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티푸스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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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바로 메리 맬런. 일명 장티푸스(Typhoid) 메리.
'''Typhoid Mary'''
1869년 9월 23일 ~ 1938년 11월 11일
1. 개요
2. 생애
2.1. 발단
2.2. 발각
2.3. 1차 격리
2.4. 2차 격리와 사망
3. 평가
4. 여담
5. 미디어에서
6. 바깥 고리


1. 개요


본명은 메리 맬런(Mary Mallon). 최초로 확인된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로, 공식적으로 53가지 사례의 장티푸스 감염의 주범이었고 그 중 3인을 사망시켰다. 물론 비공식적인 피해자 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생애



2.1. 발단


1869년 맬런은 북아일랜드 쿡스타운에서 태어났고 15살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1] 맬런은 부유한 집안에서 고용하는 요리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총 8년간 맬런은 여러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게 된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경로는 다음과 같다.
  • 1900년, 뉴욕 마메로네크에 고용되었고 2주만에 주민들이 집단감염 되었다.
  • 1901년, 맨해튼에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하인들이 집단감염 되었고 세탁부가 사망했다.
  • 이후 한 변호사에게 고용되었고 가정에 있던 8명중 7명이 감염되었다.
  • 1904년 6월, 변호사 헨리 길시에게 고용되었고 일주일만에 하인 7명중 4명이 감염되었고 세탁부가 사망했다.[2]
  • 직후 턱시도 공원에 있는 조지 케슬러에게 고용되었고 2주 후 세탁부가 감염되었다.
이렇게 고용 → 장티푸스 전파 → 감염을 피해 다른 직장으로 옮김 → 집단감염...을 반복하면서 맬런은 수없이 직장을 옮기게 되고 수많은 감염자들을 낳았다. 유독 세탁부가 많이 감염된 것은 장티푸스가 수인성 전염병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2. 발각


1906년 8월 맬런은 갑부 은행가인 찰스 헨리 웨렌의 집에 고용되었다. 여기서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1명의 가족중 6명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었고 몇달 후 찰스의 외동딸이 사망하게 된다. 당시 많은 의사들이 의아해했는데, 보통 장티푸스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되는 질병이였고 그가 거주중인 오이스터 베이에서 장티푸스는 특이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여러 전문가가 동원되어 집에 있는 모든 수도가 조사되었지만 결과는 전부 음성이였다.
당시 조사관으로 고용되었던 조지 소퍼 박사는 처음에 가족이 먹은 음식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 집에 요리사가 새로 들어온 시기와 장티푸스 감염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부유한 가정에서 장티푸스가 감염된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공통적으로 40세의 아일랜드 출신 독신 여성 요리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퍼는 맬런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다. 그 결과 맬런은 10년간 8가정에서 요리사로 일했으며, 그동안 주변 사람 22명이 감염되고 1명이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소퍼는 맬런과 접촉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발병 이후 집을 떠난 이후였고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이후 맬런은 1906년 말, 파크 애비뉴에 거주중인 윌터 보웬에게 고용된다. 얼마 있지 않아 1907년 1월 23일 하인 2명이 감염되었고 딸이 사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소퍼는 맬런을 찾아가게 되고 그녀가 장티푸스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소퍼는 그녀에게 대변 샘플을 요청했지만 맬런은 거절했고 말싸움이 일어나 마지막에는 맬런이 포크를 들고 소퍼를 위협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소퍼는 다른 박사와 같이 맬런을 다시 찾아가 협력을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소퍼는 보건당국에 이 사실을 신고하게 되고 1907년 뉴욕시 보건당국은 맬런을 강제로 체포했다.[3]

