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잘 싸웠다

 

[image]
'''지상파 방송국 별 졌잘싸 뉴스 모음.'''[1]
[2]
[3]
[4]
1. 개요
2. 상세
3. 사례
3.3. 선거
3.3.1. 대통령 선거
3.3.2. 국회의원 선거
3.3.3. 광역단체장 선거
3.4. 인기 투표
3.5.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3.6. 기타
3.7. 반대 사례 - 이겼지만 못 싸웠다
4. 관련 문서


1. 개요


결과적으로 패배했지만, 과정만 보면 명경기를 보여주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실력은 보장되어 있었으나, 초반부터 우승 후보를 만나는 악운에 걸려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이나 단체 등에게 위로용으로 주로 쓰이는 말.
2006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 패배 이후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세계적으로 상술한 대로의 의미가 주로 쓰이나, 인터넷 등지에서는 반대 의미로 비꼬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5][6]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대표팀 자체의 부실한 성적이나 관리 단체[7]의 관리 소홀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경기를 역설적으로 꼬아서 비판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전자의 경우는 '그래 평소의 그런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면 경기 중에 보여준 모습이라도 어디냐'라는 선수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관리만 제대로 받았으면 더 좋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선수가 전력으로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게 아쉽다.'라는 관리 단체에 대한 비판과 선수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승부를 떠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졌지만 희망을 보았다' 등이 있다.

2. 상세


주로 언론 등에서 축구야구 같은 인기 구기 종목이나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스포츠에서 경기를 앞두고 설레발을 떨다가 패배했을 때 나오는 정신승리. 기대치가 높았던만큼 패배가 불러오는 큰 상실감을 상쇄하기 위해 위로책으로 내놓는 문구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메이저 국제대회에서는 한 번쯤은 꼭 등장하는 단골이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 대회에서 조별예선 마지막 독일과 가진 경기에서 0대 3으로 뒤지다가 후반전 황선홍홍명보의 골로 2대 3까지 추격하면서 경기 내용을 압도했음에도 아쉽게 패배한 경우나,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16강전에서 0대 1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이청용의 동점골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고 우루과이가 한국 문전에도 못 올라오게까지 했지만 경기 종료 얼마를 앞두고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1대 2로 패한 경기가 꼽히며, 야구의 경우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일본전에서의 아쉬운 석패가 있다.
사실 아무리 잘 싸웠다고 해도 승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 않다. 상대방과의 객관적인 전력차가 일정 수준 이상 벌어졌음에도 1점차 내외의 패배나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선전했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예로 든 위의 축구 경기들은 독일과 우루과이 모두 한국보다 FIFA 랭킹이 월등히 앞선, 즉 객관적인 전력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분전하고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심지어 압도하는 국면도 있을 정도로 싸운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졌어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펼치다가 패배한 경우'''에는 이 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여기까지라면 마지막에 패배한 주인공처럼 감동적으로 끝낼 수 있겠으나...
문제는 언론들이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주요 경기에서 패배할 때마다 남용한다는 것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인만큼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나 아쉽게 패배했을 때나 쓸 수 있는 굉장히 제한적인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당연했던 패배나 심지어 별로 잘하지도 못한 경기에서도 남용하다 보니 말 자체를 정신승리 취급하는 경향도 많다.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잘 졌다'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남용되다보니 실제로 잘 싸웠으나 패배한 경기에서 사용할 때도 그저 그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왜곡의 중심에는 언론의 미숙함에 큰 책임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반대말로 영어에서는 Sore Loser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 패배에 승복하기보다 여러가지 변명이나 구실 등을 패인으로 내세우는 패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식 표현으로는 '찌질한 패배자'.
이 말의 대칭점으로, 이긴 뒤에도 논란이 있거나 실력이 형편없거나, 몇몇 선수들이 이탈하는 등의 위기가 찾아올 경우 "이겼지만 못 싸웠다"가 있다.
인터넷 상에서는 졌잘싸로 줄여서 부른다. 예) 시즌 ~호 졌잘싸
파생어로 잘 졌지만 싸웠다, 싸웠지만 잘 졌다, 잘 싸웠지만 졌다 등이 있으며,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깎아내리고 비아냥거리는 용도로 쓰인다. 이 경우 졌잘싸는 "'''졌'''으니까 짐 '''잘 싸'''라"는 비아냥의 약자가 되기도 한다.
2017년 10월 10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신태용호모로코와의 평가전에서 10분만에 2골을 헌납하고, 사실상 2군이 주로 출전한 모로코 대표팀을 상대로 실력도, 투지도 없는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수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모로코의 공격력에 허점을 노출하는 수비와 유기적이지 못한 공격 전술을 시종일관 비판하던 MBC 서형욱 해설위원은 경기 종료 이후 "'''졌지만 질 만했다'''"라는 말로 경기를 요약했다.
e-스포츠 쪽에서는 이 말의 용례가 살짝 다르다. LOL의 경우는 페넌트레이스 2:1 / 포스트시즌-롤드컵 풀세트 승리 상태에서 이긴 팀의 경기 내용이 그럭저럭하거나 서로 질질 끌다가 겨우 이겼을 경우 진 팀에게 졌잘싸라는 표현을 쓰며, 오버워치의 경우엔 오버워치 리그 대회 룰 상, 우세승 룰 (2:1 리드팀이 마지막 세트에서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을 경우) 혹은 타이브레이커 룰 (4세트까지 하고 나서 2:2의 경우) 에 걸릴 시 이긴팀이 받을 수 있는 승점이 줄어드는데 (우세승 시 승점 2점 , 타이브레이커 시 승점 1점) 진 팀이 비록 졌어도 경기 내용상 이 두 가지 룰중에 하나로 이긴 팀을 끌고 들어가 승점을 제대로 못 받게 했을 경우 진 팀에게 졌잘싸라는 표현을 쓴다.

