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 (노회찬)
1. 개요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은 1987년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운동 조직이다. 대한민국 운동권의 한 축인 '''PD(민중민주)계열의 시발점'''중 하나로 평가되는 조직이며,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설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2. 활동
2.1. 인민노련의 결성
80년대 중반부터 인천,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곧바로 ‘살인·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투쟁위원회’를 결성, 서울지역 원정시위를 벌였다. 이를 모태로 6월 항쟁 시기, 인천의 부평역 앞 광장에서 노동자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결성했다. 반 제국주의, 반 파쇼 민중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고, 노회찬, 최봉근, 주대환을 지도부로, 정태윤, 황광우, 조승수, 송영길, 신지호 등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함께 했다.
2.2. PD계열의 뿌리가 됨
초기의 인민노련은 인천지역 민주화, 노동운동가들의 연합으로써 NL계열의 운동가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러나 NL계가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주체사상, 연방제 통일안은 당시 다른 계열 운동가들이나 노동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기 충분했다. 특히 주대환은 민족해방계열을 '''소부르주아적 노동자운동'''으로 규정하며 비난했고, 결국 NL계는 인민노련에서 철수한다.
인민노련은 당시 운동권의 주류였던 주체사상파(NL)와 제헌의회파(CA)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노동 현장에 기반하여 실천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1] 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6월 항쟁이 민중의 성공으로 끝나자, 억압당했던 노동자, 서민,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폭발하기 시작했고, 7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민노련의 세는 급격하게 커져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노동운동조직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생적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CA소장파들은 인민노련 내에서 화학적 결합을 이루었고, 결국 현재의 PD계열의 원류가 되는 정파를 만들어냈다.
2.3. 대중적 노동자 정당 운동
다른 PD계열과 차별화되는 이들의 특징은 바로 '''합법적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이다. NL은 김대중과 민주당계열에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고, 막 생겨나던 다른 PD계파들은 급진성을 내세우며 총파업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구심점이 되어노동자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건설하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정치무대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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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노련의 강령.
그러나 인민노련은 소련 붕괴후 좌파진영의 혼란 속에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 설립의 '신노선'을 내세우고, 노회찬과 주대환 등 인민노련 출신 활동가들은 CA, PD의 일부세력과 결합하여 민중당 설립에 앞장선다. [2] 이들은 전노협 건설과 민주노총의 일부 산별 노조들에 있어서 지도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들의 영향은 훗날 민주노동당 창당에 큰 기여를 했고, 이후 정의당의 주도세력이 되기도 한다.
2.4. 인민노련 사건
1989년 8월부터 인민노련은 기관지 '''사회주의자'''를 발간했다. 이는 전국으로 알음알음 유포되어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론을 전파했고, 공안당국이 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위원장 오동렬을 포함한 15명의 지도부가 당국에 체포되었고, 18일에는 인천 각지의 비합법 민주노조 건설운동에 착수한 인민노련 간부들이 줄줄히 유치창 신세를 지게 되었다. 검거 광풍은 12월까지 계속되어 21명의 간부들이 더 체포되었다. 이들의 죄목은 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에 기반한 혁명론과, 노동법 위반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문과 탄압속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좌익 용공분자라는 검사의 주장에 오동렬과 노회찬등은 오히려 자신들이 남한의 자생적 사회주의자이며, 그들을 핍박받는 노동자로 만든 남한의 독점재벌이 오히려 죄가 있다고 꿋꿋히 항소했다. 이런 모습은 당대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감동시켰고, 김진균 교수, 권호경 목사 등 232명이 이들을 향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풍파를 일으켰다. 이러한 여론의 지지와 더불어 북한과의 용의점이 확인되지 않았고, 또한 대중적 노동자정당을 통한 합법노선도 병행했다는 점에서 비교적(...) 양형인 3년형을 선고받았다.
3. 해소
3.1.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준비
1991년, 인민노련은 지도부가 검거되었음에도 전혀 와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그해 말부터 자신들이 추구하던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인민노련을 중심으로, NL비주체사상파와 제파PD그룹등이 연합해 '한국노동당 창준위'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에 제동을 건 사건이 발생했으니, 이는 정권의 탄압도, 계파갈등도 아닌 '''소련 해체'''였다. 소비에트가 붕괴하자 여러 좌파 활동가들은 정당의 성격을 전위정당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였고, 이들은 다시금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이하 노정추)로 결집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다. 그러나 PD계열 일부와 다수의 NL계들이 이 정당 건설운동에 반대했고,[3] 전노협또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3.2. 민중당(1990년)으로의 합당
노정추는 이미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김문수 등과 접촉하여 합당을 논의했다. 처음에는 당대당 합당식으로 당명도 개정하고, 새로운 강령도 작성할 기세였으나, 공안 당국이 주대환등을 비롯한 노정추의 주요 인사들을 국보법으로 체포한 이후, 통합의 추는 민중당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인민노련은 '''토지공개념 실현''', '''재벌 해체와 민주적 재편''', '''대대적 군비축소''', '''노동 3권 보장''' 등을 명시하는 통합결의안에 서명하고 완전히 민중당에 흡수되었다.
3.3. 이후
민중당이 총선에서 참패한 이후, 당권파[4] 들에 의해 민중당은 해산된다. 노회찬, 조승수 등은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구성하여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 해 나가고, 이는 민중정치연합을 거쳐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건설로 이어져 나간다.
[1] 혁명의 열정이 뜨겁던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민주주의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벗어났다는 이단 선언과 다름 없었다.[2] 이를 따르던 학생들은 민중당 청년학생위원회로 결집, 훗날 21세기 진보학생연합를 건설하게된다.[3] 평등파들에게 있어서 부르주아 의회는 타파해야할 것이었고, 다수 NL들에게 있어서 한반도 내 유일한 노동자정당은 조선로동당이었기 때문에...[4] 김문수, 이재오 등. 이들은 곧 진보정치를 포기하고 민주자유당으로 입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