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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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1군단 예하 '''제9보병사단'''. 별칭은 '''백마부대'''. 경례구호는 '''백마'''. 사단 사령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위치하고 있다.
2. 상세
1950년 10월 창설할 당시 부대마크는 원 안에 다이아몬드 3개가 서로 맡대고 있는 모양이어서 루비부대로 불렸고,# 이후로는 원형 안에 '9'를 써놓았다. 그리고 백마고지 전투 이후로는 백마를 원 안에 해놓았다가 1982년에 날렵해보이는 지금의 모습으로 개선되었다. 백마로 변경된 부대마크는 육군규정 120 복제규정에 의거 부대마크는 사각형, 삼각형, 방패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백마부대의 마크를 살펴보면 둥근 원형에 외곽에 3등분 된 선은 3개의 주 전투부대(3개 보병연대)를 뜻하고, 백마는 백마고지에서 싸운 이래 사단의 상징이 됨에 따라 부대표식이 된 것이다. 현재의 부대마크는 1982년에 고쳐졌고. 1950년대부터 1982년 개정 전까지는 현재와 다른 모습의 백마였다. 말하자면 백마고지를 상공에서 봤을 때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시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개정된 모습은 백마가 앞발을 차며 도약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외곽의 삼등분 된 백색 원형은 결백숭고한 백의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강철같은 단결을 의미하며 3개의 전투부대(28, 29, 30여단)가 단결됨을 상징.
청색 바탕은 평화, 대한남아의 백절불굴의 기상, 항구불변한 우국충정을 상징.
백마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발휘한 감투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의 최선봉이 되어 백두산 연봉을 향하여 용약 돌진함을 상징.
백마 신병교육대대 제공 훈련병 가이드북 中
2006년부로 시인성이 높은 각 부대의 전투복 부대마크를 위장색(검은색, 검녹색)으로 교체하였는데, 백마부대의 경우 검은색 바탕에 우중충한 색깔의 백마, 그리고 검녹색 띠로 바뀌었다. 병사들은 농담삼아 '''흑마'''라고 부른다. 원조 쪽이 더 멋진지 전역하는 병사들 중 상당수가 흑마 대신 백마 마크를 전투복에 박고 나간다.
말 갈기의 뾰족한 부분이 9사단답게 9개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유명한 메이커 사단 중 하나이며, 호국 훈련이나 KCTC 훈련 등이 연례행사로 둘 중 하나는 꼭 있고, 그 외 각종 훈련들을 '''군생활 내내 즐길 수 있다.'''[1] 15회로 전군에서 대통령 부대표창을 가장 많이 수상한 부대이다. 2009년 부대에는 역대 대통령을 가장 많이 배출한 사단이라는 자체광고도 있었다. 물론 그 중 두 명은 대통령 예우가 대부분 박탈당했다.
부대 경례구호가 '''백마'''다. 때문에 이 곳 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기초군사훈련 받고 다른 사단으로 배치받는 병력들 중 개념이 없는 병사들은 다른 사단에 도착한 첫날에 씩씩하게 백마라고 경례하고 고문관 확정되는 경우가 있다. 구호가 좀 특이한 경우인데 보통 1호간으로 경례한다. 원래 2호간 경례였지만 2008년도에 새로운 사단장이 취임하면서 1호간 경례로 바뀌었다.[2] 즉 손이 모자 챙에 닿을 때 "백마"라고 빠르게 외쳐야 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뱅마]라 발음하며, 이에 대해선 아무도 태클 걸지 않는다.[3] 다만 신병교육대대처럼 2호간으로 경례하는 부대도 있는 듯.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2.1. 6.25 전쟁
6.25 전쟁 발발 뒤인 1950년 10월 25일, 28, 29, 30연대로 창설된 사단급 부대. 부대가 창설된 시점에 북한군은 38선 이북으로 밀려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초창기 9사단의 활동은 주로 충청-전라도 지역에 남은 북한군 빨치산 토벌전에 집중되었다. 이때 초대 사단장은 장도영 준장이고 참모장이 박정희. 그런데 장도영 소장부터 6대 최석 준장까지 평균 재임기간이 2달이 채 안된다. 초대 사단장은 31일까지 단 6일간 재임했다. 2대 사단장인 김종오 준장은 2주 남짓한 임기에 한이 맺혔는지 1952년에 8대 사단장으로 다시 부임했고 후술할 백마고지 전투로 명예를 회복했다.