3. 사례



3.1. 결국 졌지만 '진짜' 잘 싸운 스포츠 경기



마지막에 패배하긴 했으나, 강팀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거나, 이전보다 확실하게 나아진 모습을 보인 경우다. '''즉, 이런 경기는 정말로 잘 싸우고 패배한 것이라서 까임방지권을 받을 수도 있는 경우를 말한다.'''

3.2. 전쟁


전쟁에서 이런 말을 쓸 경우 패배가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싸워서 결국 패배할 지라도 다른 이들은 승리할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었던 경우라거나, 전략적 역량 차이로 결국 패배했지만 전투에선 전술적 승리를 거머쥐었거나, 전술적으론 패했지만 결국 전략적 역량을 온존하여 승리하였거나, 아니면 하도 시달려서 졌지만 잘 싸웠다고 상대했던 적군이 말해주는 경우도 있다.
  • 테르모필레 전투: 영화 300의 배경이 되는 전투로, 사실상 이 분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전투가 실제로 페르시아 전쟁에서 끼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평가받는다.
  • 황산벌 전투: 비록 패해서 백제가 멸망하였지만, 5000여명의 군대를 갖고, 이보다 몇배나 많은 신라군을 상대로 몇차례 승리를 거두고, 관창을 전사시키기까지 했다.

  • 고구려-당 전쟁 : 비록 패해서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1,2번째에선 당나라가 대패를 당했고, 3번째도 연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당나라에게 주고, 연정토가 신라와의 국경 지대를 다 바치는 와중에서도 무려 1년간 버텼다. 만약 고구려가 조금만 더 버텼으면, 토번의 성장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당나라가 먼저 멸망할 수도 있었다.
  • 겨울전쟁: 소련군을 통해 피로스의 승리가 뭔지 제대로 증명시키게 만든 전쟁이다. 종전 이후 결과를 볼 경우 서류상 승자는 소련이었으나 자세히 따져보면 소련은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소련의 참패같은 졸전이다. 병력이나 군수물자등에서 소련은 핀란드에 비해 군사는 두배 ~ 세배 군수물자는 많으면 수십배이상에 달하는 물량을 자랑하고 있었고 땅크기만 봐도 비교가 안되는 상태였다. 즉 산술적으로 보든 그 당시 상황으로 보든 핀란드는 소련의 탱크에 짓밟혀 사라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스탈린이 노린 것도 사실상 소련의 괴뢰국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정작 결과는 모두의 짐작과 정반대였다. 소련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기는 커녕 잠시나마 핀란드가 우세를 점할땐 역으로 침공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소련은 졸전의 연속이었고, 결국 물량빨로 어떻게든 밀어붙인 뒤에야 핀란드의 항복으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사망자나 소비한 물자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에 이룬 목표도 소련의 완전 점령이라는 초반 목적과 달리 소련 총 영토와 인구의 10%가량(핀란드 산업능력의 30%가량)만 겨우겨우 승자의 권리로 받아냈다. 결국 소련은 이후에도 멸망할 때까지 핀란드를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펼치는 등 여러 위협을 받다가 멸망했다. 결국 핀란드는 패전했지만 살아남아 지금까지 나라를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소련은 이기긴 했지만 이후 끝나지 않는 외세의 압박에 바스라져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으니 진정으로 살아 남는 자가 강하다는 걸 체감시켜준 셈.
  • 포에니 전쟁: 역시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특히 한니발을 생각해보면...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군사력을 거의 잃은 와중에도 로마의 맹공에 3년이나 버텼다.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결사 항쟁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 이릉흉노 공격: 흉노공격은 간단히 말하면 전한의 장수인 이릉이 흉노에게 먼저 덤볐다가 패전한것이긴 하지만 이런 평가를 받는건 후술할 이유가 있기 때문. 일단 그 당시 전한의 주력 병과는 보병이었고 흉노의 주력 병과는 기병이었다. 거기다가 전한측이 수성도 아니고 공격측이니 보병가지고 기병에 때려박는 경우 간단히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릉은 5천 명의 병사로 흉노의 기병위주의 8만 병사를 상대로 8번이나 버텨내면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는데 보병위주로 무려 흉노의 공세를 8번이나 버틴 것에 대해서 흉노의 선우도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기록이 남았을 정도. 결국 패전하긴 했지만 이릉은 이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도 했는데 항복한 그에게 흉노 선우가 자신의 딸과 우교왕의 작위를 주기까지 했다. 그 당시 황제였던 한무제는 점령해온다면서 패주했다는 이유만으로 길길이 날뛰며 이릉을 벌하려 했고 결국 이를 말리던 사마천만 내시가 되는 등 여러 억울한 사람이 피해를 입음으로서 한무제의 찌질함을 증명했다.
  • 금나라 : 징기스칸 등 몽골족과의 기나긴 악연으로 인해 아예 금나라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공격을 했던 몽골군 상대로 23년 정도로 제법 버텼다. 특히 완안진화상의 행적과 곽하마의 2년간의 최후의 항쟁은 여기의 백미다. 특히 위소왕이 남송 상대로 공격을 안했거나, 전략만 잘 짰다면 전쟁 기간이 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 남송 : 위의 금나라가 23년이라면, 남송은 무려 44년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호라즘 제국, 아바스 왕조,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 등을 정복해서 동유럽,서아시아를 평정하고 고려를 굴복시켰을 때도 남송을 멸망 못 시킨 것이다. 특히 몽골군 상대로 연이어 이겨서 영토를 회복한 맹공이나 양양(상양)에서 무려 6년간 버텼던 여문환, 그리고 최후의 불꽃을 보여준 문천상,장세걸 등의 행보는 몽골도 감탄할 정도였다.
  • 블라드 가시공 최후의 결전: 자신은 패배하고 전사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전 분투했다.
  • 번성 공방전관우: 이 전투에서 관우는 패하고 결국 목숨을 잃지만 여몽한테 뒷치기 + 유봉의 지원 부재 + 미방의 배신으로 내부&후방에서 갑작스럽게 무너지기 전까지는 조조군보다 훨씬 악조건으로 조조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관우의 최후의 불꽃.[8]
  •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 전투를 끝으로 2200년을 버텨온 제국은 문을 닫았지만, 이때 동로마는 8000명 정도의 압도적으로 열세인 병력만으로 최대 30만의 오스만 튀르크를 2달 가까이 막아냈다.[9] 또한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자신의 제국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3.3. 선거



