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선
金剛山線 / Kŭmgangsan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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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이 '''금강산선 전체노선도''', 하단 좌측이 '''당시 운행하던 열차'''. 하단 우측은 종점인 '''내금강역'''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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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원선 철원역에서 내금강역을 '''잇던''' 철도 노선.
2. 역사
일본의 철도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가 일본, 대만 등에서 철도로, 필리핀에서 담배제조 등으로 대성공한 이후 사업을 확장하려 나서다 금강산 관광을 목적으로 답사 1년 후인 1919년에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착공당시는 협궤인 1067mm 궤간이었으나 철도계의 중진 후루카와 사카지로(古川阪次郎)의 제언에 따라 표준궤로 변경된 이 철도는, 갖은 어려움 끝에 1924년 8월 1일에 철원군∼김화군 구간을 먼저 개통,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1931년 7월 1일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길이는 116.6㎞이다. 그러나 쿠메 타미노스케는 금강산선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5월 24일에 향년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 노선의 특징은 사철, 즉 민자로 지어졌으며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전철노선'''이다. 그 이유는 강원도 구간의 산악 지대를 넘어야 하는 탓이었고, 때마침 당시 건설된 중대리·향천리·지곡리 등지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의 부대 사업겸 해당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안전장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1] 에는 무식하게 무겁고 구조 한계상 빠르고 섬세한 속도 조절이 어려운 디젤이나 증기로 험준한 노선을 신속하게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해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힘좋고 응답성이 뛰어나며 가벼운 전기철도가 필요하였다.
또한, 해당 철도를 이용해서 '''신기술을 시험'''해보려는 성격도 있었는지 강원도 북부의 험준한 산골짜기에 건설하는 철도에다가 표준궤간에 직류 1500V로 동작하는 전기기관차, 노선이 통과하는 곳 중 금강산의 관문인 해발 824m의 단발령에는 구배가 50‰에 달하는 스위치백이 동시에 적용되었다. 게다가 '''스위치백이 2개나 있었다!''' 스위치백을 한 번 해서 단발령을 넘고 단발령을 내려갈 때에도 다시 한 번 스위치백을 넘은 것이다. 당시 스위치백이 있었던 구간은 오량역-단발령역 간 구간. 일본 웹의 지도[* 파나마 운하로 배가 산을 넘기 위해서 올라갈 때에는 도크에 물을 담고, 내려갈 때 도크의 물을 빼는 것과 비슷하다. 배는 물을 넣고 빼서 수직으로 오르내릴 수 있지만, 기차는 그럴 수 없으니 스위치백으로 오르내리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건설중에 굵직한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철원~김화 간 노선이 완공단계에 있던 1923년 7월 유례없는 호우로 공사 중이던 철도가 막대한 수해를 입었고,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시바우라’회사(현재의 도시바)에 발주한 전동발전기가 파손되는 등 재해가 겹쳐 개통은 지연되었다. 그 탓에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는 당시 한반도 철도운영을 담당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증기 기관차''', 객차, 승무원 등을 차용하여 1924년 8월 1일에 임시영업을 개시하였고, 새로 제작한 전동발전기가 도착하여 11월 26일에 본격적인 전차운행을 시작할 정도였다.
우여곡절끝에 1931년 7월에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하루 7왕복 열차가 운행되었는데, 가장 빠른 열차가 철원-내금강 간 116.6km를 운행하는데 3시간 53분이 소요되어 전기철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평균 시속 30km'''에 불과하였다. 이는 앞서 말한 단발령의 스위치백 및 험준한 지형 탓에 최소 곡선반경이 140R에 불과했으므로 빠른 속도로 운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140R이 어느정도냐 하면 '''30km/h 속도 제한이 걸려 있는 종각 드리프트'''와 동일한 수치인데, 종각드리프트가 여기저기에 있다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개통한 노선인데다 당시 기술 한계로 인해 느려 터진 노선이었지만, 당시에는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안하고 교통수단이었다.[2] 주 목적은 금강산 관광 목적으로 지어진 노선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본토의 일본인들도 일부러 경성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탔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봄·가을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경성역(훗날의 서울역)에서 직통 침대차가 운행될 정도였다. 화물수송 역시 창도 인근의 황화철광 광산 덕분에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창도역에서 채굴한 황화철광을 흥남의 닛치츠(日窒)콘체른 공장으로 수송했다.
