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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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시에 있는 동상
'''시호'''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
'''호칭'''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陳興道/진흥도)
'''성씨'''
쩐(Trần, 陳/진)
''''''
꾸옥 뚜언(Quốc Tuấn, 國峻/국준)
'''생몰년도'''
1228년 ~ 1300년
1. 소개
2. 생애
3. 사후 영향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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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唐之郭子儀,陳之陳國峻有焉'''

'''곽자의가 있었다면, 쩐 왕조에는 쩐꾸옥뚜언(쩐흥다오)이 있었다.'''

'''<대월사기전서>, 응오 씨 리엔'''

베트남 쩐 왕조(陳朝)의 명장. 본명은 쩐꾸옥뚜언(Trần Quốc Tuấn, 陳國峻/진국준). 시호는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 그리고 쩐흥다오라는 호칭은 그의 시호인 흥다오브엉(Hưng Đạo Vương, 興道王/흥도왕)에서 따온 것이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베트남판 충무공 이순신.'''[1]

2. 생애


베트남 쩐 왕조의 황제태종(太宗, 타이똥)의 조카[2]로, 1257년 원나라 제1차 침입 때 베트남의 북방을 굳게 지켜 공을 세웠다. 이후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원나라의 제2차 침입(1284년 ~ 1285년)으로 수도 탕롱(昇龍, 승룡, 지금의 하노이)이 함락되고 황제 인종(仁宗, 1257년~1308년)까지 항복을 고려하자, 그는 《격장사(檄將士)》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고[3] 무려 25만에 달하는 장정을 모집할 수 있었다. 다음은 격장사의 발췌문이다.

今余明告汝等. 當以措火積薪為危, 當以懲羹吹虀為戒. 訓練士卒習爾弓矢, 使人人逄蒙家家后羿. 購必烈之頭於闕下, 朽雲南之肉於杲街, 不唯余之采邑永為青氈, 而汝等之俸祿亦終身之受賜. 不唯余之家小安床褥, 而汝等之妻拏亦百年之佳老.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4]

이나 후예(后羿)[5] 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6]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7]의 살점을 고가(藁街)[8]에서 썩게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그대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9]

그는 현명하게도 이 병력으로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게릴라로 일관[10]하여 원군을 괴롭혔고[11], 원군은 결국 풍토병[12]과 식량 부족으로 철수한다. 당시 베트남 군인들은 팔꿈치에 '살달(殺韃)'[13]이라는 글까지 새겨 가며 치열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그 뒤 원나라가 세 번째로 침입(1287년 ~ 1288년)하자, 그는 강폭은 매우 넓지만 도처에 얕은 여울이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함선의 운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인 바익당 강(白藤江, 백등강, 현재의 송코이 강 혹은 홍하)[14]을 전장으로 삼아,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滿潮) 때 원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간조(干潮)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의 군선들을 공격하여 피해를 크게 입혀 물러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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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모습을 묘사한 오스프리 삽화[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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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묘사한 현대의 그림
참고로 원나라의 남방 원정의 주축은 세간에 알려진 "몽골"이라는 이름과 달리 한족 특히 남송의 항장 및 항군이 주력이었다. 애초 원나라에서 해군은 전부 다 한족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운용했고 이는 청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몽골이나 만주의 황무지에서 뛰놀던 유목 민족들보단 바다를 맞닿으며 살아 온 남방의 한족들이 바다를 더 잘 알아서이다. 일본 원정도 고려를 제외한 원나라 군의 구성원이 거의 90%는 한족 부대였고, 거란과 여진족의 혼성부대가 그 다음이었다. 고려 원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몽골제국에서 몽골족이라는 것은 하나의 큰 민족단위가 아니라 그냥 황족 및 귀족이라 이해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에서 몽골족은 곧 귀족이라는 말과 같다.
3차 침략까지 물리치기는 했으나 인종은 몽골이 포기하지 않을경우 장기적으로는 베트남의 역량이 고갈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국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화친을 위해서 원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원나라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면서 원을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직접지배를 원하던 쿠빌라이 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4차 원정을 준비케 했으나, 결국 쿠빌라이 칸의 사망으로 원나라는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해 베트남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베트남은 세계 역사상 몽골 제국을 구성한 나라의 군을 격퇴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세계적인 슈퍼 파워하고 싸워서 이기는 게 특기인가 보다. 물론 그 당시 베트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족 왕조로부터 독립 투쟁을 펼치고 또한 참파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대립을 했기 때문에[16] 군사력이 강하긴 했으나, 상대가 이미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호라즘 등을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과 맞서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놀라운 업적이다. 결국 몽골 제국은 베트남인들이 중국을 물리친 사례에 추가되어 버렸다. 당나라-송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 순으로 중국의 대군을 한족, 몽골인, 만주족 불문 격파한 베트남의 전공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1979년 중월전쟁 승리로 마무리 되고 이후의 중국은 다시는 베트남을 못 쳐들어오는 판이다.
쩐흥다오는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왕에 봉해졌으며, 성종 이후로 인종과 영종(1276~1320)을 보좌하다가 1300년 사망했다. 죽기 직전 영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군대는 가족처럼 단결시키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여 그 힘으로 대업을 이루십시오.'''


