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당
1. 개요
북한 각지에 존재하는 상품을 사고 파는 시장. 주성하 기자의 말에 따르면 현재 ‘장마당’이란 이름은 북한 사람들의 구전으로 통용되는 말로만 남아 있고 실제 평양을 포함한 모든 도, 시, 군에서 ‘시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운영되고 있다고 하나, 언론 등에서는 북한의 시장을 뜻하는 고유명사로서 장마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2018년 기준 북한에서 공식 인정한 장마당의 수는 436개이다. 물론 비합법적으로 운영하거나 비정기적으로 서는 장마당도 있을 것이므로, 실제 수는 이것보다 많을 것이다.
국영기업 대다수가 연료와 자재부족으로 유명무실화된 1990년대 이후로 북한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북한이 공식적으로 세금이 없는 나라이지만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이나 기업들을 대상으로 일정액의 임대료를 내게 만들기 때문에 북한 정부 재정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참고로 남한에서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 장마당의 운영시간은 지방정부에서 정하도록 되어있다. 보통 장마당 개장시간은 14시, 폐장은 18~19시 무렵이며, 추수철이 되면 노동력 동원을 이유로[1] 이용시간이 단축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이 때에는 노점이 판치기는 한다.(...)
동시에 북한내 부정부패 문제에 있어서도 빠질 수 없는 곳이기도 한데 영세상인에서부터 돈주들 혹은 말단관료에서부터 최고위급 인사들까지 장마당 부패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장마당에도 이런저런 통제가 가해질때가 있는데 이때 뇌물을 주고 단속을 피한다거나 하는 일은 예삿일도 아니며 돈이 많은 돈주들이 죄를 저지른다해도 살인이나 사기같은 수준의 중범죄가 아니라면 돈을 관료에게 주고 빠져나온다거나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또한 조선로동당도 돈만 있으면 우상화사업에 자금을 쾌척하는 식으로 입당이 쉬워지게 되었고, 적대계층이라고 해도 돈주라면 이전보다 평양에 주거하기 쉬워졌다.
고난의 행군이후 평양의 유명한 대학 교수조차 장마당을 이용하게 돼야 할정도로 역할이 커지자 반사작용으로 여성의 인권이 올라갔다. 북한에서 아무리 일이 없다고해도 직장에 의무적으로 근무하게끔 법이 정해져있기에 일하기 싫어도 일을 나가야된다. 그래도 이게 평상시라면은 전 국민들에게 돈이 돌게 되는 작용을 하지만[2] 1990년대를 거치면서 물가가 폭등한 데 반해 임금 수준은 매우 형편 없어지면서 기존의 월급만으로는 생활비는 커녕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어졌고[3] 그 대신에 노동의무에서 면제되는 결혼한 여자들이 장마당에서 벌어온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며 자연스럽게 여성의 발언권이 크게 높아졌다. 이는 곧 남편의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말도 되기 때문에 북한 내에서 이혼률이 급속도록 올라가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4]
장마당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주로 중국 위안이라고 한다. 북한 원도 당연히 통용되긴 하나 아래에 나오듯이 외화상점에서 잘 안받고 국제무역에서 별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의 경우에는 중국과의 교역량이 압도적인데다가 경제제재의 여파도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쓰이는 편이다. 그래도 아주 안 쓰이는것은 아니고 주로 부유층들이 많이 쓰기는 쓴다고.
2. 역사
장마당의 시초는 ‘농민시장’이다. 조선 농민들의 장인 3일장, 5일장 같은 재래시장인데, 북한에서도 정권 수립 초기부터 있었으나 1958년 8월 개인 상업을 폐지하고 국영유통과 협동상업의 형태로 통합하면서 농민시장을 폐쇄했다. 그러나 국영 및 협동상업만으로는 주민들이 필요를 모두 충족하지 못하자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1964년에 농민시장이 부활한다. 이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월 3회 10일장(1, 11, 21일) 형태로 장이 열려왔다.