2.3. 1차 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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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맬런은 윌라드 파커 병원으로 이송되어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대변에서는 장티푸스균이 발견되었고, 당국은 그녀에게 쓸개에 막대한 장티푸스균이 있음을 알리고 담낭절제술을 권유하였지만 맬런은 계속해서 거부했다고 한다.[4]
결국 맬런은 장티푸스에 감염되었으나 증세를 보이지 않는 보균자임이 확인되었고 뉴욕 노스브라더 아일랜드의 리버사이드 병원[5]에 격리수용 될 것을 선고받았다.[6] 맬런은 계속해서 자신이 건강한데 왜 격리되어 살아가야 하느냐며 항변했으며 희생자는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실은 기사는 뉴욕 타임스 1면에 실렸고, 많은 사람들이 뉴욕시 보건당국이 생사람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7] 대중은 무증상보균자란 개념을 몰랐다. 또한 조사결과 맬런이 요리할때 거의 손을 씻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당시에도 세균감염과 관련된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대중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못한 개념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맬런은 무증상 보균자가 강제격리된 첫 케이스였고 이때문에 인권과 관련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격리수용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격리를 풀고 장티푸스를 옮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고 있었다.
멜런은 여전히 자신이 보균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가 침해 당했다고 계속 믿고 있었다. 그녀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연방법원에 도움을 청했으며 1909년 보건당국을 고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뉴욕에 있는 몇몇 연구소에 샘플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그녀가 격리된지 2년 11개월이 지난 1910년 2월 19일, 맬런은 요리사 일을 하지 않고 1개월에 3번씩 보건당국에 근황을 보고하겠다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2.4. 2차 격리와 사망


맬런은 석방 이후 세탁부로 일했지만 봉급은 이전에 일하던 것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그러다 사고로 한쪽 팔을 다치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녀는 보건당국을 속이고 다시 요리사로 일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맬런은 여러 가짜 성을 사용하면서 요리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이상 부잣집에서는 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식당, 호텔 등등 여러 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직장에서 장티푸스의 발병이 일어났다. 소퍼는 그녀를 찾아다녔지만 워낙 자주 직장을 옮겼기 때문에 찾을수가 없었다.
그러다 1915년, 맬런은 브라운 부인이라는 가명을 쓰고 맨해튼의 슬로운 여성병원에 요리사로 취직했다. 그 결과 25명의 의사·간호사·직원이 장티푸스에 감염됐고 그 중 2명이 사망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같이 근무하던 하녀가 맬런에게 장난삼아 "혹시 당신이 '타이포이드 메리'가 아니냐?"라고 묻자 놀라 달아나버렸으며, 이를 수상히 여긴 하녀가 신고하였다. 소퍼는 직원들의 증언과 필적을 통해 맬런임을 확인하고 추적을 시작했다. 도망친 맬런은 롱아일랜드에서 친구에게 식료품을 받으러 갔다가 붙잡히게 된다.
맬런은 1915년 3월 27일 검역소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후 그녀에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당국은 그녀에게 1층짜리 별장을 제공했고, 1918년 고향에 당일치기 여행을 가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1925년 병리학자가 인턴십을 위해 잠시 노스 브라더스에 머물게 되었을 때 맬런에게 연구 보조직을 제공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 담낭절제술을 다시 권유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병원에서 지냈으며 1938년 11월 11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6년 전에는 뇌졸중에 걸려 몸의 절반이 마비되었으며 사인은 폐렴이었다. 사체는 화장되어 브롱크스에 있는 세인트 레이먼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맬런은 임종할 때까지도 자신이 보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맬런이 사망한 후 부검을 했는데 과연 쓸개에서 장티푸스 균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단 소퍼 박사는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회고록에서 부검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3. 평가


맬런에 대한 평가는 당연하지만 좋을리가 없다. 언론에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험한 여자" "전염병 여자" 등으로 불리며 그녀를 다룬 수많은 미디어에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세간의 이미지처럼 "이기적이고 고집쎈 악녀"만은 아니였다는 일부 옹호론도 존재한다. 맬런은 '보균자'라는 개념을 몰랐으며 왜 손을 씻어야 하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대중들 대부분의 인식이였다. 실제로 그녀가 평생 주장했던 내용도 "나는 이렇게 건강하고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왜 병균처럼 취급하는 거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갑자기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격리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구경거리 취급받는 상황에 쉽게 적응할수 없었을 것이라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당시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의사들의 취급에 대한 불만[8]과 전세계에 자신이 알려지고 주변인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야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무엇보다 맬런이 가명을 쓰고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 계속 요리사 일을 했던건 앞서 서술했듯 생활고가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 맬런은 자신의 집이 없었으며 격리에서 풀려난 후 보건당국에게 어떠한 보상을 약속받지도 못했다. 실제로 원래 요리사로 일하면서 평균 50달러 정도를 벌었으나 세탁부로 일했을때는 20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당시에 아일랜드 이민자 독신 여성이 기댈만한 복지 제도가 없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만약 20세기 초 당시 사람들이 감염되어 증세를 보이지 않는 무증상 보균자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면, 맬런이 가정부나 요리사 외에 다른 직종에 종사할 수 있었다면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전부 감염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전문가의 경고를 자의로 무시하며 '''자신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맬런의 행동은 무지만으로 변호할 수 없는 행동임에는 사실이다. 격리 이전이면 모를까 한번 풀려난 이후 맬런의 행동은 빼도박도 못하는 의도적인 잘못이다.[9] 당시 그녀가 감염시킨 인원의 정확한 숫자는 추정일뿐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4. 여담


