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프로레슬링
'''王道プロレス'''
'''King's Road Style Pro-wrestling'''
1. 개요
1990년대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2000년대 프로레슬링 NOAH에서 꽃핀 프로레슬링 스타일이자 단체 운영 방침, 혹은 총체적인 프로레슬링관(觀). 흔히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스트롱 스타일과 대비되고는 하는 스타일이며, 이후 전세계 프로레슬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탄생 배경
흔히 "왕도 프로레슬링"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레슬링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등장했으며, 이러한 흐름이 등장한 까닭으로는 여러 배경 요소가 언급된다:
- 자이언트 바바의 영향: 사소하게는 낙법을 강조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바바의 프로레슬링관의 핵심은 '기술을 받아내는 것'에 있었다고 많은 레슬러들은 증언한다.[1] 이는 이후 왕도 스타일에서 상대의 기술을 극한까지 받아내는 것, 그리고 순수한 프로레슬링을 추구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 미국 남부 레슬링의 영향: NWA 가맹 단체로서 전일본에는 당대 NWA의 탑 레슬러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점보 츠루타나 텐류 겐이치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도리 펑크 주니어 밑에서 수련을 받기도 했다. 이는 느린 페이스로 경기를 쌓아 올리는 스타일의 배경이 되었다.[2]
- ''어두운 프로레슬링' 배제: 1980년대까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주요 선수들 간의 경기는 유혈 사태, 흉기 사용으로 인한 반칙패, 장외 링아웃 무승부 등으로 맥빠진채 끝나기 일쑤였다. 이러한 "아메리카 프로레슬링" 스타일은 점차 많은 팬들의 반발을 불러오기 시작했고 다른 방식의 프로레슬링을 꾀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 전일본 탑 이벤터의 부재: 1990년대 초 전일본에선 텐류 겐이치로가 단체를 이탈, 80년대 말 활동하던 초슈 리키는 신일본으로 복귀, 점보 츠루타는 간염으로 출전이 줄어드는 등 종래 메인 이벤터들이 급격히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더불어 미국에서는 WWF에 의한 독점으로 인해 레슬러들의 방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곧 당시 신인들이 나서서 새로운 프로레슬링을 선보일 기회가 되었다.
3. 특징
3.1. '밝고 즐거운 레슬링'
"밝고 즐거운 레슬링"이란 당시까지 일본 프로레슬링에 만연했던 (그리고 팬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장외 싸움에 의한 양자 링아웃이나 반칙에 의한 불완전 결말 등 어두운 요소를 없애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검은 팬츠''', '''잔인한 격투기 지향''' 같은 스트롱 스타일의 이미지에 대비되는 '''형형색색의 복장, 정통 프로레슬링 지향'''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더불어 자이언트 바바, 점보 츠루타 등 노장 레슬러들은 흥행 초반에서 코믹한 시합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밝고 즐거운" 모습을 다른 측면으로 실현하기도 했다.
3.2. '치열하고 격렬한 레슬링'
왕도 스타일의 '치열하고 격렬한 레슬링'이란 특정한 파이팅 스타일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상대의 모든 기술을 피하지 않고 '''극한'''까지 받아주고, 상대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극한'''까지 퍼붓는, 말 그대로 '''프로레슬링 그 자체를 극한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목이 부서져라 내리꽂는 높은 각도의 수직낙하기가 그 대표적인 상징. 기믹이나 캐릭터성을 그리 부각시키지도 않으며, 말 그대로 사나이들의 근성이 부딪히는 광경을 연출하는 것이 주 방점. 쉽게 말해 '''거대한 육체와 정면충돌!'''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이는 '상대방의 기술을 모두 받는 프로레슬링 만의 미학' , '불필요한 연출 배제', '경기를 임하는 태도의 진지함' 등을 강조하는 전일본 스타일을 체현한 것이기도 했다.
미사와 미츠하루, 타우에 아키라, 카와다 토시아키, 코바시 켄타 등 이른바 '''"전일본 4천왕"'''은 곧 왕도 프로레슬링의 상징이 되었다. 노장들이 '밝고 즐거운 레슬링'에 집중함에 따라 젊은 선수들이 가진 역량은 모두 경기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격렬한 시합에 다소 무리가 있었던 노장들은 오픈 시합의 코믹한 부분으로 자리를 비켜주니 메인이벤트급 시합은 회를 거듭할 수록 대담해지고 치열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기술을 받는 미학'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 기술의 위험성은 점점 높아갔고 그것을 극복하는 투지의 묘사를 위해 카운트 2.9로 표현되는 아슬아슬한 장면 묘사는 계속 정교화되면서 경기의 질이 올라간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기술을 받는 미학'이 시각적으로 잘 전달되지 않는 관절기는 가급적 배제되고 타격기와 수플렉스 계열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런 스타일은 전일본 이탈 전의 텐류 겐이치로가 표방했던 '지방 흥행이라도 격렬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를 담은 격렬한 스타일과 점보 츠루타 등의 전통적인 프로레슬링 스타일, 그리고 초슈 리키가 짧지만 강렬하게 보여줬던 빠른 속도의 공방이었던 '하이스퍼트 레슬링'이 당시 젊은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어 탄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와다 코헤 레퍼리에 따르면 자이언트 바바 본인 또한 사천왕 프로레슬링을 보고는 "프로레슬링관이 뒤집혀버릴" 정도의 충격을 받았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에이스였던 미사와 미츠하루 등을 포함한 전일본 선수 90%가 이탈해 프로레슬링 NOAH를 창설하면서 비슷한 경기 내용을 노아에서 보여줌에 따라 왕도 프로레슬링의 모습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비록 노아의 캐치 퍼레이즈는 '자유와 신념'이었지만 경기 내용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출신의 무토 케이지가 전일본의 사장이 되고 다소 연출적인 요소가 가미된 '패키지 프로레슬링'을 주창함에 따라 전일본에서 왕도 특유의 색채는 많이 희석되었다.
