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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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두번째 장기 왕조이다. 즉위 과정에서는 도덕적으로 욕을 먹을 짓을 한 쩐투도와 쩐 태종이었지만 리 왕조 말기에 발발했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한편, 정치 제도와 군사 조직을 개혁하고 강화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 역사
13세기 중엽부터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해 원나라가 세워지고 한족의 남송과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탕구트족의 서하가 모두 멸망한 직후였으며 원나라는 남쪽 방면의 안정과 진정한 중국 통일을 위해[6] 한족 위주의 수군을 대규모로 동원해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알다시피 베트남이 중국을 무찌른 사례 1에 추가되었을 뿐이다.
- 1차는 1257년의 침공으로 대리국을 점령한 몽골족의 원나라 군이 정송가도를 요구하며[7] 3만의 군대[8] 로 침공하였다. 원군은 수도인 탕롱(Thăng Long, 昇龍, 지금의 하노이)를 점령하였으나, 전염병으로 철수하였고 이를 틈타 베트남군이 공격하여 원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 2차 침입은 1284년으로 대원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 칸은 참파, 운남, 광동의 세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이 가운데 참파는 당시 이미 원군이 침입한 상태였다. 참파의 수도는 점령당했지만 하리짓 왕자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이 진행 중이었다. 원군은 수도를 함락시켜 쩐 왕조를 멸망직전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쩐흥다오(陳興道, Trần Hưng Đạo)의 계속되는 항전과 전염병, 게릴라전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고, 베트남군은 원나라군 포로만 5만명을 사로잡을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이 사이 1285년, 쩐 왕조는 국호를 안남에서 대월로 돌려놓아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쩐흥다오(1228년 ~ 1300년)''', 쩐 태종의 형의 아들로, 쩐 태종의 조카이자 2대 쩐 성종의 사촌형.
- 하지만 근성의 원 세조 쿠빌라이는 1287년, 3차 침공을 감행한다. 이걸 위해서 진행 중이던 일본 원정까지 중단시켜 버렸다. 이때도 수도를 점령하고 베트남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쩐흥다오가 1288년 병량을 수송하던 원의 수군을 바익당 강(白藤江, 현재의 송코이 강 혹은 홍하)에서 격파함으로써 원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서 독립 직후 중국 세력을 모두 물리쳤다!
- 당시 황제였던 인종(仁宗)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조공을 바치고 당시 잡아두고 있던 원나라군 포로를 전원 송환하는 등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지만, 오로지 직접 통치만을 외쳐던 세조 쿠빌라이의 근성은 끝이 없어서 또 4차 침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근성의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정벌은 중단되었다.
학살로 즉위한 쩐 왕조는 다른 성씨의 찬탈을 막기 위하여 태상황 제도나 근친혼 등을 적극 활용했다. 9대 황제 예종(藝宗)도 태상황으로 동생 예종(睿宗)의 사망과 조카 폐제의 폐위를 지켜보고 사망했다.[9] 하지만 과거 제도나 외척 등으로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3. 역대 황제
3.1. 계보
4. 둘러보기
[1] 외왕내제.[2] 왕조 건국.[3] 대월사기 완성.[4] 혼란기, 상황 재위동안 참파 정벌, 명나라의 책봉 문제.[5] 마지막 군주.[6] 몽골도 베트남 북부를 중국 땅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쳐들어간 것. 왜냐하면 자신들이 송나라를 계승했다고 생각했기에, 송나라의 잃어버린 땅인 베트남 북부를 되찾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7] 물론 여기로 가는게 더 멀다. 베트남 북부에서 광시좡족자치구 및 윈난 성, 구이저우 성 등 중국 남부로 갈려면 안남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게 엄청난 고산이다.[8] 한족 수군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거란족과 여진족 혼성부대로 구성된 부대였다.[9] 다만 이는 약간 과장한 것으로 진현은 예종이 폐위한거다. 게다가 9대 예종의 재위기간은 고작 2년으로 태상황 재위기간의 20년보다 1/10 수준이다.[10] 시호는 실전되었으나, 태상원군황제(太上元君皇帝)라는 존호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