농민시장이 부활한 이후 자본주의와 이기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1969년 김일성이 농민시장의 필요성을 다시 인정함으로써 해소되었다. 이때 북한은 ‘농민시장은 국가가 모든 소비품들을 생산해 공급할 수 있고 공산주의화가 완전히 실현되면 없어진다’고 보았다. #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늘 모자랐던 농축산물, 제한적이나마 중국제, 소련제 물품이나 공장에서 쓰고 남은 물건들이 거래되곤 했으며 이외에도 남한의 벼룩시장 마냥 간단한 잡동사니나 중고물품, 군것질거리 등이 거래되곤 했다. 1984년부터는 공장, 기업소에서 나오는 부산물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보급하는 ‘8.3 인민소비품’이 거래되면서 농민시장이 시·군별로 1~2개소씩 생기는 등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거래는 1980년대까지는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러있었고, 1984년 8.3 조치로 이전보다는 활성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시장이 북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식량과 기초생필품은 국가에서 제때 배급해주었던 시절이었던지라 장마당에서 주로 옷이나 고기, 신선 채소류같은 배급만으로는 뭔가 모자란 식료품이나 물품, 아니면 쓸모없어지거나 남는 것들을 팔아치우는 남한의 벼룩시장과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소련 붕괴로 인한 경제위기에 때마침 닥쳐온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으로 인해서 배급이 중단되고 급속한 물가상승까치 겹치며 최악의 식량난이 도래하였다. 거기에 산업생산의 마비와 급속한 물가상승으로 이전에는 싼 값에 얻을 수 있었던 물품들 상당수도 아예 구매가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다수의 주민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장에 가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과 식료품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지방 공기업과 군인들, 당원들 상당수도 사정이 쪼들리는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역시 장마당에서 자재들이나 물품들을 구하거나 물자를 가지고 팔던것은 마찬가지였고 이때부터 장마당이 북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커졌고, 고난의 행군이 끝난 이후로도 장려와 단속이 반복되는 등 부침은 있었지만 장마당이 북한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커져가는 추세가 되었다.
사실 김일성 시대에는 북한 정부는 장마당이 확대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나마 1980년대 이후로는 생산되다 남는 물품을 적당히 팔라는 식의 정책을 펼쳤지만 대대적인 확대 수준은 아니기는 했고, 단속도 엄히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김정일 시대 초기에는 배급제의 마비와 산업생산량의 급감으로 인해 장마당에 대한 정책이 확립되지 않아 방치하는 쪽에 좀 더 가까웠으며, 2002년 경제개선조치로 한동안 장마당에서의 경제활동을 장려했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나지 않고 2007년 이후로는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탄압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마당이 계속 잘만 돌아가기는 했다.
북한은 2009년 당시에 화폐개혁을 해서 장마당에 돌아다니는 자금을 대규모로 흡수하려다 되려 물류망이 마비되고 물가는 폭등해서 북한 원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는 큰 후유증을 겪은 이후 장마당에 대한 규제를 다시 풀어주는 쪽으로 선회했고,[5] 김정일 사망 이후에 정권을 잡은 김정은은 장마당을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실제로 장마당 돈주들[6] 에게 국가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내주면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김정은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면서 명예도 주는 방식으로 장마당을 활성화하고 있는 것. 덧붙여 여타 지방에서도 장마당을 크게 늘리는 한편, 경제특구도 17곳을 지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장마당 장려 정책은 어느 정도 실효가 있었는지, 북한에서 여가시설이 평양이든 지방이든 간에 크게 늘고있으며,[7] 북한은 미국 등으로부터 강력한 국제 제재를 받고있음에도 식량난 없이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 .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제재에도 소극적인 상황인데[9] , 그에 더해 북한의 장마당 활성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등의 국제 제재에도 그렇게 버텨내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되려 남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를 보면 2010년대에 하루 세끼를 제대로 먹고, 먹는것도 쌀밥 위주로 먹게 되었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등 일단 먹고는 살수있게 되었다는 통계가 나왔을 정도이다. 물론 RFP나 아시아프레스같은 매체를 보면 아직 굶는다는 사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예 끼니를 거를 정도로 형편이 나쁜 사람들의 수가 크게 줄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이고 이 점에 있어서 남한의 1970년대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고는 할수있다.
김정은의 장마당 규제 완화정책에 힘입어 장마당의 규모가 더욱 크게 확대되어가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풀리고 남북경협이 대규모로 시행될 경우에는 현금이 장마당으로 대량 유입될 수 있기 때문에 남한처럼 지방 곳곳에서도 대형마트 같은 것이 들어설 정도로 소득수준이 올라오기 이전까지 당분간 장마당의 규모는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게다가 취급하는 품종이나 업종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한다. 상품 판매에서 벗어나 차량이나 연료 대여, 그리고 배달, 운송과 같은 업종으로 넓혀가는 추세라고 한다.