1925년 186명이 이용한 데 그쳤던 관광객이 1938년에는 무려 24,892명으로 폭증하는 추세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약간 쇠퇴하기 시작한 1942년의 영업실적을 보더라도 여객 90여만 명, 화물 23만여톤의 수송량을 기록하였고 연 125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자 전기 사용 통제를 위해 금강산철도주식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3] 로 합병된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철이 부족하게 되었고, 1944년 10월 창도군에서 내금강 사이의 궤도를 철거해서 '''공출로 뜯어가는 바람에 사실상 폐선되었다.'''
그래도, 백두대간을 넘기 전의 구간인 철원군-창도군 구간은 광산인 유산철광때문에 살아남아서 그냥저냥 굴러갔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전체 노선이 북한령이 되어 북한에서 관할하면서 아주 잠깐 통학용이나 민간인이 사용되었으나 6.25 전쟁을 준비하면서 사용이 제한되고 기존열차들은 다른곳으로 옮기고 군사용도로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6.25 전쟁 터진 후, 일대에서 치뤄진 전투(저격능선 전투 등) 과정에서 포격, 폭격, 토치카 재료로 상당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분계선이 구간 상당 부분을 가로질러[4] 완전히 폐선되고 말았다. 심지어 시종착역인 철원역도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으로 인해 철도역 뿐만 아니라 철원군 시가지 전체가 흔적만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을 정도다[5] . 현재 남아있는 흔적은 정연리 금강산전기철도 교량을 비롯한 철교 몇 개, 그리고 경원선 폐선 구간처럼 구 노반이 지적편집도에 지목이 철도로 분류되어 있는 것 정도. 보전관리지역으로 지정된 철원역터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옛 김화역까지 가는 구간까지 대부분 지목이 철도로 나와있다.#
그나마 흔적조차 없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지라 남아있는 구간은 존재하며, 민간인이 제약 없이 답사 가능한 지역은 동철원역-동송역-양지역 구간 전후 정도다. 금강산선이 철원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분기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구간이 있었고, 이 우회구간 일부가 민통선보다 이남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원래 양지역이 있는 양지리 일대는 민통선보다 북쪽에 있었지만 두루미 철새도래지로 유명해지면서 2012년에 민통선이 조정되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단 이들 지역은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인데다가 미확인 지뢰가 있어 사진촬영을 할 때에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금강산선의 구간 중 한국령인 곳은 광삼역까지이며, 그 다음역인 하소역부터는 북한령으로 넘어간다.
구글 어스의 위성사진에 금강산선의 선형을 표시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했다.#[6]
당시 쓰였던 차량은 북한 철도성 혁명사적관에서 보존중이다. #[7]
3. 재개통의 가능성
이후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개시, 제 15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로는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과 함께 부활 이야기가 오가는 노선이 되었다. 다만, 해당 노선의 공사 구간이 험한 산악지대인데다가, 북한 지역에 남아있던 노선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이설되어 같은 노선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정도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노선의 상당수가 군사분계선이기 때문에 다른 노선보다 복구우선순위가 상당히 밀린다.
또한, 과거의 노선에서 창도역 ~ 화계역 구간이 북한이 건설한 '''금강산댐'''으로 인해 '''수몰'''된 상태이므로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복구시 우회할 곳을 찾아야 하는 문제점도 있다. 따라서, 연결된다고 해도 거의 '''신설'''될 노선이라고 봐야 옳겠다. 안습
그러나 수몰 여부에 상관없이 금강산선이 당시 노선 그대로 완전 복원이 가능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아직 남아 있는데, 통일 이후 시설물 정비 과정에서 '''금강산댐이 부실공사 판정을 받게 될 경우'''이다, '''안전 문제로 저수량 축소 등의 조치를 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아예 댐을 터뜨려 버릴 확률이 100%이기 때문.'''
