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교

 



일정교 복원 조감도
1. 개요
2. 상세


1. 개요


日精橋
통일신라 시대 서라벌에 축조한 누교. 춘양교(春陽橋), 효불효교(孝不孝橋), 칠성교 등 이름으로도 불렸다. 세트로 지어진 월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 건너편 남산 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위치는 대략 현 국립경주박물관 방향이다. 지금 차가 다니는 월성교 교각의 남쪽. 현재는 나무로 된 다리는 사라지고 다리를 받치던 석조만 일부 남았다. 2004년 월정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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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의 모습과 유사한, 중국 보수교의 모습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19년(790) 월정교와 함께 건설되었다. 건설 당시의 이름은 '춘양교'였지만 월정교와 이름을 맞추려 했는지 일정교(日淨橋)로 개칭. 이후 언젠가부터 깨끗할 정(淨)자가 정할 정(精)자로 바뀌어 일정교(日精橋)가 되었는데, 이 이름이 조선시대와 현대까지 주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다리는 남아 800여 년을 버티다 16세기 초반 이전에 관리부족으로 무너졌다고 추정한다.
2017년 현재 월정교가 일종의 시범 케이스로 먼저 복원되는 중이라 그 유명세에 밀리지만, 고증 부족으로 학계에서 까이는 월정교와 달리 일정교는 부재가 훨씬 많이 남았으므로 좀더 충실히 고증할 수 있을 듯 하였으나.. 복원 조감도가 나온 이후 또다시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 55미터, 너비 13미터로 월정교와 비교해보면, 길이 63미터 너비 12미터인 월정교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다리 폭은 더 넓었다고 추정한다. 상판의 높이는 5미터. 물론 같은 시기에 세트로 지어진 만큼 교각이 하나 적고 규모가 약간 다르다는 점 외에 축조 방법, 석재의 재질, 색깔, 형태는 거의 똑같다.
2002년 2월 일정교 실측조사에서 일정교 동쪽 교대(橋臺)의 석축이 월성 방면으로 100 m 남짓 이어졌음을 확인했다. 연구소 심영섭 학예연구실장은 '이 정도 규모로 축대를 쌓은 것으로 보아 남천 동편에 궁궐 등 매우 중요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인터뷰했다. 그런데 2000년에 바로 일정교지 동쪽에서 남궁지인(南宮之印)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으므로, 비록 현존 문헌에는 관련기록이 없지만 현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에 '남궁'이라는 궁궐이 있었으리라 학계에선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