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충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성씨'''
장(張)
''''''
헌충(獻忠)
'''생몰기간'''
1606년 ~ 1647년
'''재위기간'''
1644년 2월 9일 ~ 1646년 12월 20일
1. 개요
2. 생애
2.1. 대학살
2.2.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
3. 영향
4. 유물의 발굴
5.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민란 지도자이자 서조(西朝)의 유일한 황제로 이자성의 세력과 쌍벽을 이뤘다. 한자로는 張獻忠, 표준중국어 발음으로는 장셴중 (Zhang Xianzhong(한어병음), Chang Hsien-chung(웨이드-자일스 표기법)).
1606년 산시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국경의 병사가 되었고, 1630년에는 농민들을 끌어모아서 고향에서 반란군을 거병했다. 1633년 그는 중원을 노리면서 화북의 평양을 점령하는 등 선전했지만 결국 정규군에게 패배, 1640년에는 포위망을 피해서 사천으로 후퇴하고, 1644년 쓰촨(사천)을 근거지로 대서(大西)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지만 1646년 청의 군대에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2. 생애


청군이 이자성을 격파하고 근거지인 사천을 압박해오자 사천 지방에서 그야말로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살인극을 벌여 중국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살인마로 기록된다.[다만] 이때의 학살이 워낙 심하여 고대 촉나라의 후손들은 거의 멸종하고 지금 남아있는 사천인들은 촉나라의 후손이 아니고 뒤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1]
한국에서는 최근의 연구결과가 리그베다 위키를 통해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주로 장헌충에게 원한이 있는 명나라의 관료층이나 청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져 과장되었고, 청군이 학살한 일을 장헌충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주장이 퍼지기도 했다. 다만 장헌충을 섬겼으며 대서 정권의 붕괴까지 모두 목격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가브리엘 드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āes, 중국명 안문사安文思)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647년 5월 18일자 『사천 성과 그리스도 교회의 파괴와 손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 땅에서 루이스 브리오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가 연금의 신세가 된 것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2] 증거도 존재하므로 아직 장헌충이 누명을 썼다는 주장을 완전히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2.1. 대학살


장헌충을 섬겼으며 대서 정권의 붕괴까지 모두 목격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가브리엘 드 마갈량이스(Gabriel de Magalhāes, 중국명 안문사安文思)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647년 5월 18일자 『사천 성과 그리스도 교회의 파괴와 손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 땅에서 루이스 브리오와 가브리엘 데 마갈량이스가 연금의 신세가 된 것에 대한 보고서』가 존재하며 한국어 위키백과에 그 자료가 일부 번역되어있다.한국어 위키백과 번역
다음은 번역된 사료다.

폭군(장헌충)은 곧바로 그 크고 인구도 많은 도시(성도)를 원주민이 없는 무인지경의 고립 상태로 바꿔버렸다. 주변을 감싸고 돌던 강은 붉게 물들어 마치 물이 아니라 피 같았다. 게다가 시체로 가득 차서 바다까지 흘러들어, 아주 수량이 많은 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항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강에 인접한 도시와 마을은 이런 잔학함에 겁을 먹었고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

주목할 것은 이 폭군이 관리 및 이들에 관한 다양한 사항과, 생원 칭호에 관한 모든 사항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이다. 이 계모와 같은 사악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는 공적인 포고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대대적으로 과거를 열어 그의 궁궐과 왕국을 맡을 사람들을 뽑고 싶으니, 과거를 준비하는 자이거나 이미 관직을 맡고 있는 자이거나 관계없이 모든 거인(擧人)과 모든 생원은 수도의 궁정으로 와야 한다." 이 사람들은 이에 매혹되었고, 관리의 명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이 폭군이 지식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처형과 잔학한 행위를 알고 있었음에도, 모두 그에게 복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붓이 아닌 칼을, 먹이 아닌 그들의 피를 주었다. 그들에 대한 불신으로 그들을 '그릇된 사상의 소유자'라 불렀으며,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고 총 1만 3천 명을 참수하였다.

(...)

