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왕조

 




'''진가'''
'''陳家'''
'''존속기간'''
1225 ~ 1400
'''본칭'''
대월
'''베트남어'''
Nhà Trần(家陳)
'''한국어'''
쩐 왕조 / 진조 / 진씨 왕조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진(陳)
'''국가 원수'''
황제[1]
'''위치'''
베트남(안남)
'''주요 황제'''
초대 '''태종'''[2]
2대 '''성종'''[3]
9대 예종(藝宗)[4]
13대 소제[5]
'''역사'''
1225년 건국
1400년 멸망
'''성립 이전'''
리 왕조
'''멸망 이후'''
호 왕조
1. 개요
2. 역사
3. 역대 황제
3.1. 계보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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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두번째 장기 왕조이다. 즉위 과정에서는 도덕적으로 욕을 먹을 짓을 한 쩐투도쩐 태종이었지만 리 왕조 말기에 발발했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한편, 정치 제도와 군사 조직을 개혁하고 강화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 역사


13세기 중엽부터 몽골 제국침공을 받았다. 당시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해 원나라가 세워지고 한족남송여진족금나라, 그리고 탕구트족의 서하가 모두 멸망한 직후였으며 원나라는 남쪽 방면의 안정과 진정한 중국 통일을 위해[6] 한족 위주의 수군을 대규모로 동원해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알다시피 베트남이 중국을 무찌른 사례 1에 추가되었을 뿐이다.
  • 1차는 1257년의 침공으로 대리국을 점령한 몽골족의 원나라 군이 정송가도를 요구하며[7] 3만의 군대[8]로 침공하였다. 원군은 수도인 탕롱(Thăng Long, 昇龍, 지금의 하노이)를 점령하였으나, 전염병으로 철수하였고 이를 틈타 베트남군이 공격하여 원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 2차 침입은 1284년으로 대원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 칸은 참파, 운남, 광동의 세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이 가운데 참파는 당시 이미 원군이 침입한 상태였다. 참파의 수도는 점령당했지만 하리짓 왕자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이 진행 중이었다. 원군은 수도를 함락시켜 쩐 왕조를 멸망직전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쩐흥다오(陳興道, Trần Hưng Đạo)의 계속되는 항전과 전염병, 게릴라전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고, 베트남군은 원나라군 포로만 5만명을 사로잡을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이 사이 1285년, 쩐 왕조는 국호를 안남에서 대월로 돌려놓아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image]
'''쩐흥다오(1228년 ~ 1300년)''', 쩐 태종의 형의 아들로, 쩐 태종의 조카이자 2대 쩐 성종의 사촌형.
  • 하지만 근성의 원 세조 쿠빌라이는 1287년, 3차 침공을 감행한다. 이걸 위해서 진행 중이던 일본 원정까지 중단시켜 버렸다. 이때도 수도를 점령하고 베트남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쩐흥다오가 1288년 병량을 수송하던 원의 수군을 바익당 강(白藤江, 현재의 송코이 강 혹은 홍하)에서 격파함으로써 원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서 독립 직후 중국 세력을 모두 물리쳤다!
  • 당시 황제였던 인종(仁宗)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조공을 바치고 당시 잡아두고 있던 원나라군 포로를 전원 송환하는 등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지만, 오로지 직접 통치만을 외쳐던 세조 쿠빌라이의 근성은 끝이 없어서 또 4차 침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근성의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정벌은 중단되었다.
쩐 왕조는 이후 참파의 포 비나수오르의 공격으로 수도가 연이어 털리고, 10대 황제 예종(睿宗, Trần Duệ Tông)이 전사하기까지 하는 사태를 겪었다. 당시 9대 황제 예종(藝宗, Trần Nghệ Tông)의 외척이었던 권신 호꾸이리(Hồ Quý Ly, 胡季犛)가 권력을 잡고 득세함으로써 1400년, 10대 175년만에 멸망했다.
학살로 즉위한 쩐 왕조는 다른 성씨의 찬탈을 막기 위하여 태상황 제도나 근친혼 등을 적극 활용했다. 9대 황제 예종(藝宗)도 태상황으로 동생 예종(睿宗)의 사망과 조카 폐제의 폐위를 지켜보고 사망했다.[9] 하지만 과거 제도나 외척 등으로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3.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연호
재위
추존
-
선감가응령무대왕
(善感嘉應靈武大王)
사섭(士燮)
-
-
추존
목조
(穆祖)

의황제(懿皇帝)
진경(陳京)
-
-
추존
영조
(寧祖)
공황제(恭皇帝)
진흡(陳翕)
-
-
추존
원조
(元祖)

소황제(昭皇帝)
진리(陳李)
-
-
추존
휘종
(徽宗)

개운입극홍인응도순진
지덕신무성문수유지효황제
(開運立極弘仁應道純眞
至德神武聖文垂裕至孝皇帝)
진승(陳承)
-
-
태조
(太祖)