그래서 장마당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다가 2009년 화폐개혁으로 돈주들의 재산이 크게 날라가고 물류망이 막히기까지 하면서 크나큰 쓴맛을 본적이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조차 장마당만큼은 규제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특히 2010년대 이후로는 북한 당국이 장마당에 간헐적인 단속을 할뿐 오히려 돈벌이를 위해서 장마당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장마당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의 최후의 보루이며 이것마저 규제하려 한다면 북한은 정말로 뒤집어진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당장 장마당이 생긴 이후부터 북한 당국이 규제하려는 조짐만 보여도 심하게 반발을 하는 상황이 목격된다고 한다. 실제로 한 탈북민의 목격담에 따르면 2014년경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던 한 할머니가 당국의 단속에 걸렸는데, 할머니가 보안원의 단속에 불응하고 자리를 계속 지켜서 보안원이 경고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보안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나라에서 쌀을 줬느냐, 배급도 안 주는 마당에 할머니가 자기 돈 벌어 먹고 살겠다는데 왜 단속을 하느냐, 할머니가 못 팔 물건을 파느냐"'''라고 할머니 편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단속하던 보안원이 쫓겨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것도 '''대낮에''' 벌어진 일이라고. 여하튼 북한 주민들이 장마당에서 부수입을 얻고, 경제난으로 배급도 거의 없는 상황인지라 1960년대식 자본주의적인 생활을 누린다고 할 수 있다.[10]
게다가 90년대 경제난을 거치면서 북한의 왠만한 기업들이나 군부, 당원들까지도 장마당에 물건을 거래하고, 상당수 공무원들조차도 장마당에서 거래하며 뇌물을 받아 연명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장마당은 말 그대로 없는 거 빼고 다 파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거기에 조선족들이나 재일동포들을 통해 중국산 영상물은 물론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정기적으로 유입되다 보니까 북한에서도 한류가 불게 되었다. 실제로 북한 내에서 일부 장마당 주인 가운데는 중국과의 밀수를 통해 대한민국의 상품을 반입, 비밀리에 판매하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더구나 대한민국 상품의 질이 좋고 뛰어나다는 점이 조심스럽게 퍼져나가면서 심지어 당 간부까지 대한민국산 가전제품이나 화장품, 그리고 의류, 심지어 생필품까지 은밀하게 구입하는 경우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당 간부 자녀의 혼인 시 예물 중 대한민국 상품은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인기 품목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없으면 파혼도 불사할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고위 당 간부 자녀들의 혼수품 가운데 한국산 화장품(짝퉁이 아닌 정품), 쿠쿠 압력밥솥, 여기에 보태서 한국산 한복 역시 필수로 포함된다. 당연히 보안부원들에게 들켰다간 큰일나기 때문에 대한민국산이라는 표지를 떼어내고 팔 정도라고. 북한에서 대한민국산을 "아랫동네것'이라고 부르면서 일부 간부집안 부녀들까지 찾아 몰래 사가는 일이 예삿일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된 적이 있는데 압수당한 쿠쿠밥솥이 한 간부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를 사용해 봤던 그 간부의 부인은 '이렇게 편리하고 좋은 물건을 왜 단속하느냐?'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고. 그런데 그 부인의 남편이 북한 내의 대한민국 상품을 단속, 적발해내 압수하는 보안부집 간부였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 해도 한국산 제품은 북한에서는 비싸기 때문에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다수는 중국산이 차지하고 있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 북한산 제품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면서 중국산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는 있지만, 북한의 산업 생산력이 아직까지 썩 우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분간 중국산이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3. 장마당 세대
1990년대 소련의 붕괴 이후 경제난이 심해져 상황이 급해진 북한 정부가 배급을 극도로 줄이자, 당에 의존하는 대신 장마당을 주 수입원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세대를 부르는 말이다. 이 시대의 탈북자들에게 당에서 배급받은 기억이 있냐고 물어보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2018년 기준으로 이미 북한 인구의 40%를 넘은 상황이며, 이 세대에 해당하는 북한 주민들은 이미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 못해 이제는 악만 남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밀수 혐의로 보위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주민이 밤에 밖에서 놀고 있던 보위부 지도원의 5살 난 아들을 보고 '''그 아이의 귀를 잘라버린''' 엽기적인 보복을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주민들이 자신들을 괴롭힌 당 간부나 지도원의 집에 방화를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는데, 이런 범행이 주로 어두컴컴한[11] 안밤에 일어나는데다 방범용 CCTV나 블랙박스와 같은 장비가 존재하지 않는 북한 사회 여건상 주민들이 모른다고 끝까지 잡아떼면 그만이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기도 쉽지 않아서 피해를 입은 간부나 지도원만 속앓이를 하는 형국이라고.