이 신편 사단은 각 군에서 차출되거나 후송, 낙오병과 신병들을 모아 창설됐기에 서로간의 동질감도, 연대도, 사기도 낮아서 창설 초창기엔 붙었다 하면 늘 패주하기 급급했다. 그러다가 1951년 5월 7일 매봉·한석산 전투에서 7사단 8연대와 임무교대한 30연대가 맹활약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후 16일부터 시작된 현리 전투에서 제3보병사단과 함께 부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 실종되는 참패를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4] 그러나 1952년 강원도 철원군의 395고지에서 2배가 넘는 중공군 제38군단과 12차례나 고지를 내주는 공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다. 이 당시 395고지는 온 산의 수목이 사라지고 고지가 1m나 낮아질 정도로 수많은 포격을 당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하여 이 전투를 백마고지 전투라 부르게 되었고, 9사단 역시 백마부대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실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며[5]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상승(常勝, 항상 승리) 칭호를 받았다.
2.2.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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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파월 백마부대 장병들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과 함께 파병된 3개 전투사단 중 하나로서, 이후의 명성과 지명도에는 베트남에서 얻은 것도 한 몫 한다. 원래는 부대마크 자체도 간지나게 생긴 덕분에 해외 군사연구자들에게도 화이트 호스(White Horse)라고 불리며 유명해진 듯하다. 같은 의미로 백마와 함께 블루 드래곤(청룡부대)나 타이거(맹호부대) 등등도 해외 군사연구자들이 한국군이라 하면 떠올리는 부대들이 되었다.
월남전 파병 이후 귀국할 당시인 1971년 미국에서 닉슨 독트린에 의해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던 미 7사단이 철수하게 되면서 비무장지대를 담당하던 미 2사단이 동두천시, 의정부시 일대로 이동배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한미군 부대 조정 때문에 공백이 생긴 부분을 9사단이 담당하게 되면서 현재 위치한 서부전선으로 올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기존에 있던 위치인 강원도 철원군[6] 으로 갔거나 아니면 후방으로 갔었을지도 모른다.
2.3. 12.12 군사반란
12.12 군사반란 당시 사단장이 전두환의 절친 노태우였다. 쿠데타군들의 원래 계획은 특전사와 보안사 만으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사단장이 정변에 가담하고 있었더라도 부대 자체는 정변에 직접 동원되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지체되어 결국 사태가 발각되고 육군본부와 수경사가 전투부대를 투입하여 쿠데타군을 진압하려하자 노태우가 '''전방에 배치되어있던''' 9사단 예하 29연대를 동원시켜 중앙청에 '''임의로 재배치'''한 것.
심지어 이는 12.12를 주도하던 전두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위기를 직감하고 노태우가 혼자서 자의적인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원래는 국군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제33헌병경호대, 육군특수전사령부와 수도경비사령부 제30/33경비단 외 나머지 일선 부대장들은 유사시에만 자신의 부대를 호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일반 전투 부대장 중에 12.12사태 초반에 예하 병력을 불러온 이는 노태우와 국방부·육군본부를 점령한 당시 1공수여단장 박희도 정도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12.12 군사반란은 하룻밤만에 대성공했고, 노태우는 이 정변의 결정적인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예하 병력을 동원한 덕에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결국 정권의 2인자 자리에 서게 되었고, 이는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초석이 된다.
