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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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1]에 있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
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6월 중공군의 대공세
4. 묻혀버린 승리
5. 7월 중공군의 공세와 국군의 반격
6. 결과
7. 대중문화


1. 개요


Battle of Kumsong.
6.25 전쟁 끝무렵인 1953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한국군UN군중공군을 상대로 금성 돌출부를 두고 벌인 전투. 휴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양측 합쳐서 4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동원된, 3년 1개월의 6.25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6.25 전쟁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2. 전투 전 상황


금성 돌출부는 1951년 10월 유엔군의 가을공세[2]의 일환으로 중부전선의 미군 제9군단[3]이 폴라-노메드선[4]으로 진격하면서 얻은 지역으로 이 돌출부는 금성 전투 이전까지는 철원 서쪽부터 시작되어 양구군 해안면 북쪽 고지대까지 이어지는 일직선 상의 전선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이었다.
당시 북한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미 9군단, 동쪽은 미 10군단이 맡았는데 미 10군단은 자신들에게 예속된 한국군 8사단을 (미 9군단 예속인) 6사단과 연계시켜, 지도상으로 현재 군사 분계선이 있는 북한강 물줄기가 ㄱ자로 꺾이는 지점의 동쪽 유역과 그 너머(어은산 남쪽)로 진출해 그곳을 맡게 했다.
이후 52년 봄에 유엔군의 전선 조정으로 재창설된 한국군 2군단은 미 9군단이 담당하던 금성 돌출부 서쪽과 이를 지키는 국군 사단 등을 인수받고, 미 9군단은 미 1군단의 전선 동쪽인 철원 서쪽 - 김화 사이의 지역을 맡게 된다.
그런데 1953년 3월, 그간 휴전에 반대하여 전황을 지지부진 끌어오던 원인 중 하나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전쟁에 염증을 느낀 양측 수뇌부들은 휴전 협정을 추진, 1953년 4월 즈음엔 양측 모두 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정도가 된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단독 북진을 외칠 정도로 이에 반대했고, 중국 역시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 공세를 펼쳐 이를 승리해 대내외에 과시하려고 했다.

3. 6월 중공군의 대공세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춘계 공세 이래 6개 사단과 예비대인 4개 사단,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 및 보급을 위한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의 최대 규모로 금성 돌출부에 공세를 펼치면서 전쟁 중 으레 그랬듯 미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렸고, 이에 한국군도 금성 돌출부에 증원군을 대규모로 투입하게 된다. 병력의 자질을 따지지 않더라도 한국군의 화력 자체가 미군의 30%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공세라도 막지 못하는 일이 일반적이기도 했다.
당시 금성돌출부 좌견부에는 미 제9군단 중앙우익인 9사단 1개 연대, 군단 우익 수도사단, 돌출부 선단과 우견부에는 국군 제2군단의 6사단, 8사단, 5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미 제8군 예비대로 3사단이 돌출부 어디든 3시간 내 도착할 수 있도록 2군단 지역 내에서 대기중이었다. 사단의 편제 지원부대 외에는 2군단의 1개 전차대대, 야전공병단, 군단포병 2개 155mm 포병대대, 미 제5포병단이 있었으며, 미 제9군단의 국군 사단들은 9군단포병 10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물론 한국군도 이에 맞서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전사 및 실종되었는데, 신병들을 무제한 보충하여 더 이상의 퇴각은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참전했던 할아버지의 증언으로는 총 몇번 쏘는 4주 훈련 뒤 곧바로 전선으로 보내버려서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인원 부족으로 교대 없이 연이어 싸우느라 총을 쏘면서도 졸 정도로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고.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함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일부를 점령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다. 이 공세로 한국군과 중국군 양측 모두 3만 명씩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4. 묻혀버린 승리