3.3.1. 대통령 선거


  • 김대중: 7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독재정을 예견하였고 이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이번에 이기면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김대중은 "박정희가 이기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역감정이 만연한 상태에서 실시된 해당 선거에서 그는 95만여 표차로 패했으며, 결국 10월 유신으로 본격적인 독재정이 시작되었다. 훗날 김형욱은 이에 대해 "정상적인 선거라면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 그런데도 그 정도밖에 표차가 나지 않았으니 이 문단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 이회창: 15대 대선에서는 경선 탈락에 불복한 이인제의 출마와 그 유명한 DJP연합 때문에 김대중에게 패배. 16대 대선에서 그나마 만만한 이인제를 만나 패배를 설욕하나 싶었지만 그때까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노무현의 돌풍, 이른바 노풍 때문에 2.3%P차로 노무현의 로열로더(?) 달성을 허용했다. 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자신을 대선 후보로 선출하지 않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 이 때 무소속 대선 후보로서는 최고 득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회창이 한나라당을 떠난 후 이명박근혜가 대권을 잡았지만 강경보수층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당이 점점 수구화 되어 중도~중도보수층이 실망 하면서, 2016년 4월 20대 총선 패배를 시작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박근혜가 탄핵을 당한다. 결국 이명박박근혜 둘 다 임기 중 저지른 불법적인 행위로 인해 전두환노태우처럼 구속을 당하고 대한민국 주요 선거에서 4연패[10]를 당하며 보수 진영 전체가 궤멸 상태에 빠지면서 그나마 이명박근혜보다는 진보적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이미지가 좋았고 강경보수층을 잘 통제했었던 이회창이 당권을 잡았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기의 한나라당이 그나마 정상적이었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 제17대 대통령 선거
    • 정동영: 2007년은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한나라당이명박이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나온 정동영은 이명박에 크게 패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26.1%의 득표율을 얻었다.[11] 5년 뒤 민주통합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문재인은 48%의 득표율을 얻어 박근혜에 아쉽게 패배하였고 5년 뒤 다시 도전하여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 한나라당 경선의 박근혜: 당시 대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양강 구도였고 박근혜는 경선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었음에도 아깝게 패배하면서 이명박에 대선 후보를 양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는 다음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51.6%라는 역대 최다 득표율과 최다 득표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제18대 대통령 선거
    • 문재인: 표만큼은 정말 많이 받았다. 오죽하니 이 때 받은 표(14,692,632 표)가 되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받은 표(13,423,800 표)보다 더 많았고(1,268,832 표 격차)[12], 심지어 이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를 제외한 역대 어떤 대통령 당선자보다도 더 많은 표를 얻었을 정도. 게다가 이 때의 문재인은 정계에 정식으로 입문한지 1년차 정도밖에 되지 않아 한나라당 대표 시절부터 대권주자로 꼽혔던 박근혜와는 정치경력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사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가 사퇴하지 않고 끝까지 갔다면 이 정도의 표는 못 얻었겠지만 안철수의 사퇴로 보수와 진보의 양자대결이 되면서 진보성향 유권자들이 문재인 쪽으로 집결하면서 이렇게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인 박근혜 측에서도 전국의 모든 보수성향 유권자가 총집결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15,773,128 표를 달성함으로서 호남과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13] 그리고 박근혜역대 정치 최악의 게이트 사건을 만든다.결국 이 때 선전한 덕분에 민주당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인지도를 크게 올렸고 다음 선거인 19대 대선에서 당선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경상남도에선 36% 이상을 받아서 향후 대선에서의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보다 득표율이 더 높았음에도 간접 선거인 미국 대선의 특성 상 경합주에서 대부분 패배하면서 선거인단에서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래서 힐러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직접 선거인 한국이었으면 힐러리가 이겼다고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4년 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경합주 대부분을 가져가고 선거인단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당선되었고 트럼프는 조지 H. W. 부시 이후 28년 만의 재선 실패와 지난 대선보다 더 많은 득표수 및 득표율을 얻고도 재선에 실패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 홍준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한때 8% 지지율까지 떨어진 새누리당-자유한국당에서 출마해 사실상 군소 후보 수준으로 분류되었으나, 대선후보 당선 후 1달을 약간 넘기는 짧은 기간 동안 지지율을 꽤 많이 끌어올린 결과 24% 득표율을 얻어내며 안철수까지 제치며 2위까지 올랐다. 상황 자체가 절대 자유한국당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흩어져 버린 집토끼라도 끌어모는 전략이[14] 유효하며 괴멸 직전의 보수정당을 살려낸 것으로 평가받는다.[15] 참고로 역효과로 본인 자체는 막말, 색깔론 이미지가 강해지며 비호감 이미지가 늘긴 했지만 분명 당시 상황치고는 굉장히 선방한 셈이며 본인의 이미지를 희생했을지언정 전략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 심상정: 당초 목표로 두었던 10%의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해 선거 비용을 보전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계 대선 후보로서는 최고 득표 기록을 세웠다.[16] 그리고 단순 득표율만으로 심상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게 TV토론회에서 안철수에게 제대로 카운터를 먹여 그 직전까지만 해도 문재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평가되던 안철수의 지지율을 두동강냈다. 그러나 이후 정의당의 메갈리아 옹호 논란 등 여러 문제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지지율을 상당 부분 깎아먹었고 2020년 21대 총선에서는 정의당의 유일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남았다.