4. 문제점
하지만 문제는 이렇듯 살인기를 퍼붓는 식으로 경기를 하다보면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점. 스트롱 스타일의 "이노키즘"은 종합격투기에 대한 비이성적인 동경에서 문제를 초래했다면, 왕도 스타일에선 선수의 혹사문제가 대두되었다. 미사와 미츠하루의 비극적인 사망이나 코바시 켄타의 몸 상태 등이 이런 거친 경기들을 밥먹듯이 해냈던 것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수직낙하식 기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것도 이 시기의 전일본의 영향력이 컸다. 오죽하면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인간의 육체로 펼치는 하드코어 경기이다' 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특히 이러한 극한의 경기력 추구를 위해 살아남은 소수의 엘리트 레슬러들만이 살아남을수밖에 없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더불어 연출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동반했다. 메인이벤터조차 단벌타이즈에 하나같이 모든 레슬러들의 캐릭터성이 부족해 대부분 레슬러들이 하나같이 복제인간, 즉 성격이 비슷해보이고 그외 캐릭터성을 알수있는 난입/사고/세그먼트 그런요소들이 배제되어 꾸준히 시청하게 하는 드라마틱한 전개에 있어 매력이 부족하게 된 것. 경기력은 월등하나 즉 레슬러들을 상업적으로 파생 시킬수 있는 요소들이 근본적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3]
그런 의미에서 당시 전일본의 흥행은 프로레슬링 공식전 또는 대회인 것인마냥 진검승부 자체로 경기자체에는 몰입하게 하는 요소가 있으나 그 외적인 요소는 떨어졌다. 그 마저도 경기력이 부족한 레슬러들은 그 장점을 살리지못해 그당시에 사대천왕+노장(텐류 외 쟈니 에이스, 스턴 한센 등등) 이외에는 대부분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곧 쇼맨쉽 베이스의 레슬러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즉 악명 높은 일본의 '''조용한 프로레슬링 관중'''이 정점에 이르렀던 것.
결국 왕도 프로레슬링의 경기력은 전세계 프로레슬링 매니아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갈수록 높아져가는 사용 기술의 위험성으로 인해 (속칭 수직낙하 공방으로 말해지는) 프로레슬링 노아의 사장이자 왕도 스타일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미사와 미츠하루의 급사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5. 영향
그 황금기인 1990년대-2000년대 동안 데이브 멜처를 비롯한 많은 매니아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전일본에서 이어진 프로레슬링 NOAH의 2000년대 초 왕도 스타일은 한국에서 일본 프로레슬링 팬덤을 이끌어낸 최초의 흐름이기도 했다. 이처럼 선악역 등 기믹이 아닌 순수한 레슬링을 중시하는 운영방식은 북미권에도 큰 영향을 주어 초기 ROH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2010년대 후반 재부흥을 맞으며 기존 스트롱 스타일에서 벗어나고 있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오히려 과거 왕도 프로레슬링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관측 또한 나오고 있다. 마루후지 나오미치 인터뷰콜트 카바나: 90년대 초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ROH의 경기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코바시 켄타, 미사와 미츠하루, 카와다 토시아키 같은 선수들이요. 격하게 때리고, 큰 기술을 날리고, 투혼을 발휘하고, 덜 만화스러우며, 더 많은 신체 능력을 요구하는 스타일 말이죠. 그런 영향이 인디 씬에 정말로 퍼져나갔고, 이는 링 오브 아너가 출범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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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수 목록
[1] 예. 오니타 아츠시의 증언, 와다 코헤이 레퍼리의 증언 [2] Reddit 자료.[3] 다만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정점이었던 5강은 각자의 캐릭터성과 부여된 색깔, 치열한 라이벌 관계등으로 결코 연출력면에서 떨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5강 이외의, 중간급 선수들에게는 이 점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다.[4] 살인적인 각도의 백 드랍을 즐겨 쓰기로 유명했다. 북미권에선 아예 이 기술을 백드랍 '드라이버'로 부른다.