추존
-
충무대왕
(忠武大王)
진수도(陳守度)
-
-
1대
태종
(太宗)

통천어극융공무덕현화
우순신문성무원효황제
(統天御極隆功茂德顯和
佑順神文聖武元孝皇帝)
진경(陳煚)
건중(建中) 1225년 ~ 1232년
천응정평(天應政平) 1232년 ~ 1251년
원풍(元豊) 1251년 ~ 1258년
1225년 ~ 1258년
2대
성종
(聖宗)

현공성덕인명문무선효황제
(玄功盛德仁明文武宣孝皇帝)
진황(陳晃)
소륭(紹隆) 1258년 ~ 1272년
보부(寶符) 1273년 ~ 1278년
1258년 ~ 1278년
3대
인종
(仁宗)

법천숭도응세화민융자현
혜성문신무원명예효황제
(法天崇道應世化民隆慈顯
惠聖文神武元明睿孝皇帝)
진금(陳昑)
소보(紹寶) 1279년 ~ 1285년
중흥(重興) 1285년 ~ 1293년
1278년 ~ 1293년
4대
영종
(英宗)

현문예무흠명인효황제
(顯文睿武欽明仁孝皇帝)
진전(陳烇)
흥륭(興隆) 1293년 ~ 1314년
1293년 ~ 1314년
5대
명종
(明宗)

장요문철황제
(章堯文哲皇帝)
진앵(陳奣)
대경(大慶) 1314년 ~ 1323년
개태(開泰) 1324년 ~ 1329년
1314년 ~ 1329년
6대
헌종
(憲宗)

체원어극예성지효황제
(體元御極睿聖至孝皇帝)
진왕(陳旺)
개우(開佑) 1329년 ~ 1341년
1329년 ~ 1341년
7대
유종
(裕宗)

통천태도인명광효황제
(通天態道仁明光孝皇帝)
진호(陳暭)
소풍(紹豊) 1341년 ~ 1357년
대치(大治) 1358년 ~ 1369년
1341년 ~ 1369년
추존
-
황태백
(皇太伯)
진원욱(陳元昱)
-
-
8대
-
혼덕공(昏德公)
,<전폐제(前廢帝)>,
양일례(楊日禮)
대정(大定) 1369년 ~ 1370년
1369년 ~ 1370년
9대
예종
(藝宗)

광요영철황제
(光堯英哲皇帝)
진부(陳暊)
소경(紹慶) 1370년 ~ 1372년
1370년 ~ 1372년
10대
예종
(睿宗)

계천응운인명흠효황제
(繼天應運仁明欽孝皇帝)
진경(陳曔)
융경(隆慶) 1373년 ~ 1377년
1372년 ~ 1377년
11대
-
영덕왕(靈德王)
,<후폐제(後廢帝)>,
진현(陳現)
창부(昌符) 1377년 ~ 1388년
1377년 ~ 1388년
12대
순종
(順宗)

-[10]
진옹(陳顒)
광태(光泰) 1388년 ~ 1398년
1388년 ~ 1398년
13대
-
-
,<소황제(小皇帝)>,
진안(陳[image])
건신(建新) 1398년 ~ 1400년
1398년 ~ 1400년

3.1. 계보


진경
진흡
진리
진승
'''진수도'''
'''1. 진경'''
진류
2. 진황
'''진국준'''
3. 진금
4. 진전
'''5. 진앵'''
6. 진왕
진원욱
7. 진호
9. 진부
10. 진경(曔)

8. 양일례

12. 진옹
'''14. 진외'''
진혈
,(장정왕),
11. 진현

'''13(末). 진안'''

'''15(末). 진계확'''
'''16(末). 진고'''
,(계보 미상),

4. 둘러보기


'''베트남의 역사'''
대월
리 왕조

'''쩐 왕조'''

호 왕조






[1] 외왕내제.[2] 왕조 건국.[3] 대월사기 완성.[4] 혼란기, 상황 재위동안 참파 정벌, 명나라의 책봉 문제.[5] 마지막 군주.[6] 몽골도 베트남 북부를 중국 땅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쳐들어간 것. 왜냐하면 자신들이 송나라를 계승했다고 생각했기에, 송나라의 잃어버린 땅인 베트남 북부를 되찾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7] 물론 여기로 가는게 더 멀다. 베트남 북부에서 광시좡족자치구윈난 성, 구이저우 성 등 중국 남부로 갈려면 안남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게 엄청난 고산이다.[8] 한족 수군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거란족여진족 혼성부대로 구성된 부대였다.[9] 다만 이는 약간 과장한 것으로 진현은 예종이 폐위한거다. 게다가 9대 예종의 재위기간은 고작 2년으로 태상황 재위기간의 20년보다 1/10 수준이다.[10] 시호는 실전되었으나, 태상원군황제(太上元君皇帝)라는 존호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