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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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정치인. 파키스탄의 의회 의원이자 현직 총리이다.
현재 정의 파키스탄 운동(PTI; Pakistan Tehreek-e-Insaf)의 당수를 지내고 있으며, 2018년 8월 18일 파키스탄의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였다.
1952년 10월 5일 라호르에서 태어났다.[8]
왕년에는 크리켓 국가대표로써 이른바 국민적인 영웅으로서 활약하였다. 1983년과 1992년에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1982년부터 파키스탄 크리켓팀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특히 1992년에는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차지함으로써[9]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다만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보기는 힘든데, 종목이 크리켓이라 월드컵으로 대표되는 축구, 동계올림픽으로 대표되는 피겨 스케이팅 등에는 상대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야 이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10]
크리켓 월드컵 우승 직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1994년 파키스탄 최초의 암 전문 병원을 라호르에 짓는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다가 1996년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사실 임란 칸은 인기 크리켓 선수라는 점 외에도 정치를 함에 있어 유리한 조건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일단 영국의 명문대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고, 젊은 시절의 그는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첫번째 부인 제미마 골드스미스는 유대계 부호 집안의 상속녀로, 칸과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사교계 유명인사였으며 다이애나 세자빈과도 가까운 친구였다. 다이애나빈이 이혼 후 만났던 애인 중 한 명이자 흔히 그녀의 마지막 진짜 사랑으로도 여겨지는 심장외과의 하스낫 칸은 임란 칸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둘 사이를 소개해 준 사람이 다름아닌 제미마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이 국가대표 크리켓 영웅이기까지 하니, 어떻게 보면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상당히 자연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96년 PTI를 창당했으며, 1997년 총선에 도전했지만 당시에 PTI는 그야말로 듣보잡 정당이었으며 총선에서 단 한 석도 못 건졌다. 당수인 본인부터가 낙선했다.
현재는 흑역사로 남아 있지만, 1999년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쿠데타를 지지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칸은 무샤라프를 "청렴하고 안전한 지도자"라며 지지를 보냈다.
2002년 국회의원으로 도전해 당선되었다. 이후로는 야권 인사로 활동하면서 무샤라프 독재정권에 항명했는데, 덕분에 정권의 탄압 대상 중 하나로 찍혔다. 급기야 2008년에는 총선 보이콧을 선언했다.
2013년 총선은 그의 인생의 한 가지 전환점이 되었는데, 비록 원내 3당에 그쳤지만 342석 중 35석을 얻으면서 정치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의석수는 적어도, 득표율은 인민당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이 당시 칸은 "무능부패한 기득권"이라고 비난을 받아온 기존 주류 세력의 대항마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졌지만 잘 싸웠다는 이미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2018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PTI는 높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으나, 그간의 여론조사에서는 무슬림 동맹이 우위를 보이면서 PTI의 승리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판에 양당의 격차가 급격하게 좁아지면서 판세가 바뀌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PTI가 앞서는 여론조사가 나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2018년 7월 25일 이루어진 선거 결과 최대 90석 정도를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110석을 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파키스탄 인민당,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그리고 파키스탄 군부가 돌아가면서 차지하던 파키스탄 정치의 순환 고리를 마침내 깨고 파키스탄의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2019년 2월에 양국간의 오해가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면서, 인도와의 갈등을 보이자 먼저 대화 제안을 하였다.#[11]
2019년 9월 3일에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1월 1일에 이슬라마바드에서 급진 이슬람주의 정당 지지자 수천 명이 경제난을 이유로 임란 칸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 시위를 벌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순교했다는 발언했다가 뭇매받고 실언했다고 해명했다 #
성범죄자에 대해 사형, 화학적 거세를 해야한다는 주장했다.#
1. 개요
파키스탄의 정치인. 파키스탄의 의회 의원이자 현직 총리이다.
현재 정의 파키스탄 운동(PTI; Pakistan Tehreek-e-Insaf)의 당수를 지내고 있으며, 2018년 8월 18일 파키스탄의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였다.
2. 생애
1952년 10월 5일 라호르에서 태어났다.[8]
왕년에는 크리켓 국가대표로써 이른바 국민적인 영웅으로서 활약하였다. 1983년과 1992년에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1982년부터 파키스탄 크리켓팀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특히 1992년에는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차지함으로써[9]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다만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보기는 힘든데, 종목이 크리켓이라 월드컵으로 대표되는 축구, 동계올림픽으로 대표되는 피겨 스케이팅 등에는 상대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야 이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10]
크리켓 월드컵 우승 직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1994년 파키스탄 최초의 암 전문 병원을 라호르에 짓는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다가 1996년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3. 정치 활동
사실 임란 칸은 인기 크리켓 선수라는 점 외에도 정치를 함에 있어 유리한 조건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일단 영국의 명문대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고, 젊은 시절의 그는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첫번째 부인 제미마 골드스미스는 유대계 부호 집안의 상속녀로, 칸과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사교계 유명인사였으며 다이애나 세자빈과도 가까운 친구였다. 다이애나빈이 이혼 후 만났던 애인 중 한 명이자 흔히 그녀의 마지막 진짜 사랑으로도 여겨지는 심장외과의 하스낫 칸은 임란 칸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둘 사이를 소개해 준 사람이 다름아닌 제미마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이 국가대표 크리켓 영웅이기까지 하니, 어떻게 보면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상당히 자연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96년 PTI를 창당했으며, 1997년 총선에 도전했지만 당시에 PTI는 그야말로 듣보잡 정당이었으며 총선에서 단 한 석도 못 건졌다. 당수인 본인부터가 낙선했다.