4. 관련 문서
[1] 농기계값과 연료비가 비싸다보니까 추수작업을 할때 대다수 농가에서 수작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2] 실제로 1990년대에 구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권 국가들이 공산권 체제가 붕괴된 이후로 잉여인력들이 구조조정을 이유로 대거 해고당하면서 실업률이 고공행진했고 설상가상으로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데다 복지 수준 또한 구조조정을 명목으로 대거 감축해버리는 바람에 범죄율 증가, 평균 수명과 인구가 감소하는 등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한 바 있다. 이러한 혼란은 2000년대에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인구구조 면에서 후유증이 매우 크다. 즉, 이런 일자리라도 내주는 것이 1990년대의 막장 자본주의 약육강식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얘기다.[3]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이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공식 급여가 암달라 시세로 1달러도 안되기 때문에 끼니 몇 번 때우면 바닥인 것은 여전해서 북한의 직장인 대부분은 월급이 아니라 성과급으로 먹고살며 성과급이 적으면 따로 부업을 하기도 한다. 참고로 성과급의 경우에는 공식 급여의 수배에서 최대 수십 배 넘게 주는 등 각 기업체의 크기나 경영 상태에 따라 차이가 매우 커서 안정적이라 말할 수 없다.[4] 북한에서는 합의이혼 제도가 없고 재판이혼 제도만 있기 때문에 고부갈등이나 성격차이 등의 이유로 이혼하기가 힘들고 가정폭력이나 배우자가 알고 보니 사상범이라는 식의 어지간히 심한 경우가 아닌 이상은 이혼이 힘들었고, 사회에서도 이혼한 여성을 좋게 보는 식은 아니었다. (남한도 1980년대까지는 비슷했다.)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그야말로 애들 용돈 수준에 그치면서 경제적 문제로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5] 이 때문인지 장마당에선 미국 달러와 중국 위안이 자주 쓰인다.[6] 장마당에게 돈을 거하게 번 사람을 뜻하는 말로, 북한 내에서는 당간부와 더불어 명품이나 가전제품을 거리낌없이 살 수 있을 수준의 구매력을 지닌 계층으로 손꼽힌다. 재벌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7] 그렇지만 도농격차가 커서 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북한 전체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한다.[8] 일단 외화벌이를 위해 거둬들인 물품이 장마당으로 풀려나와 일반 주민들도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9] 하지만 중국 역시 북한이 그동안 중국의 뒤통수를 쳐서 난처했던 것 때문에 나름대로 대북제재를 엄격히 하고 있다. 게다가 2019년 들어서는 중국도 자기네 일에 바빠진 터라...[10] 현재 북한 주민들 사이에 '당에 충성'이란 말이 나도는데 여기서 '당'은 북한의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이 장마당을 뜻한다. 여기에 장마당으로 생활이 나아진 주민들은 보안원을 상당히 경멸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배금주의가 만연해 돈이 최고라는 사상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른 결과로 뇌물이 정착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상적인 각종 경영기법, 투자기법이 시장경쟁 상황에서 북한에서도 자생적으로 발생해 자리잡게 되었다.[11] 다들 알다시피 북한은 9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항상 전력이 부족한 사회가 되버린 탓에 제일 전기가 필요한 대낮이나 초저녁에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 하는 마당이다. 하물며 사람들의 활동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야밤에 전기를 공급하는 행위는 사치나 다름없기 때문에 북한 대부분 지역의 밤은 암흑천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야간에는 사람들이 야외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감시자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물론, 몸을 숨기기가 훨씬 편해지기 때문에 범행 성공 확률이 크게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과거 일본의 풍습이었던 요바이가 결국 소멸한 이유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기로 인해 시골 지역에도 전력 공급이 넉넉해지면서 전구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전과는 달리 야간에도 사람들이 활동하는게 가능해진데다가 과거애는 사각지대로 여겨졌던 공간에도 불빛이 들어오자 요바이의 핵심인 은밀한 범행이 불가능에 가깝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도 경제 발전의 여파로 인하여 전력 생산이 크게 는 덕분에 남한 전 지역이 24시간 내내 전력 소모를 해도 걱정 없는 사회가 당연시되자 과거처럼 야간에 은밀하게 범행을 하는 건 불가능해졌으며, 설렁 시도한다고 해도 다수의 인공 불빛이 범행 시도자의 모습을 CCTV에 잘 드러내게 하는 덕분에 공권력이 범행 흔적을 빨리 추적해서 잡아내기가 쉬워진 것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