  • 당연하겠지만 맬런은 '장티푸스 메리'라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약 윌리엄 박사[10] 본인이 모욕당하고 저널에 실리고 장티푸스 윌리엄 파크라고 불리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적기도 했다.
  • 소퍼 박사는 맬런의 사례에 대해 책을 썼고, 이후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로열티의 일부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맬런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 당시 보건당국의 감독을 받던 장티푸스 보균자는 2백 명이 넘었지만 메리 맬런처럼 평생 연금에 처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非 앵글로색슨에 대한 선입관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 맬런 이후에 발견된 장티푸스 무증상보균자로는 약 100명 감염 및 5명 사망을 발생시킨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 라벨라, 애디론댁 산맥의 가이드였으며 36명 감염 및 2명 사망을 발생시킨 일명 '장티푸스 존', 식당 주인이자 빵집 주인인 알폰스 코틸스가 있다.
  • 이 사람으로 인해 장티푸스 무증상 감염자의 위험성이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나 조리 업계에 종사하며 전염병을 퍼트린 사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식품 관련 직종이나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려면 무조건 보건증이 필요하게 되었다. 식당 조리파트 뿐만 아니라 홀서빙등의 보직도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퍼질 수 있는 위험한 병이기 때문에 보건증이 없으면 이런 업종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보건증 없이 근무하다 걸리면 해당 업소와 근무자는 법의 철퇴를 맞는다. 문제는 검사 방법. 기다란 면봉을 내 손으로 직접 항문에 쑤셔넣어 변을 채취해야한다. 직접 해보면 상당히 수치스럽고 자괴감이 든다. 이래저래 한국에서도 평가가 박한 사람인 것은 이 검사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5. 미디어에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아라키 히로히코가 그린 단편도 있다. 이 여자가 만든 음식을 아이가 몇 번이나 먹을 뻔하다가 온갖 사고 등으로 가까스로 저지되고 결국 감염되지 않고 끝나는 죠죠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어진 단편이다.
마블 코믹스데어데블: 하드코어 (DAREDEVIL: HARDCORE)라는 작품에서도 동명의 빌런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킹핀 수하의 이중인격자. 맷 머독 시절의 데어데블에게 호텔에서 낙상을 당했을 때 어떤 남자도 자신을 다칠 수 없게 하겠다는 생각에 새로운 인격이 생겼다고 한다. #
드라마 Outlander 시즌 3 10화에서 장티부스 메리가 모델로 보이는 보균자 조리보조원에 의해 전열함 한척이 무력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세기 중반의 외과의인 클레어 프레이저가 조리보조원의 격리를 주장하자 18세기 사람인 취사장이 말도 안된다며 반발하는건 덤.

6. 바깥 고리


영문위키 타이포이드 메리 문서

[1] 여담으로 모친이 임신 중에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보균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2] 이때 하인들이 각자 따로 살고있었는데도 집단감염이 일어났기 때문에 조사관은 원인을 찾으려 애썼으나 증거를 찾지 못하고 세탁부가 원인이였을 것이라는 애매한 결론만 내리게 된다.[3] 당시 그녀의 체포를 위해 다섯명의 경찰관이 동원되었는데, 이송되는 동안 계속 반항해서 나중에는 동행했던 조세핀 박사가 맬런 위에 앉아있었어야 했다고 한다(...).[4] 당시 담낭절제술은 수술 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5] 뉴욕시가 홍역이나 콜레라등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격리하는 곳이다.[6] 장티푸스 메리라는 별명은 이 병원에서 붙인 것이다.[7] 이때 수많은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8] 당시 왼쪽 눈꺼풀이 마비되었는데 6개월동안 그에 대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9] 일부에서는 맬런은 격리되기 전부터 이미 사실을 알고있었으나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10] 당시 뉴욕 보건부 세균학 연구소장. 맬런의 대변과 소변 샘플을 채취했으며, 이후 맬런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