무엇보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최전방 부대를 부대장이 제멋대로 전용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치욕적인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압군 측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전방부대를 차출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었다.[7] 게다가 최전방 부대는 모두 한미군사동맹협정에 따라 주한미군 사령관의 허가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9사단 참모장이었던 구창회 대령은 사단장 명령으로 출동시킨 29연대를 철군시키라는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8] 의 명령에 '''연대 출동 안합니다'''며 상관을 속이고 명령 불복종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애초에 기본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해버린 행동이다.[9]
이렇게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제멋대로 빼돌려 서울로 진격시켜서 쿠데타로 악용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1961년 5.16 군사정변 때도 이미 전례가 있었다. 바로 김포, 강화 해안 경계를 담당하던 해병대 제1여단[10] 병력을 여단장인 김윤근 해병대 준장이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했던 것.
3. 신병교육대
3.1. 위치
3.2. 상세
4. 예하부대
4.1. 사단직할대
사단 사령부 직할 부대 중에서는 통신대와 정비대대, 본부대[13] 만 구막사를 사용하고 잇으며 의무대를 제외한[14] 나머지 부대는 부대 통합으로 건설된 신막사에서 지내고 있다. 본부대와 통신대만 1980년대 지어진 구막사에서 지내고 있다.
사단직할대 중 본부근무대, 보급수송대대, 의무근무대, 정보통신대대, 화생방지원대, 방공중대는 사단 사령부 안에 들어가 있다.[15]
4.2. 제28보병여단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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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제1대대 홍도깨비[16]
- 제2대대 황도깨비
- 제3대대 청도깨비
4.3. 제29보병여단 황금박쥐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제1대대 붉은박쥐 (구 사자대대)
- 제2대대 푸른박쥐 (구 전격대대)
- 제3대대 검은박쥐 (구 돌격대대)
4.4. 제30보병여단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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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제1대대 불사조
- 제2대대 검독수리
- 제3대대 참독수리
4.5. 포병여단 백호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제30포병대대 백두산/독수리
- 제51포병대대 한라산
- 제52포병대대 황희정승
- 제966포병대대 흑곰(왕포)
5. 과거부대
6. 출신인물
6.1. 사단장
6.2. 장교/부사관
- 윤석찬(3사28기)
- 이상태 장군 사단장 시절 능력을 인정받아 최초로 영관장교에서 위관(대위)장교로서 분대장교육대장을 역임했다.
- 수색중대장 시절 최초로 흉장을 만들었으나 규정에 위반된다며 착용은 하지 않았다.
6.3. 병
- 김규년
- 김재선(가수)
- 이상호(인터넷 방송인)
- 정훈(야구선수)
- 신준섭(배우)
7. 기타
영상물 등장이 잦은 부대이다. 소설이자 영화화되어 유명한 하얀전쟁에서 주인공이 몸담는 부대인 것은 물론, 머나먼 쏭바강(1993년 SBS)에서도 주인공의 소속부대로 나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12.12 때 쿠데타군의 선봉으로 출격한 탓에 MBC 드라마인 제5공화국 등 12.12를 다룬 드라마나 영상물에서는 반란군으로 나온다.
2013년 MBC 일밤의 2부 코너인 진짜 사나이에서 출연자들이 군생활을 체험하기 위한 '''첫 자대배치를 이 곳으로 받았다.''' 그동안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리얼 병영 체험 스타일의 예능 프로그램인지라 군부대 촬영 섭외가 쉽지 않았을텐데, 아마도 MBC 예능 프로그램 제작이 일산 드림센터에서 이뤄지다 보니 근방에 가장 섭외가 용이한 부대라서 처음 선택한 듯하다. 이후 2016년도에 이 곳 사단 신병교육대대, 수색대대, 포병연대 독수리대대, 백마유격장에 출연하였다.