3. 사후 영향


쩐흥다오 사후에 시호를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 Nhân Vũ Hưng Đạo Đại Vương)으로 받으면서 흥도대왕(興道大王, Hưng Đạo Đại Vương)으로 신격화되어서 쩐흥다오의 기일에는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저서에 《병서요략(兵書要略)》[17], 《만겁종비전서(萬劫宗秘傳書)》 등이 있는데, 모두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늘날까지 베트남에선 그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남·북베트남 가릴 것 없이 쩐흥다오를 자신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했다. 북베트남 입장에선 미군원나라청나라 같은 오랑캐로 규정해 그를 본받아 그들을 몽땅 까부수자는 목적이었고, 남베트남 입장에서도 월맹, 베트콩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식. 남베트남에선 자국 화폐의 디자인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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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500동짜리 화폐의 모습(1966년 유통 시작)'''
현재는 베트남 정부가 원나라의 3차 침입을 물리친 하이퐁 박당강(Bạch Đằng Giang)에 전쟁 승리 유적 공원을 만들어 수많은 하이퐁을 대표하는 역사관광단지로 조성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여행후기를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징기스칸 4


코에이의 게임인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 이 게임에서 전체적으로 암울한 베트남 출신 무장들 중 최강의 사기 캐릭터이다.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에 걸맞는 능력치와 특기를 자랑하는데, 정치 55, 전투 '''88''' 지모 74에 특기는 돌격·연사·복병이다. 특히 전투력은 시나리오2에서 '''전체 랭킹 6위다.'''[18] 그를 잘 이용하면 옆에 있는 위에 있는 남송도 거뜬히 집어삼키는 것이 가능하며, 파간 왕조 정도는 아예 혼자서 정리할 수 있다. 헌데 왕족임에도 불구하고[19], 왕족이 아니라고 되어있는 고증오류 겸 단점이 있다.[20][21]
[1] 그래서 사실 '쩐흥다오'라는 이름은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을 '이충무공'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 이긴 한데, 그 족보가 심히 막장스럽다. 타이똥은 지난 왕조의 마지막 여왕 찌에우황과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어, 당시 권신이자 타이똥과 그 형의 숙부인 쩐투도는 이미 타이똥의 형과 혼인했던 찌에우황의 언니를 이혼시키고 타이똥과 재혼시켰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고 쩐흥다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쩐왕조는 찌에우황의 언니와 타이똥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이어가는데 이 사람은 쩐흥다오의 사촌이기도 하고 이부형제이기도 한 심히 복잡스러운 족보이다.[3] 항복할지 항전할지를 망설이는 인종에게 "'''항복하시려면 그 전에 신의 목부터 베어주소서'''"라고 했다. 인종은 이에 항전을 결심했다고 한다.[4]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5] 봉몽의 스승. 항아의 남편. 중앙상제 제곡의 아내들 중 희화와 상희가 낳은 자녀들인 10명의 태양과 12명의 달 중 태양들이 요임금 때 한꺼번에 떠올라 세상을 열지옥으로 만들어놓았을 때 활로 9명을 쏘았고 그 밖에도 많은 괴물들을 활과 검으로 처단했다. 그후 제곡의 원망을 샀던 탓에 항아와 함께 인간으로 격하되고 불사약을 구해왔으나 항아가 몰래 삼켜 달로 승천하고 말년에는 봉몽을 제자로 받아서 교육시켜 명사수로 만들어주었으나 예를 질투한 봉몽이 몽둥이로 예를 죽이고 사후 제곡에 의해 종포신이 되었다.[6] 쿠빌라이 칸.[7] 쿠빌라이 칸의 아홉째 아들인 토곤. 실제로는 진남왕(鎭男王)에 봉해졌었다. 운남왕에 봉해진 것은 쿠빌라이의 다른 서자인 우게치. 