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능선 전투
1. 개요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10월 4일부터 11월 24일까지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중공군 45사단과 29사단에 대응해 강원도 김화군에서 치른 고지전.
참고로 해당 항목에선 삼각고지 전투도 병합해 다루는데, 이는 삼각고지가 저격능선과 인접한데다 이후 저격능선을 담당한 국군 2사단에게 인계되고 얼마 안가 상실하기 때문이다.
2. 전투 전 상황
1952년 10월 김화의 중공군은 아군 전초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했고, 평소에도 상대적으로 높은 능선에서 저지대의 아군 진지들을 감제하다 심심하면 포격 및 저격으로 아군들을 괴롭혔다. 특히 능선 좌측의 돌바위 진지에서 100여미터 가량 떨어진 538고지의 미군 진지를 수시로 저격해 사상자를 늘렸는데, 이로 인해 해당 능선이 저격 능선(Sniper ridge)으로 이름붙여졌다.#
한편 미8군사령관은 피해가 계속되자 아군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해 저격능선-오성산을 향한 소규모 선제공격을 계획하며 이를 쇼다운(Show down) 작전으로 명명한다. 이에 미7사단이 저격능선 서쪽 삼각고지[1] 를,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 우측 고지군을 맡았는데, 공세 및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17, 31, 32연대에 30, 37 연대를 증원시키고, 포병대대 16개로 공세를 준비한다.
한편 중공 15군은 오성산 일대에 3개 사단을 배치했고, 그 중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맡은 45사단은 400~538m 높이의 저격능선에 중대 하나를 배치한 뒤 유사시 증원을 시킬 수 있게 해놓았는데, "상감령(上甘嶺, 삼각고지-저격능선)을 잃게 되면 유엔군은 높은 지형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어 우리(중공군)는 평강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논리로 사수에 필사적이었다.
3.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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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2]
왼편 고지군이 삼각고지, 오른쪽 능선이 저격능선이다.
3.1. 10월 14일
오전 5시 국군 9개 포병대대가 공격준비사격을 한 뒤 국군 32연대 3대대가 돌격하였으나, 돈좌되었다. 이후 1시 40분에 국군 9개 포병대대에 미군 전폭기 6개 편대가 가세된 공격준비사격으로 중공군 진지들을 때려부순 뒤 3대대가 재차 돌격해 저격능선 점령에 성공한다.
이후 돌바위와 Y고지에 2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해 적의 역습에 대비했으며, 이들의 예상대로 중공군은 야간에 Y와 A고지를 향해 공세를 펼쳐 두 고지가 탈취되고, 3대대 전술지휘소까지 털렸다.
이 와중 예비대로 대기하던 국군 17연대 2대대가 돌바위 고지를 엄호했다.
한편 미 7사단 31연대도 오전 6시 2개 대대를 동원해 삼각고지를 공격했으나 적의 거센 저항 앞에 돈좌되고 만다.
3.2. 10월 15일
미군 전폭기의 폭격에 힘입어 오후 2시 30분 국군 17연대가 A고지를 재탈환했고, 이에 중공군은 야간 기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3.3. 10월 16일
새벽 중공 133연대 2개 대대가 후속 공격을 감행하나, 이조차도 돈좌되자 135연대는 Y고지를 거점으로 양 고지를 공격하여 우선 A고지를 탈취한다.
한편 삼각고지를 맡은 미 7사단도 남쪽 598고지를 점령 후 서북쪽의 파이크봉 일대에서 접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3.4. 10월 19일
이 무렵 미 7사단은 가까스로 탈취한 파이크봉을 다시 잃고 만다.
3.5. 10월 20일
오전 8시, 국군 32연대와 임무교대한 17연대가 1대대를 A고지를 향해 세차레 돌격시켰으나 모두 돈좌되었다. 하지만 11차례의 항공지원으로 진지들을 때려부수고 11시 A고지 점령에 성공한다. 하지만 중공군은 A고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쟁탈전이 이어진다.
3.6. 10월 23일
일몰 무렵, 삼각고지를 향해 중공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실시되었고, 오후 7시부터 삼각고지를 향한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삼각고지의 미군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편 미 7사단 32연대에 배속된 에티오피아 강뉴대대(통칭: 강뉴부대 1기)에도 중공군 2개 중대가 들이닥쳐 진지 일부가 피탈당했으나 대대장은 위치 사수 명령 후 진내사격을 불사했고, 오후 10시경 예비중대를 증원시켜 가까스로 격퇴했다.[3]
3.7. 10월 24일
새벽 3시 중공군의 피해와 피로가 아직 남아있는 틈을 타 미 7사단 32연대가 삼각고지를 재탈환했다.
3.8. 10월 25일
미국 언론이 '큰 의미도 없는 전투에 많은 미군이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삼각고지를 담당중인 미 7사단은 국군 2사단 31연대에게 진지와 물자들을 인계하고 물러나야 했다.