하지만 과거의 철도부지를 그대로 이용한다면 선형도 옛 선형을 따라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구불구불해서 속도를 낼 수 없는 현대에는 쓸모없는 거북이 철도밖에 못 만든다. 상당히 노반이 남아있는 동해중부선 등도 같은 이유로 전부 새로 만든다. 물론, 해당 지역이 개발이 되지 않은 만큼 토지 보상이 매우 쉽겠지만 그것은 과거 철도부지를 그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유곡~금곡 구간에서 DMZ로 들어갔다 김화역 부근에서 잠시 남쪽으로 나왔다가 그 후 DMZ로 다시 들어간다.) 위의 역사 문단에서 서술한것 처럼 '''50퍼밀'''의 구배가 있다면 더더욱 노반을 새로 닦아야 한다. 현재 코레일은 안전운행을 위해 철도 노선의 최급구배를 35퍼밀로 규정하고 있는데, 50퍼밀이 넘게 될 경우 유사시 구원기의 투입이나 운행지장요소의 배제가 불가능하기에 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당장 단발령을 넘는 터널도 스위치백으로 운행하지 않기 위해 새 장대터널로 신단발령터널을 뚫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 또한 쉽게 해결이 가능한 것이, 복원 시에 경로만 원 선로대로 지으면서 운행하기 편하게 만들면 된다. 위 문단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일부러 급곡선이나 급경사를 만든 곳이 몇 군데 있기 때문.
그리고, 비무장지대가 50년 이상 사람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고 살아있는 생태계가 되었기 때문에 남북통일 이후에도 비무장지대를 그린벨트로 보존하여 생태계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존재한다.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었던 독일의 경우는 유럽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국민들이 옛 '철의 장막' 지역의 땅을 사들이면서 그린벨트처럼 만든 선례가 있다. 물론, 국내에 도입해도 좋은 선례임은 틀림없는데 금강산선을 포함하여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철도/도로의 건설에는 충분히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리고, 경의선 복원 당시에도 지적받은 문제점이지만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철도/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선 비무장지대에 깔린 '''지뢰밭''' 등의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12km 남짓한 경의선 선로를 복원하는데 3년이란 기간이 걸린 것을 생각해보자.
한편, 금강산선이 과연 전면 복원할 만큼 가치가 있는 노선인지도 검토해 봐야 한다. 본래 금강산선은 금강산 관광객을 빠르게 수송하기 위해 만든 관광철도였다. 덤으로, 이 노선은 경원선 외에는 접속되는 노선이 하나도 없어서 교통망의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밀린다. 물론, 남북통일 이후 금강산은 손꼽히는 관광지가 될 것이겠지만, 이를 위해서 비무장지대 전체를 헤집어 놓아야 하는 금강산선을 복원할 가치가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중부내륙순환열차나 백두대간협곡열차처럼 금강산선의 복원으로 수려한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점과 경원선처럼 과거의 역사를 강조하는 마케팅을 장점으로 한다면, 여행객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관광 상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노선이 부설되었을 당시와 달리 현재는 철도보다 도로가 투자 대비 효용이 크기 때문에 금강산선 복원보다는 '''철원-금강산간 고속도로''' 연결이 먼저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금강산선 복원이 우선 추진되려면 주변 철도와의 연계네트워크효과가 매우 큼을 입증하거나, 수도권에서부터 금강산까지의 교통 수요가 폭증하여 철도의 필요성이 급부상하지 않는 한 금강산선 복원은 추진되기 힘들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남한에서도 유수의 산악관광지인 지리산으로는 연계 철도망이 전혀 없고, 북한산 북쪽을 지나는 교외선은 관광수요와 더불어 경의선-경원선 연계 네트워크효과가 있음에도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개통되자 방치되고 있다.[8] 그냥 차라리 금강산, 바닷가 둘다 볼수 있게 동해안 철도를 놓는게 낫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바닷가 가려고 기차 타는 수요는 이미 장항선과 강릉선 KTX만 봐도 가능성이 있다.
덤으로, 남북통일 이후 해당 구간에 전철화를 하려면, 남한(교류)과 북한(직류)이 전류 방식을 다르게 쓰기 때문에 남북한 철도계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매우 낙후된 북한의 철도 환경을 고려하면, 교류 방식으로 일괄 통일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북한의 전철화 진척은 매우 낮은데다가 노후화됐다.