  •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에 패배하며 조지 H. W. 부시 이후 28년 만에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퇴임하게 되었지만 바이든에 압도적으로 밀렸던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전국적으로 7422만 표를 얻으며 4년 전보다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 또한 플로리다, 오하이오, 텍사스, 아이오와 등을 지켜내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에서도 48%를 득표하며 꽤 선전했다. 다만, 4년 전과 달리 경합주 대부분에서 패배했고 기존의 공화당 강세 지역이였던 조지아와 애리조나를 내준 건 뼈아팠으며, 대선 결과에 불복하여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퇴임을 앞두고 워싱턴 DC에서 지지자들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고 이를 트럼프 본인이 독려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3.3.2. 국회의원 선거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문학진: 선거에서 졌지만 잘 싸웠다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사례. 경기 광주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문학진 후보는 한나라당 박혁규 후보에 총선 역대 최소 표차인 3표 차로 밀려 낙선하였다. 재검표 결과 2표차까지 좁혀지면서 "문세표", "문두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재보궐 선거에서 또 한번 패한 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하남시 지역구에서 당선함으로써 국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 김중권 : 위의 문학진에 비해선 좀 격차가 크지만, 이 사람은 봉화군-울진군에서 단 19표 차이로 졌다. 이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부겸홍의락이 당선되기 전에 TK에서 가장 선전한 결과이기도 한다.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유시민: 경기 고양 덕양 갑에서 2선 국회의원을 했던 유시민은 무소속 신분으로 수성구 을에 출마했다. 상대는 지역구의 현역의원인 한나라당의 주호영이었고 유시민은 그 지역 출신이고 노무현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경력을 내세워 선전했으나 강한 지역주의로 인해 주호영 후보에게 크게 밀려 낙선하였다. 비록 보수표밭인 지역에서 크게 패배했으나 32%라는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었고 대구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김부겸이 훗날 대구 수성구 갑 지역구로 자리를 옮겨 당선돼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그 후 유시민은 2번의 선거(경기도지사, 국회의원 비례대표)에서 낙선한 뒤 작가 및 정치평론가의 길을 가게 된다.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통합당: 이명박 정부 말기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당시 야권에서는 MB정부 심판론을 내세우며 여소야대를 노리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여권이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재편하면서 지지층 결집 효과로 새누리당이 152석을 얻고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민주통합당은 4년전 참패했던 18대 총선의 81석에서 127석으로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수도권에서 과반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부울경에서 접전 끝에 패한 곳이 많은 것도 덤이다. 그리고 19대 총선 결과는 훗날 더불어민주당20대 총선에서 수도권 석권과 부울경에서 8석 차지[17]로 인해 원내 제1정당이 되고 21대 총선에서 압승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18]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송철호 : 울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시정을 잘했던 박맹우를 상대로 겨우 2% 차이로 졌다.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거나, 단일화만 되었다면 당선되었기에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2년 뒤 자유한국당 김기현을 상대로 12% 차이로 이김으로써 무려 26년만에 드디어 첫 당선뱃지를 달게 되었다.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 오세훈: 물론 광진구 을에 출마한 오세훈 후보가 대선 주자급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구은 분구 이후부터 이번 선거 이전까지 보수 진영이 이기기는 커녕 접전으로 지는 것조차도 해내지 못해서 서울 속에 광주라고 불리던 민주당의 텃밭인 지역이었다. 하지만 오 후보가 최초로 3[19]용산구분당 갑을 위시로 한 부촌 지역[21]과 노인들이 많아 보수세 가 강한 농어촌을 제외한 수도권에서 최소한 5% 이상의 큰 표차로 털리는 와중에 2% 차이로 졌다.[22] 총선 뒤에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전략위원장인 이근형씨도 이 지역구의 오 후보가 제일 어려워서 공천을 신중히 하고 민주당의 최대한의 역량을 동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강태웅 : 상대인 권영세영등포구 을에서 지역구를 막 옮겼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소속당 중진인 반면 본인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는 등 이전까지는 공무원으로 살다가 종합부동산세 때문에 민주당 험지로 분류되는 용산구[23]에 출마하면서 정계에 첫 발을 내딛은 정치신인의 신분으로 890표 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 김부겸: 비록 주호영 후보에게 20% 격차로 패하였지만, 40%라는 만만치 않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대경권에서 민주당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민주당 심판론이 일어났음을 감안하면 꽤 잘 싸운 것이다. 그래서 지역신문에서도 김부겸만큼은 환호를 받았다.
    • 나동연: 전직 양산시장 신분으로 양산시 을[24]에 출마하여 전직 경남도지사 김두관과 맞붙었는데 접점 끝에 1.7% 차이로 아쉽게 낙선하였다.
    • 이인선: 20대 총선에서는 수성구 을에 공천되었으나 경선 탈락에 불복해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한 현역 3선의원인 주호영 후보에 10.6% 차이로 밀려 낙선하였다. 21대 총선에서 주호영이 수성구 갑으로 전략공천되고 이인선이 수성구 을에 공천되면서 당선이 확실시되었으나 경선 탈락에 불복한 홍준표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수성구 을 출마를 선언하면서 홍준표 후보와 경쟁을 하게 되었다. 여론조사에서 접전 속에서 이인선 후보가 우세했으나 개표결과 2.7% 차이로 패배하였고 2연속 무소속 탈당 후보에게 낙선하면서 소속정당의 공천 파동으로 피해를 입은 셈이 되었다.
    • 부산광역시에 출마한 대다수 더불어민주당 후보들: 겉으로 보인 성적으론 비록 3명, 그것도 20대 총선 때 당선자 출신만 살아남았지만, 중진급 국회의원인 조경태하태경이 있는 두 지역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40% 이상을 얻었다.[25] 사실 부산엔 낙동강 벨트를 제외하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만 해도 인력풀과 조직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지방선거 압승 후에야 조직력을 다지기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상당수의 지역구에 신인을 내보냈고, 게다가 오거돈의 낮은 지지율과 경제 불황, 영남권의 보수결집 등 민주당에게 악재가 있는 가운데, 저 정도의 성적이 나온 것이다. 어찌하면 기초의회/광역의회의 중요성을 알려주기도 한 셈.[26]
    • 박성진 : 구의원과 시의원 경력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 보수성향이 제일 강한 남구에서[27], 전직 울산시장이자 시정에 대한 호평이 높았던 김기현을 상대로 40%를 얻으면서 선전하였다.

