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1. 개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창립 이후로 총 3차례에 걸쳐 대규모 선수 이탈 사건이 발생한 바 있으며, 매번 일본 프로레슬링 흥행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2. 0차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1990년)
텐류 겐이치로를 위시한 일련의 1980년대 말 전일본의 여러 탑 컨텐더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여 안경 회사 메가네 슈퍼가 주도적으로 창립한 레슬링 단체 SWS의 창단 구성원으로 합류한 사건. 이 사건 이후로 자이언트 바바가 눈을 감기 전까지 텐류 겐이치로는 다시는 전일본 매트에 돌아오지 못했다.
전일본,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을 영입한 SWS는 자본력을 바탕으로 WWF와 제휴하여 텐류 겐이치로 대 헐크 호건과의 경기를 부킹하는 등 크게 번창하는 등 했으나, 심각한 파벌 문제, <주간 프로레슬링>과의 갈등, 요코즈나 출신인 키타오 코지와[1] 존 텐타 간의 시멘트 매치 사건 등 갖은 사건 끝에 빠르게 몰락한다. 이후 텐류는 WAR를 창립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비롯한 여러 타 단체와 교류하며 1990년대 커리어를 펼쳐나간다.
다른 한편 자이언트 바바, 점보 츠루타 등 몇몇을 제외한 여러 베테랑 레슬러들이 단체를 이탈한 공백 상황은 미사와 미츠하루, 카와다 토시아키, 코바시 켄타, 타우에 아키라 등 젊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는 1990년대 전설적인 '''왕도 프로레슬링'''이 펼쳐지는 계기가 된다.
3. 1차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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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NOAH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다.
1999년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창립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자이언트 바바의 사망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점에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전일본 5천왕의 정점인 미사와 미츠하루가 있었으며 미사와는 전일본의 2대 사장으로 임명되어 전일본을 이끌 위치로 올라섰다.
하지만 미사와 미츠하루는 이 위치를 단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직함은 사장이지만 경영권은 커녕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지분도 없으며, 실질적 단체의 수익은 자이언트 바바의 부인인 바바 모토코가 다 가져가며 사장으로써 신일본을 따라잡기 위한 혁신안이 번번이 모토코에 의해 막혔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무적 선역 아이콘인 미사와 미츠하루 본인의 급여가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에이스인 무토 케이지의 1/3로, 신일본 주니어 헤비급의 가네모토 코지와 동급이었고 그 밑의 선수는 그보다 아래의 대우를 받는 심각한 저임금상태였다.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이언트 바바라는 거목의 존재 덕에 그를 따르고 있었지만, 바바 모토코의 경영간섭은 미사와가 제대로 전일본을 이끌기에는 너무나 지나쳤다.
결국 미사와 미츠하루는 바바 모토코의 간섭을 거부하며 항의했고, 모토코는 그를 사장직에서 해임한다. 미사와 미츠하루는 사실상 바바 모토코와 결별했으며 스승인 자이언트 바바가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독립해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창설했던 것처럼 자신을 따르는 선수들과 함께 새 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카와다 토시아키, 후치 마사노부, 타이요 케어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잔류하지만 자신의 평생 동지였던 코바시 켄타를 비롯한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대다수 선수들이 호응하면서 전일본을 탈단해 새 단체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프로레슬링 NOAH'''의 태동이다.
4. 2차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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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일본 선수 이탈로 인해 새롭게 개양한 무토 케이지의 단체 WRESTLE-1의 창단 멤버들.
4.1. 1차 이탈사건부터 2차 이탈사건 사이
그 후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로스터에 선수가 달랑 3명이 남아 단체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때마침 무토 케이지가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종격투기 노선에 반발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탈퇴하고 코지마 사토시 등과 함께 전일본에 전격 입단하였다. 동시에 무토 케이지는 바바 모토코에게서 전일본의 주식과 권한을 모두 넘겨받아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취임 이후 특유의 수완으로 다시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정상급으로 올려 놓았다. 하지만 2011년에 베테랑 프로레슬러였던 TARU가 슈퍼 헤이토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책임을 지고 사장에서 사퇴하였으며, 우치다 마사유키(内田雅之)가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무토 케이지는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컸다.
4.2. 발단
한편 2012년 11월 1일, 기업 회생을 주로 맡고 있는 주식회사 스피드 파트너스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인수하였고 이에 따라 스피드 파트너스의 사장인 시라이시 노부오(白石伸夫)가 전일본의 새로운 오너에 취임하였다. 시라이시 노부오는 오너에 취임하면서 전일본을 개혁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정책들을 발표했는데, 그러면서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신일본의 키타니 오너를 비판하면서 어그로를 잔뜩 끌게 되었다.
시라이시 노부오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면서 계속해서 어그로를 끌었는데, 안토니오 이노키나 할 법한 실전 프로레슬링을 주장하는가 하면[2] 신일본 선수들 중 제대로 된 선수들이 한 명도 없다는 등의 발언을 계속했다.[3] 문제는 이것이 '''신일본의 이노키즘에 반발해 탈단한 무토 케이지에게는 제대로 뒤통수를 갈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프로레스 러브를 외치며 AV회사의 돈까지 끌어오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던 무토 케이지의 입장에선 시라이시 노부오의 행동이 자신의 철학과는 반대였기 때문에 사이가 봉합 불가능할 정도로 벌어진다.