현재는 흑역사로 남아 있지만, 1999년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쿠데타를 지지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칸은 무샤라프를 "청렴하고 안전한 지도자"라며 지지를 보냈다.
2002년 국회의원으로 도전해 당선되었다. 이후로는 야권 인사로 활동하면서 무샤라프 독재정권에 항명했는데, 덕분에 정권의 탄압 대상 중 하나로 찍혔다. 급기야 2008년에는 총선 보이콧을 선언했다.
2013년 총선은 그의 인생의 한 가지 전환점이 되었는데, 비록 원내 3당에 그쳤지만 342석 중 35석을 얻으면서 정치적인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비록 의석수는 적어도, 득표율은 인민당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이 당시 칸은 "무능부패한 기득권"이라고 비난을 받아온 기존 주류 세력의 대항마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졌지만 잘 싸웠다는 이미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2018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PTI는 높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으나, 그간의 여론조사에서는 무슬림 동맹이 우위를 보이면서 PTI의 승리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판에 양당의 격차가 급격하게 좁아지면서 판세가 바뀌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PTI가 앞서는 여론조사가 나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2018년 7월 25일 이루어진 선거 결과 최대 90석 정도를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110석을 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파키스탄 인민당,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그리고 파키스탄 군부가 돌아가면서 차지하던 파키스탄 정치의 순환 고리를 마침내 깨고 파키스탄의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2019년 2월에 양국간의 오해가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면서, 인도와의 갈등을 보이자 먼저 대화 제안을 하였다.#[11]
2019년 9월 3일에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1월 1일에 이슬라마바드에서 급진 이슬람주의 정당 지지자 수천 명이 경제난을 이유로 임란 칸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 시위를 벌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순교했다는 발언했다가 뭇매받고 실언했다고 해명했다 #
성범죄자에 대해 사형, 화학적 거세를 해야한다는 주장했다.#
[1] 이름 끝의 Niazi는 부족명을 뜻한다. 파슈툰 지방에서 유래한 부족 중 하나[2] 공식적으로 밝힌 이혼 사유는 그녀가 정치인의 아내로 사는 삶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혼 과정도 순조로웠고 이혼 후에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칸이 재혼하기 전까지 전 남편의 성을 그대로 썼다. 조강지처인데다, 본이은 유대계 영국인이지만 우르두어도 배우고 파키스탄의 생활 양식을 많이 받아들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아직도 칸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퍼스트레이디처럼 여겨지고 있다.[3] 리함 칸과의 결혼은 불과 9개월만에 끝이 났는데 보수적인 파키스탄 사회에서 미니스커트나 딱 붙는 상의 등을 입고 방송을 하던 리함의 이미지가 워낙 안 좋아서 이 두 번째 결혼은 시작부터 삐걱였다. 그리고 칸은 리함과 이혼할 때 이슬람권의 악습인 '트리플 탈라크'를 사용해 이혼하는 바람에 진보파나 세속주의자, 서방으로부터 욕을 먹었다.[4] 여기서 트리플 탈라크(Triple Talaq)란 탈라크(뜻은 이혼)를 세번 말하면 아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이혼이 법적으로 허가되는 이슬람권의 악습으로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에 널리 악용된다. 그리고 이슬람권이 다 그렇다시피 남성만 사용할수 있고 여성은 해당사항이 없다. 칸은 아내에게 문자로 그냥 Talaq를 세번 쳐서 보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혼이 됐다.(...) 왜 이 사람이 이 때문에 욕을 무진장 얻어먹었는지 대충 알 수 있을것이다.[5] 임란 칸은 개인적으로 수피즘에 심취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부쉬라 비비로 널리 알려진 세 번째 부인은 펀자브 지방의 유력 가문의 딸로, 본래 성은 Wattoo이며 첫 번째 결혼으로 얻은 성이 Maneka이다. 둘은 수피즘 사원에서 만나서 알게 되었으며, 당시에 그녀는 첫번째 남편 카와르 마네카와 살고 있었지만 2017년 이혼했다. 이 때문에 불륜 루머가 잠시 돌았으나 전 남편이 단호하게 부정하여 일단락 되었다. 여담으로 그녀는 앞의 두 전처와는 달리 독실한 이슬람 교도인지라 히잡을 상시 쓸 것을 공식적으로 밝힌 최초의 파키스탄 총리 부인이 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탈레반 점령 구역이 아니라면 히잡은 쓰다 벗었다 해도 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이전 총리 부인들이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경우 히잡을 벗은 적도 매우 많다.[6] 장남, 차남. 모두 첫째 부인인 제미마 골드스미스의 자식이며 제미마가 양육권을 가져가서 현재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혼외관계로 가진 딸이 하나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본인은 부인하고 있다.[7] 펀자브 주 미안왈리 현 위치[8] 일각에서는 그의 생일이 11월 25일이며 10월 5일은 조작된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허위로 밝혀졌다.[9] 이 이후로 파키스탄은 아직까지 크리켓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10] 남아시아 및 영연방 권의 크리켓 인기를 감안했을때 우리나라로 치면 손흥민 급의 선수가 정치에 등장했다고 보면 된다.[11] 사실 파키스탄의 경제는 심각하게 허약한지라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인도가 먼저 핵을 쏴서 전세계에 고립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뒤지게 얻어터질 확률이 굉장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