3.3.3. 광역단체장 선거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박주선: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3위로 밀려나 겨우 7.71% 득표로 선거 비용을 보전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서 민주당(2005년)의 지지율이 1%대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지지율에 비해 꽤나 선전했고,[28] 박주선 본인의 "3번 구속 3번 무죄의 오뚝이"라는 인지도를 쌓는데 성공하고, 18대 총선에서 광주광역시 동구(광주)로 지역구를 옮겨[29]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당시 2위로 낙선했던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는 서울시장 선거 패배+ 참여정부 말기 레임덕의 여파로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장나버렸다.
    • 정균환: 서울로 차출된 박주선과는 달리 선거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전북지사도 민주당이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도 전라북도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민주당 5석: 열린우리당 4석으로 이겼다. 한화갑 "아깝다 전북... 일주일만 일찍 시작했어도..."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김문수: 비록 52.8%를 득표한 박원순에게 크게 밀리긴 했지만 23.3%를 득표해 19.6%를 득표한 바른미래당 안철수를 누르고 2위를 기록했다. 위의 홍준표가 1년전 대선 당시 전국에서는 2위를 했지만 서울에서는 안철수에게 밀려 3위였음을 생각할때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 반대 등 명확한 보수색을 드러내고 재건축 공약으로 강남구 등 부촌 지역의 지지세를 결집시킨 것이 컸다.[30] 물론 경기도인천에서도 자유한국당이 똑같이 2위를 탈환하기는 했지만[31] 이 쪽은 상대가 전 대선후보였던 안철수였다는 점이 다르다. 김문수 개인의 입장에서도 대구 수성 갑에서의 참패를 만회하고 나름대로 명예를 회복하며 정치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의미 있는 선거였다.
    • 남경필: 지방선거 당시 판문점 선언의 영향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80% 가까이 나오고 더불어민주당이 크게 유리한 상황에서 맞붙는 상대가 일잘한다고 평가받고 대선후보로 유력한 성남시장 이재명이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35%의 득표율을 얻었다. 정치를 더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임에도 남경필은 경기도지사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 김태호: 자신의 고향인 거창군을 비롯한 서부경남의 투표함을 개표하는 초반에는 꽤 선전했다. 하지만 동부경남의 투표함이 개표될 때 김경수가 점차 따라잡더니 관외투표함이 개표될 때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리고 개표완료 후에 김태호 후보와 김경수 후보와의 표차는 9%. 그래도 선거유세 중에 과격한 발언을 하지 않고 최대한 네거티브는 쓰지 않고 정책으로 승부하여 좋은 인상을 남겼다. 낙선이 확정되었을 때도 웃으며 깨끗이 결과를 인정했다. 비록 자유한국당의 전통적인 우세 지역인 경남에서 민주당계 후보에게 최초로 패배하였지만, 최종 득표율 차도 9% 정도로 부울경권에선 가장 최소 격차였다. 타 지역에서 전혀 긴장감 없는 개표방송이 진행되는 와중에 유일하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펼쳐진 덕분에 졌잘싸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21대 총선에서 김태호는 고향인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에서 미래통합당 경선 탈락에 불복해 무소속 출마했는데 무소속이었음에도 현역 의원인 미래통합당 강석진 의원을 꺾고 당선되었다.
    • 김기현: 더불어민주당의 전성기였고, 측근비리로 인해 구속되었다는 악재가 있음에도 송철호 상대로 겨우 12% 차이로 졌다. 지방선거가 끝난 후 무혐의를 받아 울산에서 보수결집에 도움을 주었고 2년 후 21대 총선 남구 을에 출마해서 당선해서 8년만에 국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3.4. 인기 투표


