남을 침공하려 했으나 때마침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여 정벌은 중단되었다.
그 후 인종은 불학과 국정에 힘쓰다 1308년 사망했다. 인종은 문(文)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관심이 많아 베트남에 선종이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선사(禪師)를 제자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