1989년 여름 첫 방송을 시작했던 "우정의 무대" 1편도 백마부대에서 시작했으니 공중파의 단골손님 부대이다.[20]
푸른거탑도 백마부대 신병교육대에서 실시하였다. 또한 초기 푸른거탑에서는 백마부대 마크를 단 군복을 입었다가 3화부터는 마크를 바꾸었다.[21]
2014년 1월 BBC 뉴스에 등장하였다.
7.1. 근무환경
30연대와 29연대는 강안 경계를 맡고 있어 대대 규모로 순환되다 2015년 말부터 두 부대 모두 1개 대대로 고정되었다. 수송대, 의무대같은 일반 보병대대에는 없는 자원을 주로 연대본부 예하 직할중대에서 지원받는다.
GOP와 마찬가지로 내륙부대로 복귀함과 동시에 근무일수에 비례해 보상휴가를 받는다. 30연대 기준으로 투입 후 3개월이 지나면 1박이 생기고 그 다음 달부터는 한 달에 1박씩 적립이 된다. 2015년부터는 투입 첫달부터 2박 3일씩 준다. 강안에 있다보면 외박 금지는 물론 휴가도 근무 인원이 안 나오면 제한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륙부대로 돌아오면 모든 중대의 1/3~1/4정도가 돌아가면서 휴가를 한꺼번에 나갔다 들어오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보상휴가이니 정기휴가에는 없는 TMO는 덤.
그래서 강안을 가지않는 부대가 좋냐고 한다면, 그만큼 훈련으로 갈군다. 신병교육대대에서는 강안을 가지 않는 28연대를 소개할 때 국방부에서 조사했다는 부대별 훈련량 순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온갖 휘황찬란한 특수부대들 가운데 삭막한 일반 보병부대의 이름이 3위에 박혀 있는 모습은 사실 여부를 떠나 꽤나 임팩트있다. 참고로 1,2위에 있는 부대는 각각 특전사와 해병대1사단수색대대이다. 훈련 강도로는 그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훈련량은 과장이 아닌지 입소해서 퇴소할 때까지 산만 죽어라 탄다. 신병교육대에서 30km 행군을 하품하며 돌았다는 인간들이 여기 훈련 한번 받고 발에 잡힌 물집 때문에 일주일 내내 죽는 시늉을 내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휴식기 없이 미친듯이 훈련만 뛰기에 힘든 것이지 훈련 강도는 특수부대들에 한참 못미치므로 엄청난 훈련 횟수에 힘입어 빠르게 익숙해진다. 상병만 달게 되면 10주 연속 훈련이든 지형숙지를 빙자한 끝없는 간이행군이든 짜증만 날 뿐 웬만한 일에는 멘탈 잡고 견딘다. 물론 익숙해졌든 아니든 다음 해 훈련계획표를 보고 그 현란하다 못해 눈이 아플 지경인 훈련 목록에 절망하는 건 모두 똑같지만. [22]
안병석 사단장이 다른 요직으로 영전하고 현 사단장이 취임한 이후에 훈련의 강도가 더 강해졌다고 한다. 사단장이 훈련을 중시하는 성향인지라 사단의 운영방향 역시 이를 따라가는 게 이유로 보인다.
7.2. 동기 제도
6개월 동기제를 실시하고 있다. 가령 2020년 1월에 입대한 용사의 경우 2020년 6월까지 입대한 용사와 동기이며, 2020년 7월부터 입대한 용사와는 후임 관계가 된다. [23]
아래 서술된 내용은 연간 동기제(1년 동기제) 시절 작성된 내용이므로, 6개월 동기제인 현재 기준으로는 차이가 있으므로 열람 시 유의.
육군 전체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9사단을 포함한 몇몇 1군단 예하 부대가 시범운용하고 있다. 현 동기제 생활관에서 소대별 생활관으로 회귀하기 위한 조치. 동기제 생활관을 운용함에 있어 전투력 유지가 어렵고 군 기강이 해이해져 상병장이 되어도 주특기나 병 기본에 미숙한 인원이 많아진 것이 원인이다.[24] 상병장이 상병장 생활관을 청소하고 있을 때, 일이등병들은 눈치볼 일이 없으니 생활관 개판인 상태로 누워서 티비보고 있는 게 가능하단 소리다.
