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그룹
制憲議會그룹(CA그룹)
'''C'''onstituent '''A'''ssembly Group
1. 개요
1980년대 한국에 존재했던 운동권 정파 그룹으로 영문명의 머리글자를 따서 '''CA'''그룹이라고도 부른다.
사구체 논쟁 이 한창이던 1986년, 서울대 인문대를 중심으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가 결성된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그룹에 대립해 "파쇼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며 CA그룹으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민족민주혁명(NDR)을 주장하였다.
80년대 중반 가장 급진적인 그룹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박종철 열사가 CA 그룹 소속이었으며, 지금은 작고한 가수 신해철이 대학 초반 서강대 CA계열 그룹에 가담하여 교련 반대 투쟁에 참가했었다는 증언도 있다. [1]
2. 제헌의회그룹 사건
1987년 2월 검찰은 제헌의회그룹이 레닌의 혁명이론을 바탕으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각종 시위선동 및 정치신문 제작 등 활동을 한 혐의로 이들을 기소하였고,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여 ‘제헌의회 그룹’을 반국가단체로 판결하였다. [2] 최민, 김성식, 민병두 등의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조직이 위축되었다.
3. 분화
지도부 검거 이후 이들은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으로 결집한다.[3] 1987년 12월 대선에서 CA는 독자출마한 민중후보 백기완[4][5] 을 지지하며 대규모 거리유세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백기완 후보는 자신이 제기한 민주연립정부[6] 제안이 무산되자, 양김후보 단일화를 촉구화면서 선거운동 도중 사퇴하였다. 반면에 NL은 정권교체 구호를 들고 제도권 정치인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통일에 유화적인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로 결집하면서 비록 대선은 패배했지만, 대학가에서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대선 이후 벌어진 논쟁속에서 CA그룹의 다수파는 대중운동속으로 산개할 것을 주장하며 88년말 조직을 해산한다. 이들 대다수는 NL의 대중노선을 따라 자주파에 흡수되는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NL주류와는 달리 남한의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주장하여 비주사NL(혹은 NL좌파) 노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대협 5기 김종식, 6기 태재준 의장(소위 관악자주파)이 이 흐름을 대표하며, 이후에는 PD 일부 그룹과 결합하여 21세기 진보학생연합으로 이어진다.[7]
NL에 합류하지 않은 CA 소수파는 기존의 NDR론을 계속 주장하며(그래서 '''ND'''라고 불리웠다.) 노학연대와 70말 학번의 좌파 노동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를 표방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결성' 을 목표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건설해 활동한다. 이들은 91년 사노맹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결속력이 약화 되었다. 이후 92년 대선의 백기완선거운동본부에서 활동하며 PD그룹과 섞이게 된다.
4. 이후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CA를 표방하는 그룹은 소멸되었고, CA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80년대 말부터 싹튼 PD그룹과 함께 범좌파로 분류되며 운동사회 주류인 NL과 경쟁하였다. 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에도 많이 진출하였다.
소멸 이후의 역사는 21세기(정파)(다수파), PD(정파)#s-3.4(소수파) 문서 참조.
[1] 신해철 유고집에도 나오는 내용이고,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신해철은 87학번이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을 신입생 때 겪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주요 학생운동 정파간 대립으로 투쟁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명 교문메가폰사건.(...)[2] 그러나 이에 대해 사건관련자와 그 가족들은 재판기록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3] 이때의 지도부 중의 한명이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이다.[4] 백기완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진보운동 역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존재로 197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어떤 특정 정파에 속한적도 없고, 백기완의 사상도 그 어떤 정파와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재야민주화운동그룹, 학생운동 세력 일부의 추대를 받아서 출마한 것이지 백기완이 CA그룹 소속이었던 것이 아니다.[5] 이당시 백기완 선본의 주력은 제헌의회 그룹과 인민노련이었다. [6] 김영삼-김대중-재야 3자연대.[7] 21세기는 CA는 물론이고 NL, PD 어떤것도 내세우지 않았고 정파 구분을 넘어서는 학생운동을 표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