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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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元史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이다. 『원사』는 홍무제 주원장이 명을 건국한 1368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369년 8월에 완성했다가 다시 검정을 거쳐 1370년 7월에 완성했다.
2. 편찬 과정
찬술의 감수는 중서성 좌승상 이선장(李善長)이 맡았고, 한림학사 송렴(宋濂)과 대제 왕위(王褘)가 총재를 맡았다. 그 외에 조훈(趙壎), 왕극관(汪克寬) 등 16명이 실무를 담당했다. 1369년 8월에 완성한 것은 원나라 마지막 군주인 순제(順帝) 시기를 제외했기[1]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370년에 사국(史局)을 다시 열어 순제 시기의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7월에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2.1. 졸속 여부
역대 중국 정사에서 『원사』만큼 가장 단기간에 편찬된 사서는 없었다. 그 이전에 편찬된 『송사』, 『요사』, 『금사』와 보다 더 신속하게 편찬되었다. 이렇게 『원사』가 졸속으로 불려질 정도로 신속히 편찬된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홍무제 주원장의 엄한 독촉 때문이다. 1차적으로 『원사』를 편찬했던 송렴 등은 주원장의 질책을 받는 것이 두려워 순제 시기를 제외하고 불과 6개월만에 완성했다.[2]
둘째, 이 책이 편찬된 1368~1370년 당시는 아직 원나라가 멸망하지 않았고 다만 남쪽 영토를 잃고 북쪽으로 축소된 상태일 뿐이었다. 후대에는 편의상 '북원'으로 달리 부르고 중원 땅을 회복하지 못하고 멸망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 당시에는 여전히 원나라의 정통성[3] 이나 실질적인 군사적 저력[4] 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이 와중에 원나라를 다루는 정사를 서둘러 편찬한다는 것은 즉 원나라를 '지나간 왕조' 취급하고 현존하는 원나라(북원)를 애써 부정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옛 중국에서 정사는 한 나라가 멸망한 뒤 후대 왕조가 편찬하는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명나라의 지식인들은 원나라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즉, 『원사』의 편찬은 어디까지나 명의 건국을 선포하고 북방 오랑캐를 쫓아낸 것의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진정으로 원나라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료의 수집이나 체제도 대강 했다. 『원사』의 1차적인 사료는 『경세대전(經世大典)』, 『공신열전(功臣列傳)』, 『원대일통지(元大一統志)』 등과 황제의 실록[5] 을 주로 근거로 하여 이를 대조시켜 초록하는 방식으로 편찬했다. 다시 말해, 순제 시기 이전까지의 역사는 그냥 실록에 의존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1차 편찬 당시 순제 시기를 서술하지 않는 것도 그가 마지막 황제고 이 책을 쓸 땐 아직 북원에서 살아있어서 실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차 편찬할 때는 이전보다 체계적으로 계획해 차례를 넣었고, 구양우(歐陽佑) 등이 직접 현장에 나가 다양한 사료 수집을 하여 금석문 등 적지 않은 사료를 얻어내어 첨부하거나 누락된 순제 시기를 보완하였다.
3. 구성
본기(本紀) 47권, 지(志) 58권, 표(表) 8권, 열전(列傳) 97권 총 2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의의와 평가
『원사』를 편찬할 때 근거로 한 1차 사료들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다. 가장 많이 의존했을 법한 황제의 실록 역시 현존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일부 사료가 잔존하긴 하나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원사』는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필요한 1차적 사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위에서 상술했듯이 『원사』는 너무나 일찍 편찬되어 졸속이라는 악평을 받어야만 했다. 학계에서도 『원사』는 자료 수집과 제대로 된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강조했다. 더욱이, 편찬 당시 기초 자료로 이용되었던 실록이나 관련 사료들은 모두 몽골어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몽골어에 문외한인 명나라의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된 사서들을 중점적으로 채택했다. 랏시드 앗 딘의 『집사』나 『원조비사』역시 극히 제한적으로 참고되었다. 따라서 『원사』는 1차적 사료이지만 너무나 엉성하고 부실하다. 또한, 몽골 제국 당시의 역사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점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사』의 문제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서로서의 통일성에서도 현저하게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본기 중에서 한 가지의 사실이 반복되거나 열전에서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착각하여 서술하는 등이 있다.[6] 그 외에도 「재상표」에는 성만 적혀있고 이름은 적혀있지 않는 경우, 한문으로 번역된 몽골인의 이름을 통일 시키지 않은 경우 등등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였다.
『원사』는 많은 지적이 제기되어 홍무제 주원장도 스스로 개정, 보수 작업을 명한 바가 있고, 이미 홍무 연간에 주우(朱右)의 『습유』, 해진(解縉)의 『정오』등이 저술되어 『원사』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청나라 건국 후에는 관련 사료가 한층 풍부해져서 위원(魏源)의 『원사신편』, 증렴(曾廉)의 『원서』등이 나왔다. 20세기 이후에도 커샤오민(柯劭忞)의 『신원사』가 당시 군벌 정권에서 정사로 공인받기도 했으나, 신원사도 군벌 전쟁 중 졸속으로 나온 역사라 오히려 원사보다도 떨어지는 편이다.
[1] 순제 시기에는 사관이 폐지되어서 사료적 근거가 불충분했다.[2] 6개월만에 완성될 당시 구성이 순제 시기를 제외하면 영종까지 본기 37권, 지 53권, 표 6권, 열전 63권, 목록 2권으로 총 161권이었다. 이것도 순제 사후 순제의 본기를 쓰고 원사를 보완하면서 총 210권으로 늘어난 것.[3] 원나라라는 나라에 충성하는 한인도 많이 있었다.[4] 북원의 명장 코케 테무르는 계속 중국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왔고 1372년 명군에 대승리를 거두기도 했다.[5] 태조부터 영종까지를 아우르는 13조 실록을 일컫는다.[6] 예를 들어 고염무의 『일지록』에서 「열전」 제8의 속불태(速不苔)는 제9의 설불태(雪不兌)이며 제18의 완자도(完者都)는 제20의 완자발도(完者拔都)이고, 제30의 석말야(石抹也)는 제39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인데도 한 사람에 대하여 두 개의 전(傳)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