  • 재능방송 난다 난다 니얀다 캐릭터 인기투표의 메롱: 니얀다라는 넘사벽(통상 득표 수 100표 이상)을 결국 이기지 못하지만 그래도 다른 10인의 후보보다는 월등히 높은 표를 얻었다(통상 10표~20표). 흥미롭게도, 실제 애니메이션에서도 메롱은 콩라인이다. 다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오히려 싸웠지만 잘 졌다 수준으로 시궁창스러운 행각을 보인다.
  • 애니플러스 캐릭터 토너먼트/2017년케모노 프렌즈: 애니플러스에서 첫 더빙작으로 선정되어 투표 참여조건이 되면서 투표에서 예선을 3명의 후보 모두 통과했다. 비록 본선 진출 이후 바로 전멸당했지만 당시의 국내 인기부재와 강캐들이 모인조 편성 감독 강판사건 등으로 작품 팬덤 자체가 분위기가 하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본선 진출에도 상당한 인기를 받으며 아름답게 퇴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5.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종선발되어도 무방할 정도의 역량을 보여줬지만 결국 간발의 차이로 탈락한 참가자다.
  • 버스커 버스커: 슈퍼스타K3에서 준우승한 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록밴드로 칭송을 받았다. 우승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 이시안: 아이돌학교에서 최종 라운드 진출 직전 평가에서 전체 1등까지 차지했으나 선곡을 잘못하는 등의 악재를 겪으며 선발되지 못했으며, 프로듀스 48에도 출연했지만 11회에서 탈락했다. 다만, 본인이 출연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논란에 휩싸이면서 어찌보면 후술할 프로듀스 일부 참가자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이보림: 본업은 모델. 무려 일반인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서 그 많은 전현직 걸그룹 멤버들을 제치고 파이널에 올라갔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의진의 큰 도움이 있긴 했으나 아이돌이나 솔로 가수, 연습생도 아니고 심지어는 예술고등학교 출신도 아닌 완전한 일반인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분명 기적이다. 물론 이주현, 이정하와 마찬가지로 방송 내내 취지에 맞지 않는 참가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후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서 영화의 주연으로 뽑히기까지 했다.
  • 전소미: SIXTEEN에서 마지막 회에서 떨어졌다. 비록 투표 카운트가 모자란 것도 있었지만 떨어진 멤버들 중에서 나띠와 함께 가장 메이저에 많이 들었으며, 가장 인기가 많았던 7명인 나정사미다채쯔를 유일하게 투표로 이겨본 출연자였다.[32] 비록 떨어졌지만 식스틴의 팬덤 및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듀스 101에 다시 도전에 우승을 함으로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 믹스나인 여자 팀: 남자 팀이 이겼지만, 결국 데뷔가 무산되어서 의문의 1승 확정.
  • 마스터셰프 코리아의 일부 출연자들: 애초에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지역 예선에서 추려서 100명을 뽑은 뒤, 100인 오디션 및 부트캠프를 통과하게 해서 최종적으로 단 14명만 방송에 출연시키므로, 어지간히도 논란을 만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본격적으로 미션에 참가하는 출연자 전원이 졌지만 잘 싸운 케이스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그 중 일부만 서술한다.
    • 박준우: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1에서는 아깝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덕분에 그의 수준급 요리 실력이 입소문을 타면서 현재 푸드 칼럼니스트로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 국가비: 이쪽도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3의 준우승자이지만, 우승자인 최광호보다도 요리사로서는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 I.B.I: 프로듀스 101에서 최종 선발에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 연습생들로 구성되었다.
  • JBJ: I.B.I의 남자 버전. 마찬가지로 프로듀스 101 시즌 2에서 간발의 차이로 워너원에 선발되지 못한 연습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 프로듀스 101 시리즈
    • 프로듀스 X101 - 이진혁: 프로듀스 X101에서 최종 멤버로 선발되지 못했지만[33], 그 뒤에는 여러 예능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데뷔조가 해체되었기에 의문의 1승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새로 영입된 신규 팬덤이 이진혁, 김우석의 업텐션 복귀를 반대하며 기존 팬덤과 갈등을 겪고 있다. 이건 이진혁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 프로듀스 101 시즌2 - 정세운: 최종화에서 마지막 2분할까지 간 끝에 하성운에게 패했지만, 이후 스타쉽에서 솔로로 데뷔해서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 프로듀스 48 - 한초원: 큐브 유일의 프로듀스 48 출전자. 첫 테이블인 소속사 평가 때 혹평을 받으며 하위권보다 더 심각한 광탈권인 80위권 후반대에서 시작했으나 공포의 외인구단 수준의 멤버로 참여한 팀 배틀인 헬바야를 통해 기적의 반전을 일으켰고, 2차 경연 때 뛰어난 보컬 실력을 인정받아 10만 표의 엄청난 베네핏 주인공으로 "반전갑"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에 순위가 급상승해서 데뷔권 가까이까지 갔으나, 막판에 대중성 및 분량을 많이 얻지 못해 최종회에서 마지막 2분할까지 간 끝에 12위와 8,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시즌2 정세운의 재림.[34] 그래도 큐브의 역대 프로듀스 시리즈 여자부 출전자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35][36]
  •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 호주임다미: 201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대회에서 초청국 호주 대표로 출전한 임다미라는 노래로 준결선은 물론 결선까지 오르며 전 유럽국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실 호주는 비유럽임에도 오래 전부터 주최 측에 참가 의사를 밝혀왔으며, 자국 방송사가 EBU 정회원은 될 수 없어도, 유럽계 이민자들도 많고, 30년 전부터 국내에서 꾸준히 중계해왔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작용해 2015년부터 출전을 허가했다.[37] 하지만 그럼에도 일부 팬들은 왜 유럽이 아닌 비유럽 국가가 나와서 출전하냐는 반발이 거셌다. 거기다 호주가 정식 참가 자격에 미달[38]함에도 전 대회처럼 초청 형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참가하는 형태로 이뤄져서 팬들의 반발도 있었다. 이러한 반대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전 대회에서 파이널 5위를 차지한 데 이어, 임다미를 앞세운 호주가 세미파이널2에서 1위로(!!!) 전 세미파이널을 통틀어 러시아에 이어 2위로 진출하는 성과를 내면서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보기 좋게 물먹였다. 그리고 대망의 파이널... 심사위원 점수에서 여유있게 1위를 꾸준히 유지하며 기세를 올렸고, 급기야 텔레보팅 점수 191점을 받아 기존 점수 320점을 보태 총 511점으로 가장 먼저 노르웨이의 기록을 깨뜨린 첫 번째 국가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39] 이제 이대로라면 우승은 호주의 몫이 될 터. 하지만.... 당시 '1944'라는 노래로 논란이 되었던 우크라이나[40]가 텔레보팅 점수에서 호주를 23점차로 누르고 역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호주의 사상 첫 유로비전 콘테스트 우승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2015년까지 진행되었던 표 합산 및 개표방식을 채택했다면 호주가 50점차로 우크라이나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을 법했지만 2016년부터 룰이 바뀌는 바람에[41] 애꿎은 호주만 피해를 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미파이널에서 2위로 진출했다는 점과 파이널에서 줄곧 1위를 유지하다 2위로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전 유럽 국가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가는데에 있어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다 유럽을 더욱 더 충격먹게 한 것은 비유럽 호주 대표로 출전한 사람이 호주 사람이 아닌 동양인(그것도 한국인)[42]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43] 대회 이후 임다미는 영국 BBC의 코멘터리를 담당하는 그레이엄 노튼이 호주의 참가를 디스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응 늦었어. 이미 와버렸음. 보니까 다들 내 노래 좋아함. 어쩌라고? ㅋㅋㅋ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당당함과 자신감을 잃지 않은 모습.