비록 전선을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으나 영토 확장이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중국은 이를 토대로 연일 북진을 외치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세를 꺾고 전쟁에서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려 했다. 실제 당시 북한 주둔 중공군 부사령관이었던 홍학지의 회고록 역시 이 공세 덕분에 유엔군 측은 회담에서 다소 양보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만족한 중공군도 이 상태로 휴전을 맞이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18일에 터진 핵폭탄 같은 사건에 중국측은 분개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 대통령반공포로 석방 사건.
자신들이 힘들여 쟁취한 승리 소식을 더 큰 사건으로 덮으려는데다 자국의 포로가 주적인 대만으로 가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던 중국은 큰 충격과 분노를 느꼈고, 동시에 휴전 직전 한국군에게 최종적인 패배를 안기고 중동부 전선 전역을 다시 빼앗아 전쟁 이후의 대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한국을 휴전에 응하게 만들려고 한국군 1만 5천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7월 중국은 금성 돌출부 일대에 지난 6월 초의 공세 규모를 뛰어넘는, 1951년의 춘계 공세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세를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5. 7월 중공군의 공세와 국군의 반격


1953년 7월 휴전 직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려는 중공군 5개 군(약 24만명)이 금성 돌출부 인근에 재집결하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한국군은 이에 대응해 6개 사단이 연계된 방어 준비를 하게 된다. 이 때 각 부대 사단장들은 도미 유학 등의 관계로 교체중인 시기였는데, 급히 이들을 전장으로 복귀시킨 탓에 사단 하나에 사단장이 2~3명씩 존재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7월 13일부터 중공군은 한국군이 담당하는 전선에 대규모 집중 공세를 퍼부었다. 특히 미 제9군단 통제하의 수도사단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 14일 새벽 2시 아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침투한 중공군 203사단 609연대 2대대가 수도사단 1연대 연대지휘소를 급습하여 지휘통제가 마비되었으며[5], 26연대 방어선도 곳곳이 뚫리고 있었다. 수도사단은 사단 예비 기갑연대에서 1개 대대씩을 투입하여 돌파구를 봉쇄하고 전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중공군 주공 방향 오인과 역습계획의 잦은 변경으로 역습부대 출동이 늦어지는 사이 적 609연대 2대대가 이번에는 기갑연대를 기습해 연대장이 전사하고 역습계획 조정을 위해 동행한 부사단장도 포로로 잡히면서 극도로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그 외의 다른 사단 구역에서도 여기저기 구멍이 생기자 2군단이 포위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해 국군은 14일부터 15일까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6] 적근산[7] 부근까지 후퇴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백암산 일대에서 5, 8사단, 6사단 7연대가 금성 전투의 향방을 가를 핵심 전투, 백암산 전투를 치른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으로 하여금 백암산 남쪽 고지군에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파로호까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공군을 저지시켰다. 게다가 장마철 홍수를 기점으로 보급이 어려워진 중공군과 달리 한국군은 여전히 미군의 보급물자와 증원군들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반격을 개시했다.
폭우가 한창인 7월 16일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이 예속)은 김종묵 소대장의 특공대를 포함한 각종 반격작전을 전개,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해 미 8군의 공격 목표인 아이슬랜드 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 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다. 이유는 이 이상 돌파할 경우 중공군도 추가 증원군이나 대규모 공세로 반격해올 것이 뻔했고, UN측 역시 하루빨리 휴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날인 20~22일간 금성천 및 화천발전소를 두고 벌어진 425고지-406고지 전투 및 24~26일간 임진강변에서 벌어진 사미천 전투[8]를 마지막으로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채결되었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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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의 붉은 지역이 금성 돌출부 피탈지대로, 서쪽 서해 5도는 현재 우리 영토이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저격능선 전투,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로 지켜낸 곳들을 내주며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1주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전사자 2,700명, 부상자 7,500명, 실종자 4,100명을 포함한 14,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실종자 중 최소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미귀환 포로로 추정된다. 후술할 한국군 포로 2,800명을 감안하면 한국군 전사자는 4,000명까지 증가할 수도 있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 305명을 냈다.
중공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제시되고 있다. 한국측에 의하면 중공군은 27,000명의 전사자와 39,000명의 부상자. 도합 6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군에게 붙잡힌 포로는 공식적으로 186명이다. 미 8군은 중공군에게 최소 28,000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고 추측했다. 중국측은 중공군의 사상자는 9,187명 전사, 12,391명 부상이고 한국군과 미군이 포로 2,800명을 포함 47,6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으나, 포로에 대한 기록을 제외하면 사상자 자체는 공산권에 만연한 통계조작으로 보건대 한국 측 발표를 사실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9]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 것은 양측 모두 한국군 18만 명, 중국군 24만 명 등 많은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며, 또한 한국군이 중국군에 비해 자질과 장비 면에서 그다지 월등한 점이 없었기에 향후 한국군의 자질을 강화하고 무기 및 장비를 새로 지급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외 한국군의 사상자가 엄청났던 이유 중 하나로 장병들의 숙련도 부족을 꼽을 수 있는데, 개전 이후 거의 대부분의 기간 10~20만에 불과했고 중동부 전선만 맡던 한국군이 미국의 한국 철수 과정에서 한국이 신규 사단을 창설하면 미군이 담당하던 전선을 넘겨주는 형태로 1952년 말부터 급팽창하여 1953년 7월 기준 거의 전 전선을 담당하는 58만 명으로 불어났고, 그들 대다수가 당연히 신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공군이 '''대략 40km에 달하는 금성 전역을 평균 4km까지 남하해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고''' 수천 명의 미귀환 국군 포로를 추가로 야기했다.[10]