여담으로 토곤의 손자인 바이바이(伯伯)나 우게치의 현손자인 바자르오르미는 명에 항복한 뒤 홍무제에 의해 가족들 모두 제주도로 옮겨졌었다.[8] 원래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인데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9] 출처: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 2010 에서 재인용.[10] 베트남도 군마가 부족해서 고려송나라처럼 보병 중심이다. 그래서 기병 중심의 원군과 싸우면 전면전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이런 전술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밀림이 많아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쳐야 했던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셈이다.[11] 원군 입장에선 정말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을 것이다. 정글이라 덥고 습한 데다가 각종 독충에 맹수들이 우글거리며 병사들을 괴롭히는게 패시브로 들어가는데 거기에 베트남군이 1~2만도 아니고 '''25만'''이나 되는 대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걸어오니, 사방팔방에서 찌르는 전술에 정신적으로 정말 극한까지 몰렸을 것이다.[12] 프랑스군, 중국군, 미군도 베트남의 풍토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13] '타타르(=달단(韃靼), 몽골족)를 죽이자'. 정작 원나라 군의 경우 대부분 남송금나라 항복군으로 구성되어서, 몽골족은 장군 몇 뿐이고, 나머지는 대다수의 한족 병사와 소수의 여진족 병사들이었다. 근데 원래 몽골족 자체가 소규모 부족에서 출발해 타타르계 부족들을 흡수하며 불어난 개념이라 따져봤자 의미없다.[14] 이전 938년 남한(오대십국시대)침입을 격파하고, 981년 북송의 침입을 격파한 곳이기도 하다.[15] 다만 오스프리치곤 고증이 좀 부족하다. 베트남 선박을 같은 책의 캄보디아 선박 형태로 고증했다. 중국 선박은 고증이 잘 된 편이다.[16] 그런데 참파도 몽골이 공격했을 땐 같이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베트남과 참파의 왕 체만(Chế Mân)은 감정을 접는 데 합의하고 함께 몽골을 막았다. 체만은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얼마 못 가 급사했고, 그 아들이 참파의 왕위에 올라 베트남에게 통수를 갈겼다가 결국 망했어요.[17] 몽골의 제2차 침입을 막을 때 베트남 지리에 맞는 함정 설치법, 유인책, 게릴라 전법을 정리한 것으로, 이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베트남 인 스스로 적과 싸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 책은 훗날 월남전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월맹과 베트콩의 기본 전략서로 활용되었다. 전투종족 베트남 인의 근성은 중세부터 갈고 닦아 현대까지 내려 온 것이다.[18] 다만 몽골하고 한 번도 싸운적 없는 완전 국내용 장수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전투 95, 지모 75로 뻥튀기된 걸 생각하면 다소 불만스럽다.[19] 위에 나와있지만 작은아버지가 베트남의 왕이었다. 후계구도가 꼬였다면 엄연히 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이다.[20] 왕족은 병사 상한치가 1000으로 되었있다. 대신 사위로 만들면 상한치가 800이 되니 그쪽을 이용해도 된다.[21] 단, 이 부분은 고증오류가 아니라 징기스칸 4의 시스템적 특징이다. 징기스칸 4의 '왕족'은 아무 장수에게나 임의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세력의 군주를 기준으로 군주의 자식들이 '왕족', 군주의 형제들이 '친척'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데이터를 비교해서 군주를 아버지로 둔 장수가 '''왕족''', 군주와 같은 아버지를 둔 장수가 '''친척'''이 되고 군주를 아버지로 둔 공주와 결혼한 장수는 '''사위'''가 되지만... 조카나 사촌은 친척으로 표시되지 않는 것. 애초에 할아버지지 데이터가 없으면, 3촌 이상의 친척관계는 따질 수도 없다. 즉, 왕의 조카면 징기스칸 4의 시스템 상에 왕족이나 친척이 아닌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