한편 국군 2사단 입장에선 미군 물자와 진지들을 인계받아 당장은 풍족하겠지만 어쨌거나 담당범위가 배로 넓어졌기에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3.9. 10월 29일
이 무렵 저격능선을 맡은 국군 32연대 3대대가 점령에 성공한 뒤 적의 탈환 시도를 돈좌시켰으나 이후에도 쟁탈전이 이어졌다.
한편 이 날 중공군 측에선 45사단과 29사단 간의 임무교대가 있었다.
3.10. 10월 30일
삼각고지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중공군 29사단의 대대적인 반격에 이곳을 인계받은 국군 31연대는 삼각고지를 상실하게 된다.
3.11. 10월 31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군 9사단 30연대가 국군 2사단에 배속된다.
3.12. 11월 1일
국군 30연대가 삼각고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병력 손실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3.13. 11월 5일
저격능선도 위태로운데, 삼각고지에서 계속 손실만 입자 미9군단장은 국군 2사단에게 삼각고지와 Y고지를 포기하고 저격 능선에만 집중하라고 명령한다.
3.14. 11월 24일
자정 무렵 중공군 2개 중대가 제압 포격 속에서 32연대 11중대가 지키는 A 고지로 올라오자, 수류탄들을 4박스(박스당 20개) 이상 아낌없이 밑으로 던져 격퇴했고, 오전 9시쯤 (백마고지 전투를 치루고 온) 국군 9사단 병력들이 진지들을 맞교대하러 올라오고 2사단은 백마고지로 향함으로 2사단의 분투는 일단락됐다.
그리고 중공군 역시 계속된 쟁탈전에 지쳐 이 이후로는 A와 돌바위 고지를 향한 공세를 하지 않음으로서 해당 전투는 막을 내렸지만 능선 하나를 두고 생겨난 사상자 수에 비해 당초 목적했던 고지의 절반만 점령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 고지들은 1953년 7월 13일을 전후해 전개된 중공군의 마지막 ‘7·13공세’(금성 전투)로 피탈당해 휴전선 북방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아 결과적으로 보면 피로스의 승리가 되었다.
4. 여담
- 해당 능선은 제15보병사단 담당 군사분계선 안에 있으며, 승리전망대에서 조망할 수 있다.
- 이 문서에 따르면 43일간의 전투 속에서 고지 주인이 33번이나 바뀌었으며, 능선의 중공군은 국군이 점령하면 ㄹ자로 파여진 방공 갱도(지하 만리장성) 속에 틀어박혀 입구를 막아놓거나 기관총을 배치해 놓고 증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오성산과 저격능선, 그리고 아군진지 사이에 금강산선이 놓여져 있었으나 전기선은 헌병들이 수거하고, 레일 일부는 토치카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 그리고 이 문서에 따르면 점령 과정에서 생포한 중공군으로부터 삼각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속에 100여 명이 있다는 증언을 듣고 장교 1명과 사병 9명으로 편성된 특공부대를 투입해 땅굴을 무너뜨려 전원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후 입구 보초가 피로에 졸 동안 분변 냄새가 날 거리까지 접근해 폭약을 설치해 매몰시켰다고 한다. 그 폭발의 여파로 인근의 지형이 약간 바뀌었다고 한다.
- 한편 중공군은 기존의 삼각고지와 Y고지를 재탈환한 상태로 휴전한 것 때문에 중국 측은 이를 미군의 오성산 공세를 방어하고 지금의 북한을 만든 자국의 승리라 자축하며 전과를 1만1000명 사상,[4] 2만5000명 살상으로 부풀렸다.[5] 그리고 1956년 프로파간다 영화 상감령을 제작했으며, 주제가 '나의 조국'은 2011년 미중 만찬에서 연주될 정도로[6]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다.
- 1961년 미국에서도 저격능선 영화가 만들어졌다.
[1] 참고로 삼각고지는 단일 고지가 아닌 남쪽의 598고지와 북서쪽의 파이크봉, 북동쪽의 제인 러셀봉으로 이루어진 역삼각형 고지군이다.[2] 오규열, ‘중공군의 상감령 전투에 대한 재평가’, <군사> 46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3] 이후 걍뉴대대는 물러서지 않고 위치를 사수한 공을 인정받아 미 9군단장과 미 7사단장으로부터 감사서한을 받았다.[4] 참고로 국군은 1만4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5] 참고로 국군 4800, 미군 3000여명 가량으로 합치면 많아야 8000여명 정도밖에 안된다.[6] 게다가 이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이 노래에 대해 아는게 없어 함께 박수쳤지만, 직후 이 노래를 아는 이들에 의해 이게 과연 양국 행사에서 연주될 만한 곡인지, 대통령 자질 등 각종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7] 다만 성공 기준이 저격 후 15분동안 움직임이 없는 것이고 공산권이 부풀리기를 잘 하다 보니 진위 논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