4.3. 전개
그러던 와중 2013년 6월 1일을 기해 시라이시 노부오 본인이 우치다 노부유키를 쫓아내고 직접 사장에 취임했는데, 하필 이 날 무토 케이지가 회장직을 사퇴하면서 일이 커졌다. 선수들 대부분은 무토 케이지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런 무토가 회장직을 사퇴하자 많은 선수들이 SNS를 통해 곤혹스러운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6월 5일에는 무토가 주간 프로레슬링[4] 을 통해 시라이시 노부오가 종합격투기를 하자고 주장했으며 더 락을 불러오고 싶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고[5][6] 전일본 이탈에 대해 시사하기도 하였다.
4.4. 선수 이탈
잡지를 통해 무토 케이지의 전일본 프로레슬링 이탈이 기정사실화되자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씩 트위터나 블로그, 페이스북을 통해 이탈이나 잔류를 선언하기 시작했고, 이 선수들이 6월 30일 흥행을 마지막으로 떠난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많은 팬들은 2000년 미사와 미츠하루가 주도한 이탈사건에 이어 제2의 이탈사건이 일어나게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7월 1일을 기해 전일본은 시라이시 노부오를 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로 운영된다고 밝혔고, 무토 케이지는 7월 10일 기자회견을 열어 WRESTLE-1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설립한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이탈한 선수는 무토를 포함해 11명으로 확인되었다.
4.5. 영향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로스터 수는 당장 이전의 절반 수준인 10명 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으며, 평소 같았으면 한 흥행에 7~9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겠지만 분열 직후 처음 열릴 흥행은 5경기 수준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미사와 미츠하루 사후 내부분열을 겪으며 2013년 여름에 프로레슬링 NOAH를 탈단한 아키야마 준 및 그의 파벌인 선수들은[7] 이전부터 프리 신분으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뛰고 있었는데, 무토 케이지의 이탈 후 전일본은 이들을 받아들여서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긴 했다. 이후 아키야마 준이 전일본의 새로운 사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8]
한편 무토 케이지의 WRESTLE-1은 전일본 이탈 후 TNA와 합동 흥행을 가지며 경험을 쌓은 뒤 단독 흥행을 개최하며 어느 정도 정착했고, 2016년부터 전일본 프로레슬링도 미야하라 켄토를 비롯한 여러 유망주를 키우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이후 아키야마가 전문경영인을 데려오며 사장직에서 물러나 선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2020년 들어서 경영진들과 불화가 있었고 전일본이 DDT 프로레슬링과 협의하여 아키야마를 DDT로 렌탈 이적시키게 한다. WRESTLE-1은 전일본에 비해 사정이 훨씬 안좋았고 2020년 4월 흥행이후 무기한 영업중지라는 말로 사실상 폐업하고 말았다.
[1] 스모 선수 출신 프로레슬러로 레슬매니아 7에서 텐류와 팀을 이뤄 태그팀 디몰리션과 붙은 적이 있다. 하지만 워낙 인성에 문제가 있던 인물이라 결국 프로레슬링 계에서 퇴출당했다고 한다.[2] 당시 일본에서 실전 격투기는 한물 간 상태였고 오히려 정통파 프로레슬링이 다시 대세가 된 상황이었다. 특히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경우 타나하시 히로시나 나카무라 신스케, 오카다 카즈치카 등의 선수들이 대박을 쳐서 확고부동한 업계 1위에다 전세계적으로도 WWE 다음갈 정도로 잘나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3] 하지만 타나하시 히로시나 나카무라 신스케, 오카다 카즈치카 등은 상당한 미남에 몸도 비교적 좋은 편이며 무엇보다 실력 면에서도 최고급이며 명경기들을 많이 배출한, 그야말로 2010년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레슬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4] 일본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링 전문 주간지[5] 더 락은 이미 프로레슬러로서 정점에 선 인물이며 이미 은퇴한 데다 또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액션 스타인데, 그나마 락이 레슬매니아에 참전한 것은 락이 원래 WWE 출신이고 락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데 WWE가 협력을 제대로 해 준 점도 있어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런 것일 뿐이다. 그리고 더 락을 불러오려면 그 개런티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설령 그 돈을 마련한다고 해도 그걸 보고 박탈감에 빠질 선수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6] 사실 더 락을 부를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바로 무토 케이지의 이름값으로 부르는 것(...). 더 락은 무토 케이지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특기 기술인 피플스 엘보도 무토 케이지의 것을 보고 벤치마킹한 것이었다.[7] 아키야마 준, 시오자키 고, 가네마루 요시노부, 스즈키 코타로, 아오키 아츠시[8] 이들 중 시오자키 고는 다시 NOAH로 돌아갔고 가네마루는 신일본에서 스즈키 군으로 활동 중이며, 스즈키 코타로는 프리랜서로 뛰고 있다.(주로 전일본과 NOAH를 오가고 있다.) 아오키 아츠시는 스즈키, 가네마루, 시오자키와 달리 아키야마와 전일본을 지키며 후배 양성과 선수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가 2019년 6월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