3.6. 기타


  • 냉장고를 부탁해김풍: 내로라하는 셰프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통에 승률이 높지는 않으나, 그가 만드는 요리들은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리는 등 뭇 셰프들과 비교해보아도 맛이나 기발함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특히 맹기용과의 대결은 맹기용이 왜 이겼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되는 대결이었는지라 조작 논란까지 나왔다. 물론 맹기용이 요리를 정말 못 만들긴 했지만.
  • 무모한 도전: MBC의 인기 프로그램 무한도전 1기 시절에는 사람이 동물이나 기계와 대결한다는 무모한 도전이 주제였다. 사실상 불가능한 도전이라 방송에서 대부분 패배했지만 대결을 할 때마다 시청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 전설의 3닌자: 만화 나루토에서 한조지라이야, 츠나데, 오로치마루를 이긴 뒤 졌지만 잘 싸웠다며 '전설의 3닌자'라는 호칭을 붙여줬다.
  • 나는 약이다: Revival의 혹시 중학생? (브베 팀): 경쟁 상대가 워낙 강해서 그렇지 예선 9위부터 시작해 최종 라운드까지 가는 분전을 선보였고, 그 최종 라운드에서 기어이 준우승으로 마무리하며 브베 패러디물의 몰락기이자 암흑기에서 거둔 준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3.7. 반대 사례 - 이겼지만 못 싸웠다