폭군은 자신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떠났고 어른도 아이도, 소년도 노인도 죽였다. 그는 도시와 거리와 마을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단 한 채도 남지 않았다.

(...)

1년 후 우리가 타타르인(청 왕조의 관리)과 함께 돌아왔을 때 사천 성의 여러 땅을 다녀보니, 그곳은 한때 사람이 거주하던 땅이 아니라 이미 야생 숲으로 변하여, 사람이라기보다는 호랑이나 다른 맹수의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였다.

한국어 위키백과 번역 [하지만]

이 외에도 장헌충이 사람을 죽이고 글을 지어 새겼다는 비석, 일명 '칠살비'에 대한 설화도 있는데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生萬物以養人(천 생 만 물 이 양 인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인 무 일 덕 이 보 천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殺殺殺殺殺殺殺(살 살 살 살 살 살 살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장헌충, 칠살비문(七殺碑文)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것만 더해도 140만(...)을 죽였다는 이야기다.

2.2. 학살에 대한 의문 제기


20세기에 청나라가 망하면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사천의 대학살은 장헌충의 짓이 아니고 청나라 군대가 한 일이며 이 학살이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청나라 조정이 모든 책임을 장헌충에게 돌렸을 뿐, 장헌충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고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야기 중국사를 쓴 역사 소설가 진순신 등의 인물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선 리그베다 위키를 위주로 이러한 반박이 퍼져나갔다.[3]
우선 역사서에 기록된 글들이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도 당시 실정과 맞지 않을 뿐더러(일부에서는 6억을 죽였다고 되어 있기도 하다)[4] 더군다나 농민 반란세력을 폄훼하기 위한 청 조정, 농민 반란군에 가족을 잃은 명나라의 학자, 관리들의 기록이라는 것, 그리고 주요한 악행묘사의 근거가 촉벽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근거가 빈약한 책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장헌충의 학살자 이미지에 반박하는 측에 따르면, 장헌충의 모토는 바로 '탐관은 죽일 뿐, 순민(順民)은 건드리지 않는다' 였다고 한다. 확실히 장헌충은 농민봉기 세력이였고, 농민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황족, 귀족, 호족 세력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중경, 상양, 성도를 함락하면서 양왕 주익명, 촉왕 주지주를 비롯한 황족들은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성도를 점령한 후에는 사천의 호족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백성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대서국을 세운 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고, 특히 3년 동안 군대가 쓸 전량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사천에 진입하고 죽은 년도를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장헌충은 파촉지방을 약탈하거나 징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사천을 근거로 힘을 키우기 위해 주력했고, 그 일환으로써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관청이나 지방호족들이 빼앗은 땅은 모두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장헌충이 죽자 사천의 주민들은 장헌충을 기리면서 장헌충의 소상을 세웠고, 청나라 조정이 이를 무너뜨리자 주민들은 계속해서 다시 세웠다고한다. 그 뿐만 아니라 파촉의 21개 주현이 스스로 장헌충에게 귀순했다고 하는데, 이는 장헌충의 기존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파촉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학살한 장헌충을 기릴 이유가 전혀 없을 뿐더러, 파촉 지역이 완전히 황폐화되어서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말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근대의 군대는 군기를 엄정히 잡고 백성들에게 갈 피해를 막으려고 들지 않으면 약탈이나 살인 등이 비일비재했고, 따라서 백성들이 군대가 오는 걸 극도로 꺼렸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장헌충이 민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장헌충의 군대가 백성들의 호감을 살 정도로 민폐를 적게 끼쳤고, 이는 장헌충이 군기를 엄정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장헌충은 인재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2년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를 계속해서 실시했고, 학당을 건립해 자주 시찰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주현의 책임자나 보좌진으로 썼다. 명나라 관리라 해도 탐관은 죽이되 순관이나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중용했다. 위의 민심을 사기 위한 행보들과 결합해서 보면, 장헌충은 진지하게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그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시사하는데, 이 또한 기존의 장헌충의 학살마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는다.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고자 하는 행동과 그 기반이 될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것은 모순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5]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장헌충이 죽자 그의 군대는 사천 주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청나라와 싸웠고, 청나라는 장헌충이 죽은지 13년이 지나서야 사천지역을 온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이는 역사책대로 장헌충이 거의 백만 가까운 군대를 죽였다거나, 사천 주민들을 도륙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대학살마의 무리를 따르면서 장헌충군보다 더 강하고 자신들에게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은 청나라군과 맞서 싸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헌충의 사인이 수도 중경이 아닌 곳에서 청군과 맞서다 전사한 것임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청나라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한 이전부터 농민봉기군으로써 명나라군에 맞서서 명군을 여러번 무찌르기도 했고, 사천으로 도망가서도 여러번 명군과 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가로이 옥좌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일 시간이 있었고, 당장 한 사람이 급한 판국에 사람들을, 그것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어줄 일반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재미삼아 죽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크다. 만약 장헌충이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학살을 일삼는 광인이였다면, 상식적으로 이런 난세에 제대로된 세력을 만들고, 근거지인 산서성에서 패배해서 쫓기면서도 사천지방이라는 큰 지방을 차지하고 나름 나라꼴을 갖추고,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과 쌍벽을 이루는 군벌로 성장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저항한 명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전적이 있는 청나라군에게 학살을 할 동기가 있었으면 있었지, 거사 초기 촉에서 관료층 등의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의 행적을 볼 때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유지하기를 원했고, 그렇기에 청군에 격렬하게 대항하다 전사한 장헌충에게는 사람들을 학살할 동기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헌충이 입촉한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장헌충은 대략 5-6년을 파촉에서 보냈는데, 청나라와 싸우면서 5-6년만에 파촉에서 그러한 대학살을 하는 것은 전근대의 기술력 등을 생각하면 무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쓰촨 고유의 문화나 언어는 아주 멀쩡하게 존재하고, 사천 지방은 지방색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 장헌충이 사람을 마구 죽여서 사천 문화가 없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칠살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실제로 사천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문제의 세번째 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한다.