만약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가 복구되더라도 금강산선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닌 경강선이나 춘천속초선를 통해서 동해선(동해북부선, 금강산청년선)으로 접속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경원선과만 접속되는 지선인 금강산선보다는, 부산에서 강릉, 속초, 금강산(해금강), 원산, 함흥, 나진을 거쳐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계통의 철도가 한반도 동해안을 남북으로 쭉 연결하는 루트의 간선 철도로서 훨씬 가치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춘천속초선 양구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지선을 놓자는 떡밥도 있는데, 이게 실현이 된다면 옛 금강산선의 부활은 더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결국 금강산선 복원은 창도군의 철광석 수송을 위한 화물노선 + 경원선의 물동량을 분산하는 바이패스 노선 목적으로 금강산청년역까지 연장하여 동해선과 직결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선형이 양호한 철원-금곡 구간을 제외하고, 중앙선이나 경강선처럼 터널과 교량으로 떡칠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옛 노반은 비무장지대를 지나고 금강산까지 연결되는 자전거길로 활용되는 것이 나을 편.
한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사업의 일환으로 경원선 남측 구간 (철원역, 월정리역) 복원 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경원선과 금강산선의 분기점인 철원역이 2017년 11월까지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2016년 6월에 공사가 중지되었다.
상술했듯 원래 영업했던 시절에는 철원역 남쪽으로 분기했었지만, 만에 하나 부활하게 된다면 서울에서 올라오는 열차도 직통이 가능하도록 삼각선을 설치할 가능성도 높다.
4. 금강산선 연혁 및 역 목록
4.1. 금강산선 연혁
- 역사
- 1919년: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에 의해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설립. 동 년에 건설 인가 획득.
- 1924년 8월 1일: 철원~김화 간 28.8km 개통
- 1924년 10월 27일: 전기운전 개시
- 1924년 12월 20일: 김화~금성 간 16.6km 개통
-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간 8.6km 개통
-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 간 8.2km 개통
- 1929년 4월 15일: 창도~현리 간 15.1km 개통
- 1929년 9월 25일: 현리~화계 간 12.0km 개통
-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 간 13.3km 개통
- 1931년 7월 11일: 말휘리~내금강 간 8.6km 개통. 전 구간 개통.
- 1942년 1월 1일: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합병.
- 1944년 10월 1일: 전시공출 명령에 의해 창도~내금강 간 49.0km 선로 철거, 폐지.
- 1950년 - 한국전쟁으로 전 구간 폐지.
- 2017년: 철원역(금강산선,경원선) 복원 예정 (경원선 복원 사업정 (근데 백지화)
- 노선 정보
- 노선 거리: 116.6km
- 운영 기관: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개업~1942), 경성전기주식회사(1942~1945)
- 궤간: 1435mm(표준궤)
- 통행 방식: 좌측 통행
- 역 수: 28
- 복선 구간: 철원역내 인입선등을 제외하면 없음
- 전철화 구간: 전 구간, 직류 1500v
- 보안 장치: 없음
4.2. 금강산선 역 목록
[1] 그 일본에서도 ATS가 각 선구에 보급된 건 패전 이후이다.[2]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금강산편에 따르면, 금강산선 개통 이전에는 원산까지 경원선을 타고 간 다음 동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 금강산으로 갔다.[3] 일제강점기 서울전차를 운행했다. 1961년에 이 경성전기와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한국전력이 탄생했다.[4] 만약 경의선, 경원선, 동해선처럼 일부 구간만 해당되었다면 제한적으로나마 복원될 가능성도 있었다.[5] 똑같이 전쟁으로 파괴를 면치 못했던 다른 지방의 시가지들은 1951년 이후 전선이 안정화되면서 어쨌든 어느 정도 복구는 되었지만, 철원을 비롯한 금강산선 연선은 휴전 때까지 한 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투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복구는 꿈에도 못 꿨다.[6] 일본 웹에서 일제강점기의 금강산선 일부 구간들의 지도를 찾아서 역을 표시했으며, 수몰 구간의 선형을 파악할 때 구글 어스 프로의 오버레이 기능을 활용하였다.[7] 구 원산역 건물에 보존된 파시형 증기기관차도 상태가 좋다. 사실 금강산선 전동차, 파시형 증기기관차 모두 김일성이 탑승한 열차라서 보존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잠시 앉았던 의자도 플라스틱 덮개를 씌워서 보존할 정도로 김씨 일가 우상화에 목숨을 거는 것이 북한이다.[8] 다만, 남북통일 이후 경의선, 경원선 물동량이 늘어나면 운행이 재개될 가능성은 있다.[9] 현 평강군 지역[10] 현 평강군 지역[11] 이곳에는 현재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연대가 있다[12] 현재 이곳에는 북한의 내강소학교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