4. 관련 문서



[1] 사실 말하자면 앞의 두개 남아공 월드컵은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상대편도 월드컵 강대국이었기에 진짜 졌잘싸에 알맞는 경기인데, 브라질 월드컵은 '''졌못싸(졌고 못 싸웠다.)''', 이게 맞을 정도다. 물론 벨기에의 결승골은 명백한 오심이였던걸 감안해야 하지만...[2] KBS 뉴스 9 2010년 6월 27일 방송으로 전날(26일)에 있었던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에서 대한민국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1:2로 패했을 때의 방송.[3] SBS 모닝와이드/1, 2부 2010년 6월 18일 방송으로 전날(17일)에 있었던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조별예선대한민국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1:4로 패했을 때 방송.[4] 광주MBC 뉴스데스크 2014년 6월 27일 방송으로 전날(26일)에 있었던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대한민국벨기에와의 경기에서 0:1로 패했을 때의 방송.[5] '싸웠지만, 잘 졌다.' 같은 말로 주로 쓰인다.[6] 정말 눈뜨고 못봐줄 수준인 경우 '졌지만 잘 졌다.'라고 하기도 한다.[7] 대표적으로 빅토르 안을 어이없게 외국으로 배출시킨 대표격인 빙상연맹.[8] 관우는 번성 전투 이전에는 일신의 무력은 무시무시한 명성이 있었으나 사령관으로써의 공적은 미비했다. 물론 그 이전의 유비군이 본대와 별개로 부대를 나눌만큼 큰 세력이 아니였기도 했지만.[9] 일설이지만, 작은 성문만 안 열렸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점령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동시에 오스만이 스스로 무너지는 상황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10] 20대 총선을 시작으로 19대 대선, 7회차 지선, 그리고 21대 총선.[11] 그러나 이 때에도 3년 전 총선 때처럼 노년층 폄하를 부추기는 듯한 행동을 해 논란이 있었다.[12] 다만,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90%의 몰표를 선사한 호남 표심이 19대 대선에서 안철수가 3분의 1 가량 잠식시킨 걸 감안하면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득표율이 크게 하락하지는 않았다.[13] 특히 상대후보가 그 박정희의 자녀인 박근혜였기에 박정희의 경제발전에 향수가 짙은 보수층의 결집력 자체가 더더욱 강했다. 게다가 원래 원수지간이었고 지지율도 떨어진 이명박친이를 손절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박근혜와 친박의 집권을 보수정권 연장이 아닌 정권교체로 보이게 만들면서 중도층의 지지를 더 받았다. 참고로 13대 대선, 14대 대선 당시 김대중도 호남과 서울에서만 이기고 다른 지역에서 패하면서 낙선했다.[14] 실제로 대선기간 내내 보수층을 끌어모으고자 친북, 좌파, 전교조 등의 단어를 굉장히 많이 사용했다.[15] TK#s-1.1경남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16] 같은 처지의 유승민은 청년들에게 젊은 보수를 어필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바른정당 탈당 사태로 인해 정치적 입지는 오히려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후 국민의당 보수파와 합당해서 바른미래당이 만들어지면서 재기에 성공했다.[17] 사실 당시 새누리당에게 치명타는 오히려 부울경 등 텃밭으로 보던 곳에서 민주당에게 의석을 내준 것이다.[18] 부울경에선 10석에서 7석으로 줄었지만, 상당수 지역에서 40% 이상 얻는 데 성공하였다.[19] 다만 송파 병은 예외다.[20] 참고로 영등포 을, 성남 분당 을, 연수 을은 출구조사를 뒤집고 후보가 이겼다. 그리고 용인 병은 분구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계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심지어 연수 을은 민주당, 미래통합당, 정의당 후보가 출마해 2 1야로 미래통합당 후보가 유리한 상황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긴 것이다[21] 이 와중에 서울에선 목동이 있는 양천 갑, 여의도을 위시로 한 영등포 을, 명성교회가 있는 강동 갑, 경기도에서는 분당 갑보다 보수세가 강한 분당 을, 성복동을 위시로 한 용인 병, 인천에서는 송도국제도시를 끼고 있는 연수 을은 근소한 표차로 민주당한테 내줬다.[20][22] 참고로 거물들이 출마해 격전지로 언론에서 다룬 수도권 선거구는 대표적으로 서울에서 이 선거구와 종로, 동작 을, 경기도의 안양 동안 을이 있다. 미니 대선이라고 여겨졌던 종로는 18% 차이로 민주당이 압승했고, 현역 지역구 의원이면서 직전의 야당 원내대표가 출마한 동작 을은 정치 신인인 민주당 후보에게 7% 차이로 졌으며, 미래통합당현직 원내대표가 출마한 안양 동안 을에서는 20년 동안 그 지역구를 지켜온 것이 무색하게 여당의 대변인에게 14% 차이로 완패했다.[23] 20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하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영의 개인기일 뿐이었다.[24] 문재인 대통령의 사저가 있어 김해시와 더불어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25] 특히 현역이 김도읍인 북구 강서구 을과 현역이 이헌승인 부산진구 을[26] 실제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광역시(금정구 제외)에서 민주당이 기초의회에서 앞섰다.[27] 실제로 21대 총선 때 울산에서 보수진영(미래한국당+국민의당)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남구다.[28] 특히 주거 문제나 교육, 교통 문제에 대해서 꽤 괜찮은 공약을 많이 냈다.[29] 4대 지선에서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되었던 박광태의 권유가 있었다. 박주선 본인에게는 다행이게도 광주시장은 압도적으로 민주당(2005년)이 이겼다.[30] 참고로 국회의원 선거구로 대입하면 부촌으로 여겨지는 강남 병에선 심지어 김 후보가 승리했다.[31] 참고로 경기도지사와 인천시장은 자유한국당이 당시 현직이었다.[32] 조기 탈락한 모모나 심지어 에이스 지효도 한번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이다.[33] 단 실제로는 7위였다는 게 밝혀졌다.[34] 왜냐 하면 정세운과 한초원은 마지막 2분할 끝에 패해서 본인의 데뷔조 실패와 함께, 소속사의 프로듀스 시리즈 2연승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포지션이 보컬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오디션에서 이채연한테 졌다는 것도 같다.[35] 프로듀스 101에 출전한 래퍼 소연은 최종 20위로 마감했다. 권은빈큐브의 삽질 때문에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고, 한초원과 동갑내기인 이윤서는 2차에서 탈락한 후 소리소문없이 2017년에 큐브와 결별했다. 물론 소연은 추후 걸그룹으로 데뷔에 성공했다.[36] 물론 2020년 11월 18일 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실제로는 6위인데, 조작으로 13위로 떨어진 것이 밝혀진 것이다.[37] 다만 2015년은 파이널에 직행했지만, 2016년에는 모든 유럽 국가들처럼 세미파이널을 거쳤다.[38]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유럽방송연맹 정회원사만 참가할 수 있는데 호주는 준회원사로 원칙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39] 노르웨이의 리박은 2009년 대회에서 387점을 얻어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점수는 2016년에 깨질 때까지 사상 최고 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40] '1944'는 1944년 스탈린 치하 소련 시절에 벌어진 크림 타타르인 강제 이주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논란이 컸다.[41] 기존 방식에선 심사위원단이 Top 10을 뽑고, 텔레보팅으로 Top 10이 계산되어 둘을 1대1비율로 합산한 다음 1점부터 8점 그리고 10점, 12점을 주었다면 2016년부터는 둘이 별개로 점수가 매겨지는 룰로 바뀌었다.[42] 동양인이 유로비전에 출전한 경우는 역사상 최초라고 한다.[43] 마치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유로컵 대회에 초청국으로 출전, 결승까지 가서 준우승을 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