天生萬物以養人(천 생 만 물 이 양 인 하늘은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는데

人無一德以報天(인 무 일 덕 이 보 천 사람은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 조금의 선행도 쌓지를 않는구나.

鬼神明明自思自量(귀 신 명 명 자 사 자 양 신령은 다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반성 좀 해라

참고자료 : http://blog.daum.net/shanghaicrab/10348044 #
하지만 당시 청나라 정권에 의해 진실이 전부 가려지고 사실이 조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엄연히 존재한다. 당시 청나라가 학살을 벌였던 양주(揚州)나 가정(嘉定)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 같은 책이 은밀히 나돌기도 했고, 이 책들은 청나라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어 상당히 지독했던 청나라의 문자의 옥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남아 있는데 비해서, 당시 사천의 대학살을 청군의 행위라고 적은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6]
또한 당시에는 반청 지식인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청에 대한 가짜 정보나 루머까지도 양산하던 시절인데, 사천의 생존자들로부터 실제 학살자가 청나라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마땅히 남아있을 청군이 사천인들을 학살했다는 기록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7]
또 장헌충 학살 관련 사료에서 과장된 부분(6억 학살 등)이 있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일지라도, 학살이 전부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설령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장헌충이 사천에서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염두에 두자.[8]
결국 장헌충이나 청나라 둘 모두가 사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학살, 기근, 타지역으로의 유출 등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학살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고, (인구의 대부분이 호구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해도) 명말청초 이후 사천의 인구가 대폭 감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이 문서를 읽은 개개인의 몫이다.

