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
1514년(중종 9) ~ 1547년(명종 2)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2. 일생
임형수는 1514년 전라도 나주목 송현(현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송현마을)#에서 북병사를 지낸 아버지 임준(林畯)과 어머니 안동 권씨 현감 권석(權錫)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531년(중종 26) 18세 때,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4위로 급제하였으며#, 1535년(중종 30)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춘추관기사관(記事官)·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지내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는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그 후에 부제학까지 올랐지만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에게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파 윤임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 된 뒤에 사사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평범한 문신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일화를 많이 남긴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3. 일화
어느날, 임형수의 친구가 신선을 만나보고 싶다고 탄식했다. 그 후 그 친구는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신선을 만났고 신선이 주는 사슴고기와 술까지 마시고 돌아왔다며 임형수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임형수 왈 "그 신선은 나였네."
깜짝 놀란 친구가 그럼 사슴고기와 술은 뭐였냐고 묻자 다시 임형수 왈
"그건 육포와 내 오줌일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였다.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임형수가 제주 목사로 가던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났다. 배에 탄 사람중 승려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했고 그 밖에 사람들도 각자 신령에게 빌자 뻘줌했던 임형수는 갑자기
"이중탕! 이중탕!" 이라고 외쳤다.
배가 풍랑을 헤치고 겨우 제주도에 도착한 후 배에 탄 사람중 한 사람이 임형수에게 왜 이중탕을 외쳤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배가 아플때는 이중탕이 특효라서 말이지."[1]
임형수가 윤원형에게 미움을 사 마침내 사사 명령을 받고 금부도사가 그의 고향집에 도착해 사약이 든 약사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임형수는 "조정에서 스스로 죽으라고 하였으니 하필 거북한 약을 먹을 것도 없지 않는가. 차라리 목졸라 죽도록 허락해달라"라고 하여 금부도사가 허락했다.[2]
그러자 임형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구멍을 뚫고 나졸로 하여금 밖에서 잡아 당기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어서 나졸이 들어가보니 베개 하나가 벽에 붙어있고 임형수는 한쪽 구석에 편히 누워있다가 무릎을 치고 웃었다.[3] 물론 장난이었고 다음 번은 장난치지 않고 죽음을 맞았다.
사약을 먹기 전에 그는 전 어린 아들인 임구(林枸)를 보면서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하고는 "무과일 경우는 응시할 만하면 응시하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라는 말을 재차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생을 마감한 것도 있어 평생 글을 익히지 않다가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면서 무과에 급제해 충청도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글을 배우지 않았으니 관직 생활이 평탄할리가 없었다.[4]
어느 때는 감영에서 詩賦(시와 글)을 권장하라고 문서를 보냈는데, 주워들은 글솜씨로 賦(읆을 부)자를 賊(도적 적)자로 잘못 보고 도적이 나타났다면서 집결나팔을 불어 병졸들을 집결시키는 난리를 피우다가 수상함을 느낀 형방이 편지를 보고 이것은 도적 적 자가 아니라 구실 부 자라고 알려주어 해산나팔을 불어 병졸들을 해산시키는 소동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무과에 급제한 실력답게 양손으로 말 다리를 잡아 들어올려 편자를 박는 엄청난 용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때 이웃 현감이 이 때 방문해 여기는 현감이 말편자를 박는 일을 하냐고 묻자 그는 부끄러워서 말을 들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다.
1547년 9월 2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
위에 언급한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마치고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하였다. 또한 어떤 이가 집안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형수는 나는 마땅히 천지(天地)의 신기(神祗)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4. 그 외
- 임형수는 젊은 시절의 퇴계 이황과 친하게 지냈다. 샌님 스타일인 이황에 비해 선비답지 않게 대범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 어느날 임형수는 이황에게 남자의 멋지고 장한 일을 알려주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임형수를 모함하여 세상을 떠나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질 때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리자 말이 마구 날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친 뒤 얼마 못 가 숨을 거둔 소식을[5]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의마(義馬)라 부르며 통쾌해하고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
- 문무를 겸비했고, 특히 시문에 능해 조선 중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령 어우야담의 작가 유몽인은 자신의 저서에 임형수가 남긴 시를 몇 장에 걸쳐 할애하고 있으며, 모두까기 인형이였던 교산 허균도 극찬한 적이 있다.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에 이르니 칼과 창이 우는 구나.
- 앞서 언급했듯이, 슬하에 임구(林枸)[6] 라는 아들이 있었고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행정산현감을 지냈으나, 글을 모른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