7. 대중문화


  • 2009년 영화 고지전의 애록 고지가 금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11] 다만 당시 있었던 여러 고지전들을 섞어 연출했기에 유의.
  • 2020년 개봉한 중국영화 금강천은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1] 정확히는 철원군과 화천군 사이에 있는 말고개 대전차방호벽에서 화천군 쪽으로 계속 주행하다 보면 볼 수 있으며, 제3보병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2] 유엔군이 6.25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실행한 공세로 휴전회담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공산 진영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모든 전선에서 대략 10km씩 북상하였다. 이 공세를 끝으로 쌍방은 완전히 진지전(요충지를 요새화하고 싸우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3] 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한국군 2사단(군단 좌익/김화 동쪽지역과 돌출부 서쪽), 미 24사단(군단 중앙,돌출부 중앙으로 폴라선까지 진격함, 후일 미 40사단과 교대됨), 한국군 6사단(군단 우익/교암산~북한강 서쪽 지역)[4] 노메드 선은 북한강과 금성천이 연결되는 지점을 중심으로, 폴라선은 더 위쪽으로 금성 남쪽 2km 까지 설정한 전선이다.[5] 이 전투는 중국의 현대경극 기습백호단(奇袭白虎团)의 모티브가 되었다.[6] 현재 제7보병사단 5연대 담당.[7]제15보병사단 38연대 담당지역이다.[8] 후크 고지 전투라고도 불리우며, 미 해병대와 호주군이 중공군 1개 사단을 격퇴한 전투다. 단 대규모 공세가 없었다 뿐이지 소규모 공방전은 전쟁이 끝나는 그 날 오전 10시까지 계속됐으며, 상호 포격전으로 인한 한국군과 UN군 전사자는 밤 10시 직전까지 나왔다.[9] 사실 이런 식의 전투는 적군을 한 번 사살하고도 보고가 중복되어 두 명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됐다.[10] 워낙 전선이 급격히 밀렸는데 이런 경우 실종자는 대개 전사한 경우보다는 포로로 잡힌 경우가 더 많다. 금성 전투 역시 국군 실종자 4000여명의 상당수가 강제억류된 포로로 추정된다.[11] 이는 초반부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정할 때 잠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