3. 영향


만력 6년(1578)

사천 인구 318만 2073명(26만 2694호)

-

《명회요(明會要)》

강희 24년(1685)

사천 인구 1만 8090명

-

《사천도지(四川道志)》

장헌충이 사천성에서 시행한 학살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명청교체기의 혼란에서 사천성이 입은 인적 피해는 막심했다. 난세가 이어진데다가 16년이나 청나라에 맞서 싸우고, 다시 청나라의 학살이 겹쳐서 당시 기록에는 이전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비옥한 사천 지방에서 수백 리를 가도 인적을 찾을 수 없고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며 사람살던 고을이 텅비어 개 짖는 소리나 닭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심한 경우 사천의 인구가 1~2% 밖에 남지 않았다는 추산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이렇게 인구가 줄었다기보다는 오랜 전쟁으로 호구에 잡히는 인구 수가 급감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사천의 사람들이 많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청나라는 황무지가 된 사천에 사천과 가까운 호북성이나 광동성, 북경의 백성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켰다.[9] 이를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고 한다. 이때 이주한 사람들은 역사상의 다른 강제 이주와 달리 상당히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장헌충 집단이나 청나라가 사람만 죽였을 뿐,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아서 집이나 가재도구, 조금 황폐해지긴 했지만 잘 정비된 농지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다른 강제 이주 같은 초기 고생이 굉장히 적었다고 한다. 그냥 그해 먹을 식량과 종자만 가져가서 주인이 죽고 없는 빈집에 들어가 남아있는 농기구로 공짜로 분배된 농지에 농사만 지으면 된다고 할 수준이었다고 한다.[10]
일설에는 이 무렵의 학살로 고대 사천인(파촉인)은 멸족했다는 주장까지 있다...만 장헌충이 사천에 머문 기간이나 사천문화가 지방색이 상당히 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쓰촨어 등의 존재를 고려하면 이는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천 지방에 화북의 문물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서 사천 지방의 문물이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4. 유물의 발굴


2016년 갑자기 강가에 금속제 유물이 발견되어 사천성에서 물길을 돌려서 발굴을 해본 결과 四川彭山“江口沉银遗址”에서 발굴되었다.

금제 동물의 왕의 옥새, 금으로 된 책, 귀걸이, 아주 짧은 기간 유통되었던 서국의 엽전 등이 출토되었다.

5. 둘러보기



'''대서의 역대 황제'''
건국

'''초대 장헌충'''

멸망

[다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1] 실제로 촉나라 사람들의 혈통이 단절됐는지는 모르지만, 장헌충의 학살로 인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은 탓에 사천성은 중앙정부가 있는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독자 언어가 아닌 표준어인 관화의 방언이 쓰이는 지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쓰촨어(사천어)는 여전히 남아있고, 중국 정부의 보통화 정책이 쓰촨어를 없에고 있다는 비판도 올라오고 있다.[2] 한국 위키피디아에서 번역자료가 첨부됐다.#[하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선교사는 연금되어 있었고 기행담이 으레 그렇듯이 과장이 섞여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하는 것을 염두에 두자.[3] 중국 사이트인 바이두백과 등에서도 장헌충이 학살자가 아니라고 기술해놓았다.[4] 이는 명말청초 중국의 인구를 고려할 때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청나라가 망할 때에 가서야 중국의 인구는 6억이 되었기 때문.[5] 아래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서국은 화폐를 발행하는 등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했고, 나라 꼴을 갖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사람들을 마구 죽여대는 상황에서 국가의 체계가 유지될리가 없다.[6] 다만 유물 출토 결과 청나라군이 쓴, 청군이 학살을 했다는 내용의 고시가 출토되는 등 청나라에 의한 학살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7] 다만 이 반청 지식인층들은 주로 명나라의 관료층이거나 호족과 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반란군이고 관료층이나 호족을 상당히 죽인 전적이 있는 장헌충을 좋게 봐줄 이유가 없다는 반박도 존재한다.[8]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헌충의 학살을 반박하는 측에서도 청나라가 자신의 학살을 장헌충에게 뒤집어씌우고 과장한 부분은 있지만 장헌충 역시 촉에서 학살을 저지르긴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9] 대신 북경에는 청나라의 팔기군과 그 자제가 입주하였다.[10] 다만 이는 위에서 장헌충이나 청나라가 사람을 마구 죽였고 그로 인해서 파촉인들이 거의 다 죽었다는 주장, 그리고 선교사가 남긴 “사천 지방은 숲만 무성했다”는 기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마구 죽었다면 당연히 농지를 돌보는 것도 불가능했을테고 오랫동안 방치된 농지는 농사를 짓기 어렵게 황폐화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