심지어 자기보다 먼저 입대한 동기들 한테는 무시받기 싫어 하면서 정작 자기 보다 늦게온 동기에겐 개무시하여 싸움이 일어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속칭 1월~4월에 입대한 군번을 전군번 혹은 초군번이라고 하며, 9사단 어느 부대를 가도 초군번과 후군번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즉 말이 1년 동기제이지 사실상 3~6개월 동기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연간동기제의 장점은 '후군번(9~12월)'이 적응을 하기 쉽다는 것과 병영생활을 함에 있어서 선임 눈치를 별로 보지 않아서 편하다는 점이다. 초군번에게는 해당 안되는 장점이다.
단점으로는 초군번만 열심히 한다. 초군번은 자대에 전입올 시기에 이미 선임들만 가득 있기 때문에 눈칫밥 보며 억지로 열심히 하는 반면에 후군번은 이미 동기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자연스레 편하게 병영생활 하며 주특기 등을 갈고 닦지 않는다.어떤 경우는 후군번이 자신의 계급(짬)을 생각 못하고 동기라는 생각으로 초군번에게 역짬질하는 괴랄(?)한 경우도 발생한다. 초군번과 후군번이 친하게 지내는 경우는 소수에 속하며, 이는 대부분 후군번이 초군번 못지않게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거나 혹은 적응력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날 경우에만 해당된다.
연간동기제는 29연대가 연대장 김태성 대령(현재 소장)과 정영석 예) 원사의 합의를 통해 군 최초로 시행되었고, 1년동기제의 긍정적인 결과로 김태성 대령은 장군 진급에 성공하였다.
7.3. 사단가
'''철원 뜰 백마고지 싸움터로 삼고서'''
'''싸우고 또 싸워서 대승을 이룬'''
'''그 용맹 길이지켜 나라 겨례 수호에'''
'''나가자 9사단의 깃발을 높이들고'''
'''오너라 풍진아 정의의 방패앞에'''
'''우리들은 백마부대 9사단의 용사다'''
'''십만의 오랑캐를 한칼에 쳐 무찔러'''
'''개가를 높이올린 북진 능선에'''
'''무훈도 찬란한다 역사의 백마용사'''
'''힘내자 9사단의 불멸의 전승기를'''
'''오너라 풍진아 정의의 방패앞에'''
'''우리들은 백마부대 9사단의 용사다'''
'''중부전선 금화뜰에 터전을 굳게 닦은'''
'''혈전의 저격능선 이름도 높다'''
'''다같이 마음엮어 무쇠같이 뭉쳐서'''
'''받들자 9사단의 찬란한 우리 전통'''
'''오너라 풍진아 정의의 방패앞에'''
'''우리들은 백마부대 9사단의 용사다'''
'''사단가'''
'''1절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정의가 있다
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2절
아느냐 그 이름 역전의 사나이
그 이름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자유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자유가 있다
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3절
아느냐 그 이름 상승의 사나이
청사에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평화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평화가 있다
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백마가'''[25]
[26]
8. 사건사고
9. 여담
- 파주-고양 지역 개발이 활발한 탓에 육군 전체의 군사보호구역 협의 건중 20%가 넘어간다고 한다.
- 주변이 허허벌판이었던 시절에 지어진 사격장 주변에 각종 건축물이 들어선 탓에 관련 민원도 많은 편이다. 사단 사령부 주변은 거리가 제법 된다고는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아파트 밖에 안보인다. 모 연대 주둔지는 병사들이 뭐하는지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주변 아파트들이 가깝다. 가까운 수준이 아니라 왕복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영내 사격장에서 사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근처 근린공원을 이용하는 시민과 아파트주민이 함께 민원을 때려 넣는다.
- 자동화 사격장 인근 아파트 촌으로 도탄이 날라가는 사고가 1997년에 발생하여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이 파손되는 일이 있었다.
- 백마부대는 과거 베트남 전쟁 관련 드라마였던 머나먼 쏭바강 등으로 이미 대중에게 베트남 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대인데다가, 작가 안정효가 이 부대 출신으로 월남전 파병을 갔으며, 그의 소설 하얀전쟁의 주인공들 역시 작가처럼 백마부대였기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서는 가장 무난한 선택이기는 했다. 하얀전쟁이란 제목도 백마부대의 견장이 하얀색인 것에서 나왔다.[27]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 및 동명의 원작소설 역시 작가 박영한이 참전하여 직접 겪은 일을 소설로 집필한 것이다. 조성모의 가요 아시나요의 뮤직비디오에도 주인공의 부대로 나오지만,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역사 왜곡이라고 소송을 거는 등으로 인해 현재 작중 나오는 부대 마크의 백마를 파랗게 칠하고, 일부 장면들은 편집한 버전이 공개되어 있다.
- 1980년 3월 23일, 한강무장공비 침투를 저지한 황중해 일병과 김범규 이병이 있다.당시 대한뉴스(시체가 모자이크 없이 나오니 주의) 공로로 상금 1천만원[28] 과 6개월 포상휴가를 받았다.# 이 중 황중해 일병은 완전작전 후 부사관에 지원하여 최종계급 상사로 2012년 전역하였다. 이 분의 공로를 기념하여 소초 하나를 이 분의 이름으로 바꾸었다(이전에는 구산동 소초였지만, 황중해 소초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황중해 일병의 이름을 딴 '황중해 사격장'도 존재한다). 이 사건은 사상 최초로 아군의 피해 없이 북측의 침투를 막아낸 완전작전이기에 9사단에서는 매년 3월 23일만 되면 3.23 완전작전을 기린다.
- 2008년도에는 대통령을 3명(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배출한 사단이라고 홍보했던 문구가 각 생활관 별로 붙어 있었다(2017년에는 생활관 별로 붙어있지 않으나 9사단 9대 자랑이 복도에 붙어있다).
- 2013년 9월 16일 경기도 파주시 서북방 최전방 임진강에서 월북을 시도하던 40대 남성을 초병이 사살했다. 철책 인근에서 서성이던 해당 남성을 발견, 군 작업인원이나 인근 지역의 농민인지 확인하려 했으나, 이내 그 남성은 철책을 넘었다. 귀환하라고 수차례 경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남성은 남한 출신임에도 일본에 난민 망명을 신청했는데, 일본에서 거부하자 월북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살된 뒤 메고 있던 가방에서는 여권과 우리나라 주요 인사들의 정보가 담긴 자료들이 발견되었는데, 네이버에서 검색만 하면 나오는 쓸데없는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 신병교육대대와 일부 부대에서는 기상 때마다 스트레칭 체조 방송을 틀기도 한다. 30연대의 군종 법사(스님)가 직접 녹음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배경음은 유키 구라모토의 meditation 출처
- 육군 보병 피복 및 장구류, 개인화기 등의 테스트 부대이기도 하다. 육군 장비들이 우선보급되어 그 결과가 육군 전체에 보급되고 있다. 다른 부대들이 막 K3 받아 가벼워서 좋다고 얘기할 때는 이미 폐급이라 불릴 정도로 이 부대 K3는 노후화가 심한 상태라고 한다.
- KCTC에서 최초로 3참호까지 돌파했던 사단이다. 백마부대 소속 산하 부대(2009년 11월)가 KCTC 훈련에서 최초로 돌파하였다.
- 2020 11월 KCTC에는 2참호까지 돌파하였는데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7일동안 공격만 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